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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롬 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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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롬 5:12-21)

어느 집에 시어머니가 밥을 혼자서 먹고 있었습니다.
마침 시댁에 들린 막내며느리가 깜짝 놀라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머나 어떻게 찬밥을? 형님은 어디 가셨나요?”
그리곤 밥을 짓느라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시어머니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옷가방을 챙겨 나왔습니다.
막내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님, 어딜 가시려고요?”
그러자 시어머니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더운 밥 해준 너희 집에 가서 살련다.”
막내며느리의 얼굴은 순간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하여서는 우리 성도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저는 이 글을 책을 통해 접하면서 시어머니의 지혜로움이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다시는 맏동서를 은근히 욕하거나 자기 앞에서 동서를 비난하는 턱으로 알랑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단단히 막내며느리를 가르친 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런 또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해결되지 않는 욕심이 하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기성입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맏며느리의 잠깐의 실수를 통해 득을 보려는 막내며느리의 자기중심주의가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죄성입니다.

또 다른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만이 욕심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비유를 동물의 예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자와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자신의 배가 부르면 절대로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배가 불러도 욕심의 사냥들을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한 뒤에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비유로 죄를 지적한 내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부자에게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그는 자기에는 손님을 대접할 상당히 많은 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양 새끼를 잡아다가 손님을 접대했다는 이야기의 비유입니다.
부자에게 있었던 죄성이 무엇입니까?
욕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부자의 욕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도전은 그 욕심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의합니까?
원죄의 뿌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원죄의 뿌리”
이 점이 오늘 설교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과 로마서의 18번째의 강해를 하며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로마서라는 말씀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이라기보다는 성서해석이 필요한 책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역시 나름대로 상당히 깊은 교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의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쉽지 않은 성경의 요절입니다.
저는 오늘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반드시 알아야 내용을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우들이 잘 경청하시고 잘 따라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죄의 뿌리”라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질문을 하면서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2절을 주목하십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 참으로 없었으면 참 좋았겠는데 하는 구절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주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거주하게 했던 처음 사람 아담을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어지간히 한 성도들 말고도 교회의 ‘교’자도 잘 모르는 사람조차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담이 자기 아내와 함께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이 땅에 죄가 들어왔는데 이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로 인하여 우리 인간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갑니다.
아담이 지은 죄를 우리는 ‘원죄’라고 말하고 그가 지은 죄가 인류에게 옮겨진 사건을 신학적인 용어로 ‘죄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참 재미가 없습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하고 재미없어 할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재미는 없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담의 그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원리를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전반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16절 후반절도 기억하십시오.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절 전반절을 다시 소개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18절도 전반절도 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마지막으로 19절의 전반절을 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15절부터 19절까지 계속 반복되는 어구가 있습니다.
무슨 어구입니까?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짓게 된 범죄로 인하여 우리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범죄자가 되어 죽게 된 것이 억울하십니까?
너무 억울합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억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아담 할아버지를 알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죽게 된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우리 성도들에게 한 번 더 어려운 신학적인 용어를 빌리겠습니다.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신학의 용어 가운데 ‘대표성의 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Typology' 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예표론’이라고도 합니다.
이제는 이 신학적인 용어를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나라가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에게 금융구제 신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른 바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기도 싫은 IMF 사태라고 합니다.
국제 통화 기금에서 외화를 대출해 주는 대신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댓가로 요구했고 우리나라는 두 손을 들고 구조조정을 하게 되어서 졸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에 노숙자들로 내몰려서 어떤 이들은 목숨까지 스스로 끊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잘 알지도 모르는 IMF 사태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했습니까?

당시에 김영삼 정부가 외환보유고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정책을 펴서 조지소로스라는 유태계의 큰 부자가 우리나라의 펀드 시장에서 돈을 빼는 바람에 국가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결국은 국가신인도가 바닥을 쳤기 때문입니다.
이 때 상당히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그 때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의 일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국가라는 대표성의 브랜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선량한 국민들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신앙적인 관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는 인류에게 원죄라는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되어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야고보 기자의 선언대로 우리는 그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약 1:15절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하고 설교를 맺으면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여기까지만 설교하는 것이 결론이라면 우리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것 같은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원죄가 전가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두 번째의 아담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른 바 Second Adam입니다.

