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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증거 (행 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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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증거 (행 11:19-30)
   
  옛날에 우리나라에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원래 깡패 출신이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어서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중에 한 분이 된 분입니다. 이 분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전도를 하는데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나에게 보여주면 내가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하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나님을 보여 달라 말해서 김익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를 보라, 나를 보라. 김익두가 변한 것을 보라.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렇게 변화된 것을 보면 여기에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전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고 또 바람이 나뭇가지와 또 잎사귀를 날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부는구나 하고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성령이 하시는 일을 통하여 성령이 움직이시는구나, 성령이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이 사람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데 안디옥이라는 곳에 가서 이들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고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이 바나바라는 사람을 파송해서 안디옥의 상황을 파악하게 하는데 그가 거기에 가서 23절에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과연 무엇을 보았기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었다고 말하는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볼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의 숫자를 보고? 또 들어오는 헌금의 액수를 보고? 교회 건물의 웅장함을 보고? 그들의 믿음의 활성화됨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영어 성경으로 읽어보니까 ‘evidence of the grace of God-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보았다’고 했는데 우리의 삶을 이웃과 비교해서 얼마나 의로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비교하려고 하면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의로운지, 더 정의로운지, 더 행복한지 그것은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고 애매합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말고 시간적으로 수직적으로 비교해서 나의 예수 믿기 이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믿음이 자라기 이전의 모습,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거기에 현저한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 하나님이 나에게도 은혜를 주셨구나! 하나님이 내 삶속에도 역사하셨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유명한 찬송가를 만든 존 뉴튼의 신앙고백입니다. 그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라고 고백할 수 있었느냐? 그가 자신의 삶을 남과 비교한 게 아닙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이만큼 복을 받고, 이만큼 형통하고, 잘 되고 높아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고 한 것이 아니고 이전의 노예 상인이었을 때의 과거 모습, 사람을 팔고 사고 못된 삶을 살았을 때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존 뉴튼처럼 노예상인이 된 적은 없을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나 자신은 압니다. 내가 예수 믿기 이전에 얼마나 추하고 은밀한 죄가 있고, 교만이 있는지. 이것은 사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우리가 완벽하다든가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부족함을 느끼고 민망하고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이 있는 것, 그 자체도 큰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그런 민망함이 없었거든요.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내 인생에 대하여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민망하고 죄송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는 회개라는 것을 몰랐어요. 후회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후회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후회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후회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용서해주셨음을 믿고, 정죄감에 붙들리지 않고 평강을 회복하고, 다시 담대할 수 있고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이것은 그저 후회하면서 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마는 그 중의 하나는 내가 이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죄송한 마음, 부끄러운 마음,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변화되었다는 증거요 그것이 내가 거듭났다는 증거 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Born Again -거듭남'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 진 척 콜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변호사 출신이고 닉슨 행정부에서 보좌관을 했던 사람이었는데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 일을 통해서 척 콜슨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이 되는데 척 콜슨의 친구들이 그를 보고 한 가지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느냐면 예수 믿기 이전의 척 콜슨은 자기가 손해 입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는데 예수 믿은 다음에는 손해가 있더라도 그것을 감당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일로 화를 낸다든가 실족하지 않고 그것을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보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정말로 이 사람은 예수 믿더니 변했다고 말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받는 다는 것을 반드시 내가 잘 되고 소원을 이루고 형통하고 부자가 되고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그래야 거기에 은혜가 있고 그래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하나님을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손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내 소원을 이루어 주고 잘 되게 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된 것,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보기에는 좀 너무하지요.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그가 장차 일어날 기근을 예언할 수 있었고, 기근을 예방할 수 있었고, 애굽을 구원하고 자기 가족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꿈의 내용이 싫어서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를 애굽에 보냈는데 결국 그것이 오히려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당장은 고통스럽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과하고 나니까 마침내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나를 낮추시는데 내가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감당했더니 결국은 높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욥처럼, 다윗처럼, 나오미처럼 고통스럽게 할 때가 있지요. 