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골 1:24-29)

  • 잡초 잡초
  • 489
  • 0

첨부 1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골 1:24-29)

누가복음10:25-37말씀은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외진 곳으로 끌려가서 많이 맞고 가진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거반 죽어가는 상태로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곁을 지나갑니다. 이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바빠서 그냥 지나갑니다. 얼마 후에 레위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그 처참한 광경을 보았으나 역시 자기 일이 바빠서 그냥 지나칩니다. 희망의 꺼져가는 상황에 마침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이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심하게 다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로 씻겨주고 상처를 싸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가서 돈을 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치료비가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더 드리겠습니다.” .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이야기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재로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사람들은 남을 도우며 사는 삶의 가치를 압니다. 그것이 인간다움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맞닥뜨리면 다른 일들을 핑계하며 피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는 주님의 교훈이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행동하는 봉사의 교훈을 넘어서는 소중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교회론 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들을 영적으로 강도만난 사람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침입한 강도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죽음이 있는 곳으로 추방당하여 신음하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누군가의 돌봄이 없으면 그렇게 죽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도만난 처참한 인류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목자 잃은 양과 같구나.”

여러분 목자 잃은 양의 모습이 얼마나 처량한지 아십니까?
언제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 두려워 초조하고 불안해합니다. 혼자 있음이 외롭고 어두운 밤이 두렵습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괴로워하며 차라리 죽음을 동경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이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강도만난 사람이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강도에게 맞은 자리를 고치고 상처를 싸매고, 그 회복을 위하여 데리고 간 주막은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교회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돌봅니다.
서로 격려합니다.
서로 위로합니다.
서로 도와줍니다.
서로를 부축하고 도와줍니다.
지친 영혼들이 새 힘을 얻습니다.

“교회” 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그림이 떠오르십니까?
크고 작은 건물입니까?
감리교회, 장로교회 하는 교단입니까?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중입니까?
아니면 좋은 뜻으로 모이는 사회단체입니까?

성경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100회 이상 나옵니다. 교회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예수님 승천 후에 피 값으로 사신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을 암시합니다. 

교회는 두 가지 기본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지역적인 그룹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지역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특정한 도시나 지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 “안디옥 교회”(행13:10),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로 표현합니다. 이런 의미로 “교회”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교회라고 말할 때는 어디에서도 건물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세기 당시에는 교회당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개 집에 모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한 가족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의 지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 천국에 가 있는 사람들도, 이곳이 아닌 세계의 어디서든지 동일한 믿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됩니다.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5:23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고린도전서12:12-31에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유대사람이든지 그리스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몽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그리고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

교회의 많은 지체인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Spirit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성령입니다. 이; 마음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2장에서 교회론을 말씀하고 난 다음, 곧바로 이어서 고린도전서13장에서는 그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약하다고 짐이 된다고 해서 내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약할수록 더욱 사랑으로 돌보고 섬깁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가을 가족이라는 말의 뜻을 새삼스럽게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생일에 원로목사님 가족이 저희 가족을 초대하여 좋은 식사를 대접해주시고 따뜻한 메시지를 담은 축하카드와 정성이 담긴 축하금까지 주셨습니다. 황송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아니, 원로목사님께서 후임목사이게 이렇게 하셔도 됩니까?”
그 때 목사님이 하신 말씀은 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
이 한 마디 말씀이 제 가슴이 새겨졌습니다. 참으로 고마왔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 볼 때 저와 원로목사님이 어떻게 가족이 됩니까?
저는 최씨 가문에서 태어났고, 원로목사님은 나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제가 목사님의 가정에서 한 솥의 밥을 먹으며 자라지 않았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 학비를 도와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족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가족입니다.
육신의 혈통보다 더 강한 예수님의 혈통을 함께 이어받았습니다. 우리 속에는 예수의 거룩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예수의 정신이 성령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데 조금도 이질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깁니다. 아버지의 영원한 집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 둘을 다 결혼주례를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새벽마다 목회 잘하라고 기도해 주시고 만날 때마다 격려해 주십니다.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의 가족들이 교회 공동체에 함께 모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사랑-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알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죽음을 당신이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심으로 우리 죄의 값을 완전히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무거리낌 없이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넉넉한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성경을 통해서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그들의 말씀을 통하여 이 시대를 향한 교회의 사명을 깨닫게도 하시고, 그 말씀으로 이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도 하십니다. 불완전한 사람을 통하여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은 성령으로 임재하시며 우리를 보다 오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십니다.