두 번째 보내신 세컨드 아담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17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큰 은혜가 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전술했듯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게 된 우리들을 다시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해서 두 번째 아담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와서 범죄 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와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을 그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로마서의 18번째의 강해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14-15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죄의 전가를 통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전술한 것처럼 우리는 아담의 대표성의 원리로 인하여 원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만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둘째 아담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둘째 아담으로 오신 아들 예수를 우리들이 죽어야 하는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구원이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사를 완성하시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여러 가지의 Symbol 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낮 예배의 짧은 시간으로 이 구속사의 상징을 말씀드릴 수는 시간의 제약 때문에 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하여 말씀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단어가 나왔으니까 한 예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구속의 은혜라는 말을 생각하면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의 기사가 떠오릅니다.
창세기 37장의 기사입니다.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나 잘못하는 바람에 그는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미워하던 형들이 요셉을 적당한 기회가 되면 죽이겠다고 생각을 하던 어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도단에서 양을 치며 일을 하고 있는 현장으로 아버지의 보호 없이 동생 요셉이 온 것입니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생매장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나머지 형들이 동의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맹수에게 동생이 당했다고 보고하면 될 것이라고 말까지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장형이었던 르우벤이 동생들의 제안에 동의하지를 않습니다.
창세기 37:18-22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잘 들으십시오.
요셉이 도단의 들에서 생매장 될 수 있는 위기에 건짐을 당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르우벤 때문이었습니다.
르우벤이 구덩이에 던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를 매장하지는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큰 형 르우벤에게 어떤 특별한 사랑을 받은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할 때 같아 분개했고 같이 미워했던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장 위기의 순간에 르우벤 때문에 죽음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을 큰 형 르우벤에게 그 어떤 것도 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큰 형에 의해서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표현하는 것이 단어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

요셉은 후에 세 째 형 유다에 의해서 구덩이에서 건져올림을 당했고 애굽의 상고들에게 은 이십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래서는 우리는 요셉을 유다에 의해 은 삼십에 팔려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구원자가 되신 예수의 심볼로 여겨지는 인물이라고 많은 구약학자들이 동일하게 동의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요셉이 값없이 받은 은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은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귀한 것을 받을 때 말하는 단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은혜를 받은 주인공들입니다.

『지난 주에 후배목사와 함께 교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예배에 잠시 언급을 했는데 교회를 개척하고 1년이 지났는데도 한 명도 구원을 시키지 못했답니다.
원래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이었는데 다시 기도의 끈을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산에서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든지 무릎 연골이 다 망가져서 무릎 연골 수술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 성도들이 한 명 두 명 들어오기를 시작했습니다.
풍에 맞아 반신불수가 된 노인이 들어왔습니다.
귀신들려 흑암의 고통에서 헤매고 있는 자매가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전도를 하다가 알코올 중독자를 만났습니다.
이야기 끝에 나는 장로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살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제는 인생이 망가진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후배 목사님이 그 고백을 듣고 난 뒤에 교회에 다시 나오시면 회복된다고 권명을 했습니다.
주일에 기다렸는데 그 형제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다음 주일 예배 전에 그 형제의 집을 찾았더니 그 시간에 역시 술을 마시고있었습니다.

