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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족함을 아는 지혜 (단 5:24~28, 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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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을 아는 지혜 (단 5:24~28, 계 3:17)“고구려 시대에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탄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어떤 아이가 이렇게 답을 썼습니다. ‘송일국’. 옛날 궁사의 이야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화살의 숫자가 충분할 때는 과녁에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에 화살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활을 당기면 백발백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간은 부족해야 좋다고 합니다. 충분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카지마 다카시의 ‘3초간 집중력 단련법’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을 알고 부족한 것과 부족을 모르고 부족한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부족한 것을 아는 것은 부족이 아니라 풍성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1차 침공 때인 주전 606년 포로 된 유대귀족 출신의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성장하면서 꿈을 해몽하여 총리의 자리에 오릅니다. 느부갓네살이 죽을 때 은퇴하였다가 그의 아들인 벨사살 왕의 꿈 해몽으로 다시 치리자가 됩니다. 바벨론이 메데 바사에게 멸망당한 후에 메데 바사의 다리오왕과 고레스 왕 때에도 고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고레스왕이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는 칙령을 발표했을 때에도 귀환하지 않고 90세에 메데 바사에서 죽었습니다. 본문은 부왕인 느부갓네살 보다 더 포학하고 용맹과 위용이 넘치는 벨사살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 성전 그릇들을 술잔으로 사용할 만큼 무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꿈을 꾸었을 때에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씨를 썼습니다. 바사의 점쟁이와 술객들이 왔지만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벨사살왕은 다니엘에게 해석을 의뢰하였습니다. 그 벽에 쓰인 손가락 글씨는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세어서 끝나게 하였고, 왕이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보였다, 나라가 나뉘어 메데 바사에게 준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데 바사는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는 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강한 듯이 보이지만 부족함이 보입니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지만 나라가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강성합니까? 얼마나 예수를 오래 믿고 잘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대단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직도 우리가 천하제일이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부족함이란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인생의 법칙임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교회의 자랑거리, 좋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 고칠 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아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첫째,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습니다. 다니엘 5:27에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라고 합니다. 벨사살 왕의 위용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세상에 겁날 게 없었습니다. 부왕인 느부갓네살보다 더 포악하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 볼 때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메네’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어서 끝나게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개인과 국가와 인류의 날을 세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0:30에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어”라고 합니다. 욥기 14:16에는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지 않지만 하나님은 세십니다.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안 세니까 부족함을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세시니 부족함을 아십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부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목여전’(神目如電)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번개와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보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좌우명은 ‘Coram deo’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진지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C. S. 루이스의 공상 과학 소설 가운데 ‘페레란트라’(Pererantra)가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한 천사는 하나님의 눈에 우리 인간은 무한히 부족하면서도 무한히 부요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한히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부족을 아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부족함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금방 압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달인이라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떼어 놓는데 어쩜 그렇게 정확한지 무게가 항상 같아요. 그러나 늘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손은 저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눈금을 속일 수도 없습니다. 바벨론은 강성한 나라였지만 페르시아에 망해서 종말을 맞습니다. 페르시아도 강한 나라였지만 헬라에게 망하여 종말을 맞습니다. 헬라는 멸망을 모를 것 같았지만 로마에 망해 종말을 맞습니다. 로마는 망하지 않을 것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나뉘어 최후를 맞습니다. 외적으로는 강성했지만 내적으로는 모두가 부족했습니다. 지구상에 절대 강자는 없습니다. 인간의 집단은 모두가 부족하고 허점이 있고 틈새를 보입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보세요. 자신이 절대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가 가장 위태로운 때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모두가 경쟁자가 없으면 오히려 고민해봐야 합니다. 중세 교회는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의 수장이 되어 황제 임명권까지 가진 때가 있었습니다. 1077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하인리히 4세는 추운 겨울날 카노사성의 눈 위에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사죄를 빌었습니다. 가장 힘이 있을 때가 가장 부패한 때입니다. 가장 풍성할 때가 부족할 때입니다. 제정 러시아 최후의 날을 보세요. 톨스토이와 토스토에프스키와 같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작가들을 배출한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 전야에는 전 국민의 98%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교회는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습니다. 바깥으로는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안으로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17에는 말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네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부족을 모르는 것이 부족입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면 그만큼 부족한 것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아시지요? 우리는 누구나 ‘벌거벗은 임금님 신드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화려한 줄 알지만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음의 부족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똑똑한 줄 알지만 실제로는 너무 모르는 것이 많고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벌거벗은 임금님이 우리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관원을 보세요. 영생에 대한 위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 때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생각에는 자신의 삶이 완전한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주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율법주의자 같지만 부족이 있었고, 자신의 부족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절친한 친구이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저자인 필립 멜랑히톤이 있습니다. 