3.서로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나 문제가 없을 때는 혼자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만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 거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남자의 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133편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
머리 위의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께서 여기에 목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영어성경은 또 다른 의미를 전해줍니다. 
“형제자매가 함께 어울려 사는 일!”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harmony"
"For harmony is as precious as the anointing oil"
-하모니는 흘러내리는 기름같이 값비싼 것과 같다.
“Harmony is as refreshing as the dew from Mount Hermon"
하모니는 헐몬산의 아침이슬같이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한다.

시편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다양한 형제자매들이 모여 함께 조화를 이루며 섬깁니다. 
이 조화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기름처럼 값진 것입니다.
이 조화는 아침이슬처럼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사신바 된 이 교회 안에서 함께 모이는 모든 성도들 가운데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사는 기쁨을 얻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새 힘을 얻어 새롭게 됩니다.
형제자매들의 격려 속에서 우리는 거듭납니다.
건강할 때는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병들어 누웠을 때 찾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 형제의 그 평범한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1985년 12월31일부터 1986년 1월 2일까지 2년에 걸쳐서 3일간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일을 기억합니다. 아주 심한 독감을 앓았을 때 나를 찾아와 주신 의사 권사님은 천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형제자매가 서로 격려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가십시오. 서로 힘이 모아져야하는 때에 힘을 모아주십시오. 당신의 손이 필요한 교우를 찾아가서 가만히 손을 잡아주십시오. 백 마디의 말보다 곁에 앉아서 보내는 당신의 잠잠한 미소가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4.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함입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의 중서부 주에 있는 어느 농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집의 어린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변은 추수 때가 거의 다 되어 황금빛으로 물든 밀밭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친구들과 동내 주민들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빽빽하고 키가 큰 밀 때문에 설령 아이의 바로 옆을 지난다 해도 눈치 채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이틀이 지난 후, 절망에 빠진 아버지는 수색 자들에게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밀밭을 뒤져보자고 했습니다. 약 2천명의 사람들이 이렇게 밀밭을 뒤지다가 5백 미터도 못가서 싸늘하게 식은 아이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만약 조금만 더 일찍 서로 손을 잡았더라면 아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기 못했습니다.

교회는 서로서로 손을 잡는 곳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큰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손을 잡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번 설날 연휴기간동안 한국교회희망연대 회원교회들이 힘을 합쳐서 서울역 지하도에서 2만 명의 노숙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눕니다. 그것으로 서울의 모든 노숙자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부분이지만 모두가 설 명절이라고 돌아갈 집이 있어, 선물꾸러미를 들고 고향으로 향하는 이 때 쓸쓸히 외롭게 소외된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500만원을 드려서 이 일에 동참합니다. 사람들은 완전히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적인 작은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강도만난 자에게 베푸는 작은 사랑이 한 사람을 새롭게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2006년 사순절 때 하루 한 끼 금식헌금을 한 것으로 노숙자들에게 매주화요일 아침 식사를 나누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동안 약 3만 명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 좋은 일이 있을 때 스스로 자축하는 비용을 이들을 위해서 드림으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화요일 아침에 40여명의 교우들이 이 일에 협력하여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계속적인 사랑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금년 사순절부터는 또 하나의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금년부터 사순절 하루 한 끼 금식하여 드리는 헌금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제 작년에는 시흥교회를 보다 온전하게 세웠습니다. 작년에는 몽골신학교를 건축하였습니다. 금년부터는 여러분이 하루 한 끼 금식 헌금을 드리는 일을 모두가 동참하신다면 사실 1, 2년이면 새 교회를 하나 세우는 일은 가능합니다. 한 끼 식비 5000원을 사십일 동안 드리면 20만원입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참석하는 2000명이 모두 동참하시면 4억 원입니다. 한 사람이 하면 별것이 아니지만 함께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새로운 교회가 백병이 될 수도 있고, 만 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함께 손을 잡는 곳입니다.
작은 힘을 함께 모우는 곳입니다.
혼자면 할 수 없으나 함께 하면 사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레저 빛으로 강력한 강철을 절단하는 것을 봅니다. 어디에서 그 강력한 레저 빛이 나오는 것입니까? 사실은 평범한 빛을 한 곳에 모았을 때 나오는 엄청난 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골로새서1:24-29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으며, 그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 가고 있습니다···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려고 모든 사람을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사람을 가르칩니다. 나도 이 일을 위하여, 내 속에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그에게 힘을 얻어서 수고하고 있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