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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역사하는 말씀 (살전 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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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역사하는 말씀 (살전 2:13~16)

외국 여행을 하게 될 때 힘든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모든 풍습이 다릅니다. 우리네와는 먹는 것도 다르기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겪는 고통은 말도 다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이야 그런 가운데서도 고추장이라든가 라면이라든가 여러 가지 음식들을 싸들고 가서 우리네 입맛에 맞게 바꾸어 먹기도 하지만 그곳 음식점에서 우리네 음식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할 때는 정말 한 끼 식사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물론 잠자리가 바뀜으로 인해서 겪게 되는 고통도 있고 시차로 인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간단한 이야기야 뭐 바디 랭기지라고 해서 몸짓으로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생각을 마음대로 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그 나라 말을 하는 사람이 일행 중에 있어서 통역을 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못할 때는 정말 펄쩍 뛸 정도입니다. 물론 엉터리 말로 해도 그래도 다소는 통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네가 말하는 방법과 저들이 말하는 방법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외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똑같이 한국 사람끼리 말을 하는데도 내가 말하는 것과 그것을 듣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를 때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말을 잘못 알아듣기도 합니다. 또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귀담아 듣지를 못하고 잠시 상대방이 하는 말을 놓치게 되면 거꾸로 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말을 하는 사람도 부정확한 말보다는 정확하게 자기 뜻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말을 하다 보면 내 뜻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는 밉다고 할 때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쁘다는 것을 거꾸로 못 생겼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말과 표정이 서로 다를 때 듣는 이가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그 말하는 어투에 따라서 또 다르게 듣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말도 부드럽게 하면 좋은 말로 들리지만 비꼬듯이 하면 그건 상대방에 대한 욕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말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려운 말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쉬운 말도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듣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똑같은 말을 하는데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것이 오죽하겠습니까? 오늘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반응과 그에 따르는 결과를 살핌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참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참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는데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 통할 수 있는 통로이자 동시에 우리의 모든 능력의 근원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전해질 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 입니다.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맞느냐 하는 것이 첫째로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묻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과연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라고 해야 하느냐? 그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말씀하시며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믿어줄 것 같으냐고 다시 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를 던지라 하여 지팡이를 던졌더니 지팡이가 뱀이 됩니다. 다시 그 뱀을 집으라고 하셔서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무엇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건 오직 받아들이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고 믿을 때는 그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지만 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가 아닌 사람이 전하는 말로 들을 수밖에 없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말씀을 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해도 그래도 사람인 이상 자기 생각이 거기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거기에 사람의 생각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문제가 또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신 분이시오 그 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주어지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보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말씀을 전하도록 그 말씀을 그 입에 주시는 분도 하나님으로 믿을 때 그러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는 어떤 말씀도 아멘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그 말씀을 내가 판단하려고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말씀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가 되니 우리는 오직 예하고 아멘 할 뿐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지만 내가 그 말씀을 판단하려고 하면은 그 말씀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사람이 전하는 말로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소망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하기 위해서 언제나 깨어 기도하기를 힘씁니다. 또한 그래서 바울 사도가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마다 내가 담대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 달라”고 부탁한 것처럼 저 역시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제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을 전하는 제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성도 여러분 역시 그 모든 전해지는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를 겨냥해서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거든 그것을 불편한 마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깨우치고 나를 더 굳게 세우시고 나를 더 귀히 쓰시기 위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아멘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러분들의 마음속으로부터 귀한 역사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모든 약속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이렇게 아멘으로 말씀을 받는 분들입니다. 언제든지 예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고라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너희들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자냐? 우리도 그렇지 아니하냐?”