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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처녀의 비유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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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처녀의 비유 (마 25:1-13)

1세기 팔레스틴의 결혼 풍습은, 남자는 18-24세, 여자는 13-14세가 결혼 적령기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혼인은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 단계는 신랑 신부의 아버지들이 혼인을 약속합니다. 본인들이 혼인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는 정혼이 이루어진 다음에 신부 집에 모여서 여러 증인들 앞에서 결혼을 서약하는 약혼식을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약혼한 지 일 년이 지나서 혼인식을 치룹니다. 혼인식이란 신랑이 신부 집으로 신부를 데리러 가는 것을 말합니다. 혼례복을 차려 입은 신랑이 해가 진후 신부를 데리러 갑니다. 해가 진후에 신부를 데리러 가는 것은 유대인의 날에 대한 개념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에 대한 개념이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순서지만 유대인들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순서입니다. 신랑이 새 날이 시작될 때 신부의 집으로 가는데 이때 신부의 친구들이 들러리로 나섭니다.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의 행렬을 비출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갑니다.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을 신부 집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혼인 예식을 치루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10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랍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신랑이 더디 온 것 같습니다. 10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다 자고 졸고 있었습니다. 한 밤 중에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납니다. 이에 처녀들이 다 일어나서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는데 처녀들의 등불이 커져갑니다. 큰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등불을 들지 않고 혼인 행렬에 참가하면 불순한 의도가 있는 자로 취급되어 행렬에서 쫓겨납니다.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 달라고 청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기름을 빌려줬다가는 슬기로운 처녀들마저도 등이 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도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할 수 없어 기름을 사러 가고 그 사이에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신랑이 도착하고 혼인잔치집의 문이 닫히면 사람들이 더 이상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산후에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지만 열리지 않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들러리인 열 처녀는 교인들을 의미하며,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기름은 신앙을 유지시켜 주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럼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신앙생활은 재림을 준비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를 생각해 보고 지혜롭게 살아야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큰 부자집이 있었는데, 하루는 주인이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머슴을 불러 지팡이를 주면서 “여보게, 내가 보기에는 자네보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없을 것 같네. 그러니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가 자네보다 더 미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거든 주게나” 하고 놀렸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그 부자집 주인이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머슴이 주인을 찾아갔을 때 주인은 “여보게, 나는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먼 길을 떠나게 되었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머슴이 “어디로 가시며, 갈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이 머슴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미련을 떤다고 생각하면서 “아니, 이놈아, 죽음의 길에 무슨 준비가 필요하며,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아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머슴은 “주인어른, 하루 여행을 떠나도 목적지를 정하고 준비를 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그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생각하니 주인어른은 참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그러니 이 지팡이를 도로 받으시지요”라고 하면서 예전에 주인에게 받았던 지팡이를 다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종말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 종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개인의 종말이 있다는 사실은 다 믿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흔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성자 알로이시오(1568-1591)에 관한 일화입니다. 알로이시오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휴식 시간의 일이었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놀다가 잠시 스승과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승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을 당하게 된다면 자네들은 각자가 어떻게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첫째 학생은 “빨리 교회에 달려가서 기도를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둘째 학생은 “집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함께 종말을 준비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셋째 학생은 “어제 대화하다가 마음 상한 친구를 찾아가서 화해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간부터 종말을 준비하겠다는 답이었습니다. 그 말은 아직 종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로이시오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주저하지 않고 “지금은 휴식시간이니까. 이대로 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이미 종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했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준비를 했으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등은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말합니다. 기름은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살아 있는 신앙을 말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직분을 받아 겉은 멀쩡하지만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그 속에 성령의 역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종말적인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앞 장인 마 24장 ‘종말장’이라고 합니다. 마24장에서는 주님의 재림 직전에 되어질 일들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마 24장에서 예언한 일들이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주님의 재림 직전인 말세지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2003년 이란 남부에 있는 ‘밤’이라는 도시에 지진이 발생하여 26,000여 명이 사망한 적이 있습니다. 또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생겨난 ‘쓰나미’로 무려 176,0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세계 곳곳은 찜통더위와 집중호우, 태풍으로 얼룩졌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지역과 인도, 파키스탄 등은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로 인해 사망자가 속출했고,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강타하여 뉴올리언스시의 80%가 물에 잠기면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피해액도 400억~600억 달러나 될 만큼 미국 역사상 최대의 자연재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채지나지 않아 ‘허리케인 리타’가 몰려와서 또 다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재해는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기름 값이 상승했고, 미국 중서부의 가뭄으로 말미암아 곡물 가격이 급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파키스탄의 동북부에서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지진으로 파키스탄에서만 51,300명 이상이 사망을 했고, 74,000 여명이 부상을 당했고,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파키스탄 접경지역인 인도에서도 그 지진으로 1,300여명이 사망하고, 5천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을 정도로 많은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에 지진사태가 일어난 당일, 폭우를 동반한 허리케인 ‘스탠’이 파키스탄과 정반대에 있는 중남미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그래서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의 나라에 홍수와 산사태가 일어나서 2,000 여명이 숨지고, 119만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허리케인, 지진, 해일(쓰나미), 집중폭우, 찜통더위와 같은 자연재해가 요즘 들어 빈번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연재해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를 못하고 피해를 입었는데 오히려 짐승들은 미리 대비하여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지진이 파키스탄 북동부를 강타하기 전, 까마귀를 비롯한 새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파키스탄 카슈미르에서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까마귀들이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고 나서 둥지를 떠났는데, 곧 이어 강도 7.6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물의 재해에 대한 예지능력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형 재해 직전에 동물들이 이상행동을 보였다는 수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아체주 등, 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과 해일로 17만 명이 숨졌지만, 야생동물의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얄라 국립공원에 있던 코끼리와 사슴 떼는 지진 발생 직전에 고지대로 이동해 별 피해가 없었고,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에서도 해변가에 있던 영양 떼는 해일이 밀어닥치기 몇 분 전에 언덕으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1990년, 로스앤젤레스 지진 직전에는 USC(남캘리포니아대학) 연구소에 있던 토끼들이 괴성을 지르며, 우리 안에서 날뛰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1975년, 중국 하이청(海城)에 7.3이나 되는 강진이 발생했을 때, 겨울잠을 자던 뱀이 도로로 나와 얼어 죽은 것을 주민들이 보고 신속히 대피함으로 희생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지진이나 태풍이나 해일이 닥칠 때에도 동물이 이상행동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개미나 뱀이나 까마귀나 코끼리와 같은 동물들도 여러 가지 자연재해의 징조들을 보고 미리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처처에 기근과 전쟁과 지진과 재난이 닥치는 것을 보면 말세인 것이 분명한데, 여러분들은 말세를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유명한 문학가이신 어느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집사님은 폐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입원실 밖에서 가족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6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6개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지. 내가 제대로 인생을 마쳐야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 때까지 갚지 못한 빚을 갚았습니다. 그 동안 서먹서먹했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오해를 풀고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 동안 소홀히 했던 자녀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지면서 한 가지씩 서서히 자기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폐암은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결국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암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에 진단했던 병원에서 오진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를 정리하느라 많은 돈을 썼고, 무엇보다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손해가 막심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생 동안 지난 6개월처럼 진지하게 삶을 살았던 때가 없었습니다. 나머지 인생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저는 그 분의 이 고백이 말세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2. 신앙생활은 기다림입니다.