그는 격정적인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행동가이기를 거부하고 학자를 고집하고 냉정한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독일의 종교개혁에 참여한 후에도 계속 수사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그를 본 루터는 어느 날 멜랑히톤의 고매한 절제력에 참다못하여 “제발 밖에 나가서 죄를 좀 짓고 와 보게. 그래야 하나님도 자네를 용서하실 게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답니다. 루터의 눈에 멜랑히톤은 완전한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아닙니다. 사람 눈에 완벽한 것 같지만 사람은 누구나 부족은 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굉장한 줄 압니다. 실제로 굉장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의 부족도 알아야 굉장한 것입니다. 좋은 전통도 있고 뿌리 깊은 신앙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열정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합니다. 이런 부족을 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혜입니다. 신앙은 부족함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둘째, 부족함을 모르면 모두 빼앗깁니다. 28절에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데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부족함의 결과는 빼앗김입니다. 부족함을 알면 얻고 채워집니다. 부족함의 결과는 완전 부족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무(無)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빼앗기면 무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비유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보세요. 그 결론이 마태복음 25:29에 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부족의 결과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무의 상태입니다. 부족을 알고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족을 알고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라만 빼앗기면 다행이지요. 벨사살 왕은 그의 목숨까지 빼앗겼습니다. 30절에는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합니다. 그 날 밤에 빼앗길 걸 모르고 부족함이 없는 줄 아는 어리석은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도 똑 같습니다. 그는 많은 곡식을 수확하여 곳간을 더 지었습니다. 그리고 평안히 먹고 즐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오늘 반에 너의 영혼을 거두어가면 네 가진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내일을 기약하면서 즐기려고 계획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족한 일인가를 말씀합니다. 사울은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얼짱, 몸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사울만큼 준수한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울을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부족하여 왕위를 상실했습니다. 사무엘상 15:23에는 “여호와께서 왕을 버렸으므로”라고 합니다. 15:28에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라고 합니다. 가룟유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를 선택하여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를 괄시한 적도 없고, 다른 제자와 똑같은 사명과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사도직을 계승하지 못하고 그의 사도의 직을 빼앗아 맛디아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긍지는 대단합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연동교회 부임하였을 때에 어떤 분은 제가 있던 그 교회 10개를 줘도 안 바꾼다고 합디다. 그 교회도 안 바꿔주지요. 긍지만 가지고는 시대를 이끌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교회들은 가지고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우리의 긍지가 돋보입니다. 교회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항상 교회가 활기 있고 생동감이 있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부족을 아는 교회입니다. 전통과 역사는 뿌리입니다. 거기에다 새 가지, 새 잎이 나야 합니다.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오래 된 나무로 유명합니다. 은행이 열매를 못 맺으면 어떻게 됩니까? 은행나무로서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고목을 보면 뿌리는 든든한 것 같은데 기둥 한 가운데가 시커멓게 타고 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 된 우리 교회는 어디가 비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총명함입니다. 우리의 부족을 모르면 빼앗깁니다. 우리의 자리도 위치도 권위도 명예도 한 순간에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가 역사와 전통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에서의 리더십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부족을 모르면 빼앗기고 부족을 알면 다시 찾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교회를 보세요. 2:5에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합니다.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책임을 하지 못하면 빼앗고 옮겨버리십니다. 부족하면 빼앗깁니다. 왜냐하면 부족한 사람은 줘도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줘도 간직하지 못하고 없애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주인이 어떤 종에게는 5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2달란트를 주었습니까? 그 종들은 간직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종에게는 1달란트밖에 주지 않았습니까? 그 종은 자기에게 준 것도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빼앗는 편도 나쁘지만 빼앗기는 편도 반드시 잘 한 것은 아닙니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내게도 있습니다. 계시록 3:11에는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보존은 얻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우리의 부족을 알고 채우지 않으면 교회의 영적 주권도 빼앗깁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은 영적 주권으로 세계를 이끌어갔습니다.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세계 교회를 지원하였습니다. 장학금으로 각국 지도자를 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아닙니다. 지금은 다른 교회들이 영적 주권을 가지고 세계 교회를 이끌어갑니다. 지금은 21세기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오순절주의’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미래를 쥐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세속주의가 아니라 오순절주의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인 하비 콕스도 그의 오래 전 저서인 ‘세속 도시’에서는 기독교의 쇠퇴와 탈종교현상을 예측하였지만 최근의 그의 저서 ‘하늘에서 내려온 불’(Fire From Heaven)에서는 오순절주의의 성장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영성, 음악, 여성’이란 제목으로 우리나라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세계는 지성주의에서 신비주의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빼앗기고 얻는 과정에 있습니다. 무엇이 왜 빼앗겼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총과 촛대를 빼앗기지 않게 잘 지키기를 바랍니다.결론 ‘열세 살 키라’라는 책에는 완벽한 사람도 없지만 결점 투성이인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완전은 없습니다. 완벽한 사람이나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아는 사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완벽한 사람들만 쓰셨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약점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48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온전하고 완벽해야 합니다. ‘완벽함’이란 히브리말로 번역하면 ‘인정이 많은’이란 뜻입니다. 남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이 완벽으로 가는 길입니다. 날마다 부족을 알고, 온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여기에 신앙의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오랜 전통에서 오는 타성이나 감격 없음인 열정 부족, 이런 것들을 고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 풍성하심으로 채우는 해가 되어 연말에는 풍성한 생명의 열매가 있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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