고 하며 모세와 아론이 전하는 말을 듣고자 아니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모든 주어지는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도록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잘못된 것은 바로 세우시고 오히려 믿음으로 말씀을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더 큰 은혜를 베푸시고 놀라운 역사로 복되게 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저 역시 항상 두렵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지 아니하고 전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제게 어떻게 미칠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오직 나를 통해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심정으로 저 역시 항상 여러분들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할 때마다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해서 기도하여 주시고 또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사람의 전하는 말로가 아닌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우리 모두의 삶에 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따르고자 할 때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언제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 언제나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오 그분이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는 분인 줄로 우리가 믿는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고 하여도 여전히 우리를 시험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동족들 다시 말해서 같이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데 있습니다. 사실 믿음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에 대해서는 충분히 견디고 이길 힘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한데 같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우리는 비판하게 될 때 그로 인해서 우리가 상처를 받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날마다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고 모두와 웃으면서 잘 지내기를 원하는데 왜 실상은 그렇지 못한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형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어냐는 설문 조사를 했는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형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가장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 같이 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내게는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기대하는 것이 많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그래도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에 오히려 그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무심코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더 실망하게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당신이 내게 그럴 수 있어?” 하는 마음부터 생기다 보니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니 모두가 다 웃고 마는 그런 말도 내게는 상처가 됩니다. 나는 보다 열심을 내고 싶은데 “왜 당신만 그렇게 유난을 떨고 그러냐?”고 하면 그게 상처가 됩니다. 물론 사랑하기에 염려하는 마음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앞장서고 그래서 그 사람만 더 사랑받는다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누구만 특별히 더 사랑한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나도 그렇게 사랑받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성격적으로 잘 안 된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안 된다.”고만 하고 말겠습니까? 아니죠. 그렇기에 더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만 대접하여도 하늘의 상급을 받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누가 특별히 더 사랑받는다고 생각된다면 그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사랑을 받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그렇게 사랑받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제일 잘 믿는다, 자기들만이 잘 믿고 자기들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생각하고 믿는 것과는 다르다고 해서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 역시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아니 예수를 전한다고 해서 죽이려고까지 대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앞장서서 수고하는 이들을 딴죽 걸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그렇게 못하더라도 앞장서서 수고하는 이들을 볼 때 “잘 한다.”고 “수고한다.”고 격려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그렇게 수고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부끄럽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수고하는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더 축복하고 격려하며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열심을 내서 수고하려고 하니 누가 싫은 소리를 한다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내게 더 큰 훈장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광야의 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를 위해서 수고하는 길에 있는 핍박은 내 앞에 더 큰 은혜와 복이 준비되어 있다는 증거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가 바로 너희 집안사람들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은 내 가족이 원수라는 뜻이 아니라 악한 마귀는 내 가족들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일에 힘쓰지 못하도록 하게하고 내 마음에 상처가 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무언가 주를 위해서 힘좀 내 보려고 하면 그래서 은혜 받고자 주의 전으로 나아오고자 할 때 무심코 나누던 말이 내 마음에 걸리게 되고 그로 인해서 내가 이렇게 상한 마음으로 무슨 은혜를 받을 수 있겠나 싶어 “나 안가, 나 안 해” 할 때가 있지를 않습니까? 악한 마귀가 얼마나 약아빠졌는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일도, “그럴 수도 있지” 할 수 있는 일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 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우리가 속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누가 나를 섭섭하게 하거든 그건 하나님께서 나를 더 크게 쓰고자 하고 나를 더 복되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러기에 더 감사하고 더 힘써 수고하여야 합니다. 같이 하기로 했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 혼자뿐입니다. 그럴 때 “에이 나도 안 해”가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큰 은혜를 주시려고 나 혼자 수고하게 하시는 군요”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복을 누구로 인해서 차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굳게 붙잡고, 힘들게 느껴질 때 더 감사하며 수고하기에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믿음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능력과 역사는 다름 아닌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의 말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진정 풍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들려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지금까지는 그렇게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 예 하고 아멘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만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을 주시기를 위해서 또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받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우리들의 삶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가 놀라운 은혜와 상급으로 나타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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