신앙생활은 다시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요 14장에 보면 주님이 하늘나라에 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 후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본문에 보면 기다리던 신랑이 더디 왔습니다. 10처녀는 기다림에 지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오랜 기다림이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구별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옛말에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길이 멀고 험해야 타고 가는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 온갖 풍상을 겪어 보아야 사람의 우정이나 사랑이 진실한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시험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면에서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준 사람들이 500여 형제였습니다. 자매들까지 합치면 약 2000명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행 1:15을 보면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했던 사람들이 120명이었습니다. 약 1800여명은 어디에 간 것입니까? 그들은 기다림에 실패해서 대부분 갈릴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기다림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서 기다린 120명은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복을 받은 것입니다. 120명의 성도들은 기다림에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기도하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시 40:1에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반송된 소포가 많이 쌓여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선물을 보내셨는데 받는 사람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이사가 버려서 소포가 배달되지 못하고 되돌아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늘의 복을 내려주어도 기다리지 못해서 응답과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 30:18에서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극장에서 직원 한 사람이 여자 손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찾아달라며 좌석번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직원은 여자 손님이 말한 그 좌석에 가서 확인해 봤더니 정말 다이아몬드 반지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직원은 반지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서 전화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손님은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반지는 찾았지만 손님이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반지를 돌려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는데 그 비전이 자신의 생활과 거리가 먼 것 같고 전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하다면 기다리십시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만 붙잡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자신은 점점 늙어갑니다. 그러나 아들은 생기지 않고 아내를 보니 가능성도 없어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서두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약속을 확인시키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월이 조금 더 흘렀습니다. 이제 나이 86세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급증에 걸렸습니다. 사람이 조급해지면 실수를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조언을 따라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 이후 약 13년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침묵하셨습니다. 조급함을 따라 행동한 아브라함은 13년이라는 엄청난 기간 동안 영적인 침체, 영적인 터널을 통과하게 됩니다. 조급함을 따라 행동한 결과 13년이라는 세월동안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했던 것은 자기가 때와 기한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한이 지나가니까 조급해서 기다리지 못하고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비전이 있습니까? 조급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조급하여 조급함을 따라 행동하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고 고통의 시간만 길어집니다. 하나님은 약속만 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짜~잔” 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환경이 하나님의 응답과 정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응답을 꿈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는 종살이에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정 반대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응답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하실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신앙은 개별적입니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를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눈 것은, 교인들을 크게 둘로 나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인은 교인인데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천국에 갈 사람이 있고 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은 본인의 신앙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교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나온다고 다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나온다고 다 믿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도 준비해 놓지 않고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아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가 나니 그때서야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면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름이 부족하여 쩔쩔매는 친구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인 다섯 처녀는,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을 듣는 대신 오히려 지혜롭다는 칭찬과 함께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가진 재산은 나누어 줄 수 있지만, 나에게 속한 남편이나 아내는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나누어 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출생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영생을 좌우할 믿음과 구원 역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백이 나를 구원 하고, 나의 회개가 나를 죄에서 건지고, 나의 충성과 봉사와 희생으로 내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남자들 가운데는 “마누라 치마 폭 잡고 천국에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절대적으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것도 개별적으로 자신이 준비해야 하고, 혼인집에 들어가는 것도 개별적으로 자신이 준비된 사람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는 것도 개별적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개별적인 것입니다.

시카고의 무디신학교 총장이었던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 박사가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가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 하고 말하면 내 아들은 '하나님 할아버지' 하고 불러야 됩니다. 그러나 아들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스개 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믿음 없는 사람이 아내를 따라서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더니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아내 옆 자리에 앉아더니 “하나님 장인어른”이라고 했답니다. 육적으로 보면 아내의 아버지면 남편의 장인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영적인 족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별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부모의 믿음 때문에 자녀가 구원을 받고 아내의 믿음 때문에 남편이 구원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만 던지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나는 여분의 기름이 준비되었습니까? 나는 조급함이나 흔들림 없이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주님과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준비가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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