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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자 (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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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자 (눅 9:28-36)

금주 수요일, 2. 6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재의 수요일이라는 이름은 이 날의 예배 중에 재를 사용하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면 잘 모르니, 참회의 수요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극도의 회개와 비통한 상태를 표할 때에는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재는 초목이나, 석탄, 목탄 등을 불태운 뒤에 남는 분말을 말합니다.  재는 물건이 불에 타고 남은 찌꺼기로, 반드시 불에 타야만 얻는 것으로 고통과 무가치함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재는 무가치함을 드러내주고 있으며, 티끌과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재를 무릅쓰고 재 가운데 앉아 있다는 말은 통회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에 재를 뒤집어쓰기도 하였으며, 민족적인 수치에 대한 원한의 표시로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예를 들면 욥은 인간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떨어졌을 때에 재 가운데에 앉아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망해가는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앉아 통회하였습니다.

이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사순절은 반드시 수요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날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종려주일에 사용한 종려나무 가지를 말려두었다가 그것을 태우면서 남은 재를 가지고 이마에 발라 십자가를 그으며 통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말 참회하려고 하면 재를 머리와 온 몸에 뒤집어쓰고 해야합니다.  현재는 약식으로 지키면서 세례서약을 재 다짐하는 순서를 가지며, 성찬예식을 거행하며, 이마에 재를 발라 십자가를 긋고 묵상과 자복의 기도를 드리는 정도로 진행하게 됩니다. 

교회는 주현절이 끝나고 사순절로 넘어가는 때에 주님의 산상변모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주님의 산상변모주일은 주님의 공생애에서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고, 이제부터 수난  받는 그리스도로서의 마지막 생애를 살아가시게 됩니다. 주님이 산에서 변화되신 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잘 보여주시고 있는 사건입니다. 

신약신학자들이 연구하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메시아 비밀”이라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령의 임재하심, 그리고 수많은 이적과 능력,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잘 드러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보여주려는 것은 예수님은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극구 함구하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귀신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고 함구하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귀신들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리 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1:2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불치의 질병인 나환자를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시고는 곧 보내시면서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로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막1:43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 그 된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막5:43) 

우리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로부터 결정적인 신앙고백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막8:30)고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더욱 자세합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16:20)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 즉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시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과거에 오신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과 당시대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고 있습니다.   

막4:11-12에서 “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당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우리 주님이 메시아로 오신 사실은 보기는 하면서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편으로 메시아이심을 말하지 못하게 경계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이르게 되자 이제부터는 함구를 명하시지 않고 널리 드러내라고 하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활동하시는데 비밀에 붙여질 수 있습니까?  막1:28에서는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고 했습니다.  막7:6에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막5:19에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2:1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막2:17에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시냐 하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세 제자를 이끄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에 오르신 것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받은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수난 예고에 이어진 사건으로 그러면 과연 우리 주님 예수는 누구시냐 하는 문제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우리 주님은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낙심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영광 가운데 왕이 되실 것을 기대하였다가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안목이 크게 결여되었고,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낙심하고 실망하였지만, 이제 변화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현존이 계시되는 사건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되고, 소망을 간직하고 산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 당하실 예수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하시는 분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인간의 언어로 충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도 설명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가이샤랴 빌립보에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한 주간쯤 지난 때였습니다. 그 산을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에서 가까운 헬몬산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올라간 높은 산은 갈릴리의 다볼산이 아니라, 헬몬산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깊이 졸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어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 앞에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고, 그의 옷은 투명한 흰색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그 흰옷은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져 있었습니다.  “변형되었다”, “변화되었다”는 말은 단순한 외관상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존재로 변화되신 것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예수님을 보는 순간 구약의 가장 위대한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 두 사람이 모세인지 엘리야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복음서의 본문들은 많은 것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문득 두 분이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다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구약의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주셨고, 율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문서 이전의 선지자로 모든 선지자들의 대표였습니다. 

두 분은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신 종들이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바르게 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시려고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장차 메시아를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대면하면서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별세하실 것을 놓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백성을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외친 것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장차 새언약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만 인류의 구원이 이뤄진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믿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 서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님의 변화되신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구약의 대표자들이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면서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연장하기 위하여 초막 셋을 짓자고 하였지만 그런 제안은 일시적인 충동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이 장차 감당하실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드려도 두려운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면서도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지금 이 땅에 있는지, 하늘나라에 왔는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 모두를 덮었습니다. 제자들이 구름속으로 들어갈 때에 두려운 정도가 아니라 무서워 떨었습니다.  이제 저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자기가 직접 들은 말씀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을 적었으니 다른 두 복음서와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음성을 직접 들으신 분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제자요 베드로에게 들은 대로 기록하는 마가복음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는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기록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을 말을 적고 있으나 거의 비슷한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정확하게 일치하며, “아들”이라는 말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요, 기뻐하시는 자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제자들이 땅에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갔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았는데,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내려오실 때에,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메시아의 비밀을 함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한시적인 것으로, 장차 우리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에는 변화산에 있었던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하여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 빛, 찬란함, 구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 제자들의 두려움, 오래 전에 작고하셨던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과 사라지는 이 모든 것은 이 땅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 주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사건이라고 해도 정확한 뜻을 다 말씀드리고 정확한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 두 분의 지도자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신 것도 우리는 정확한 뜻을 모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큰 뜻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사건은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주신 것이요,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이어지고 들어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경을 해석하는 키워드가 되고, 마스터키가 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올라가서 죽으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입으신 곧 하나님이시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당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이 되셨습니다.

두 분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나눈 말씀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별세라는 말은 떠날 별(別), 세상 세(世)라고 하여 ‘세상을 떠난다’는 말로 ‘죽음을 높이는 말’입니다.  별이라는 말에는 다를 별(別)이라고 하여 ‘다른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통하여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별세’라는 말은 세상을 떠난다,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인데, 본문에 나오는 별세는 헬라어로 “엑소도스”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하는 것을 엑소도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역을 마치는 것과 새로운 세계로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엑소도스라는 말은 떠난다, 나간다, 출구를 말합니다.  죽음이란 다른 말로 엑소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요, 완성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변화산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 주님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그는 우리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이셨습니다.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도 하나님을 알고, 또 우리 주님을 알아보는 것을 물론이며,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율법의 가르침을 받았고,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신 우리 주님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구원해주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과 은밀한 교제, 기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의 인격도 변화되고, 심지어 용모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산 아래 질병과 고통이 넘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 다른 세계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셔야 하는 산 아래로 함께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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