후배목사가 그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차에 싣고 교회에 강권적으로 데려다 앉혀놓았습니다.
그 날 그 형제가 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교제 중에 후배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모시고 있는 어머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교회는 전부 그렇게 이상한 사람만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조금 멀쩡한 사람이 나오면 좋겠다고”

그런데 그 날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며 울었습니다.
“목사님, 이제 우리 교회에 장년 신자가 10여명 정도 되는데 그들이 전부 병자이고 이상한 몰골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저는 그 날 후배 목사님의 감동적인 고백을 들으면서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어간에 아주 강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완전히 망가져서 더 이상의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인이었던 나를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으시고 번쩍 들어 안으시고 구원의 자리로 옮겨주신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말로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존재인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위로부터 내시는 풍성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존재로 나를 만들어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고백할 수 있는 찬양이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고 고백할 수 있는 대답이 이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감격적인 주님을 향한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8-19절을 곱씹겠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역설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아서 그 순종하지 않음의 전가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아담이 순종하지 못한 것을 순종하심으로 우리 인간들을 대표성의 원리로 인해 다시 구원받은 의인이 되게 하셨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이라는 선물을 은혜로 받게 된 두 번째의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우리에게 주님의 순종하심이 얼마나 위대하신 결단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성경적인 실례입니다.
빌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해석하면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가졌지만 하나님 스스로이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셨습니다.
그 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자이셨습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셨습니다.
결코 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서에 무엇이라고 표현했습니까?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 당신이셨던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 복종의 climax 가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이 땅의 사람들이 행하는 모습을 보면 가증하고 패역하고 죄악이 점철되었고 그래서 지으신 것을 한탄할 정도의 죄인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하기를 결단하셨습니다.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급선무가 필요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께서 대신 죽어야 하는 데 그것을 거부하면 구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아들이 거부하면 그냥 거부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네가 대신 죽을 수 있겠니?”를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잘 듣고 이해한 뒤에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셔서 고난을 받은 신 후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죽기까지 복종하시고’의 복종의 원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종하다’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uphkoo"’(휘페쿠스) 라는 단어로 썼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경청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주 잘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경청한 뒤의 결단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여러분 잘 아십니다.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죽기 싫다는 기도입니다.

눅 22:42절의 전반절입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구절을 가지고 어떤 신학자가 기가 막힌 표현을 했습니다.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임했던 첫 번째의 위기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갈파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가 싫어서 십자가를 포기한다고 결정해버렸다면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 한 것은 주님의 기도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22:42절은 후반절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주님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이라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순종이 있기 까지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철저히 자기의 생각은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었다는 전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이라는 믿음의 행위는 내 생각을 버릴 때 가능합니다.
내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나아만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 아람 나라의 제 2인자로 일컬어지는 권세가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나아만 극적으로 포로로 있던 히브리 여종에게서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사라는 유명한 선지자가 자신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해 줌으로 자신의 무서운 병이 낫게 될 것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찾아가게 됩니다.그러나 나아만 장군의 꿈은 일순간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엘리사 집의 문을 두드렸지만 엘리사를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사환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고는 엘리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랍니다. 그러면 온 몸에 새 살이 돋아 병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을 홀대하고 문전박대하는 엘리사로 인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올 때 요단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마침 요단강은 우기가 지나간 때여서 시뻘건 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난 나아만이 불만을 토로한 말씀이 바로 열왕기하 5:11-12절입니다.

“ 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지금 나아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엘리사가 나와서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지금 엘리사가 이는 도단에 왜 왔는지에 대하여 망각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는 자기를 높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아만이 이렇게 본질을 잃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에는’ 이라는 변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자기 생각의 포기하심이 우리를 구원한 요건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도전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것에 정말로 열광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내 생각을 주님을 위하여 포기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꿈틀거리는 사람은 구원의 진정한 감격을 맛보지 않았거나 그 은혜를 잊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순종하심은 자기의 생각을 접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은혜인 것을 명심하고 우리도 그러한 삶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아주 재미있는 그러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쑤시게 하나로 기골이 장대한 코끼리를 죽이는 방법이 있답니다.
혹시 여러분 아십니까?
잘 모르실 것입니다.
제가 알려 드립니다.

1) 죽을 때까지 찌른다.
2) 코끼리가 막 죽으려고 할 때 찌른다.
3) 한 번 찌르고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정답입니다.
누구도 토를 달을 수 없는 정답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머가 왜 나왔습니까?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지체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데에 있어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은혜에 이번 주간 우리 모두 끊임없이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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