오죽하면 나오미가 이름을 바꿨겠습니까? 나오미라는 이름은 즐거움이라는 뜻인데 ‘나는 즐겁지 않다 그러므로 쓰다는 뜻을 가진 ‘마라’라고 불러라.’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쓴 계곡, 쓴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는데 그러나 만약 성경이 거기서 끝났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인생의 경험이 거기서 끝난다면 누가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마라라고 불러라 그게 끝이 아니고 그 다음 장을 읽어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쓰게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과하고 견뎠더니 다시 단물이 흘러나오게 하시더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좋은 날이 오고 평안한 날이 오고 하나님이 나를 높이시고 원수 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날이 온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은혜의 증거를 보았지만 그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19절에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 환난이 있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6.25와 같은 환난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흩어졌으니까. 피난을 갔습니다. 얼마나 환난이 컸으면 고향에 살지 못하고 도망갔겠습니까? 우리는 피난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기라도 했지요. 그러나 이들은 흩어진 다음에 다시는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흩어지는 일, 환난, 여기서 무슨 은혜의 증거를 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이 흩어짐을 통해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또 안디옥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서 월남해서 남한에 교회를 세운 것처럼. 그래서 인천, 군산 등 항구도시일수록 교회가 부흥합니다. 영락교회가 그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남한의 기독교가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북한의 실향민들이 내려와서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손해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나서 복음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복음이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곳에 증거 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것은 환난이고 또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 일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은 물과 같고 또 바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람을 가둬놓을 수 없고 바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쪽에서 막으면 바람은 다른 곳으로 붑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막으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습니까. 성령을 사람이 막을 수 없고 성령을 사람이 가둬놓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사람과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고 이쪽에서 막으면 성령은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가십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니까 하나님이 다윗이라는 인물에게 기름을 부어서 다음 임금으로 삼으시고, 엘리야가 지치고 그가 그만하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엘리사라는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게 하시고, 또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서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지니까 하나님이 안디옥이라는 곳에 이방인을 위한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거부했더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물처럼 늘 흐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함께 흘러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렵습니다. 성령은 일회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회적으로 방언을 할 수도 있고, 일회적으로 뜨거워질 수도 있고,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지속적인 상태, 성령과 동행하는 상태를 일컬어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여기에 고정돼 있고 성령이 내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흐르는 곳으로 내가 따라가야 됩니다. 이것이 힘들어요. 사람은 한 가지 일에 연연하기를 좋아하고 한 사람에게 연연하기를 좋아하고 한 장소에 집착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은 한 가지 일, 그 일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자기의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한 사람이 자기 사람이 되기만을 바라는 게 인간의 속성입니다. 사람은 움직이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때로는 움직입니다, 물처럼. 그렇기 때문에 성령 충만이든 성령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우리 자신을 비울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원했지만, 나는 이곳에 남기를 원했지만, 나는 이 사람이 나와 같이 일해주기를 원했지만 이게 아닐 수도 있구나, 그것을 비우고 포기하고 이게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또 다른 좋은 것을 예비하셨겠지 하고 따라갈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순종이고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성령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것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어렵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 붙들고 있는 것, 그것을 놓는다는 것이 어렵지만 그것을 하고나면 그때부터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들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는데 본인들이 과거에 병을 앓아본 적이 있고 믿음으로 그 병을 극복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남의 병을 고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에 어떤 고난이 있었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을 주셔서 비슷한 경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게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남들에게 간증할 것이 있고, 내가 남들의 믿음을 도와줄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남들은 모르지만 내가 스스로 극복하고 뭔가를 포기하고 손해보고 내려놓고 비우고 부인하고 돌아서는 경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당시에는 어렵지만 그러나 일단 해 보면 사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은 더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마음에 번민이 더 많고 고민이 많고 평안하지 못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그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일단 버리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편하고 자신감이 생기고 그때부터 영적인 능력이 따라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내 삶에 더 쉽게, 쉽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배울 때 사장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파악해야 그 직장에서 내가 잘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방식으로 세워지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지혜를 얻어야 됩니다. 이것은 책을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직접 해 봄으로써 터득하는 것입니다. 해 봐야 됩니다. 일단 양보하는 법, 포기하는 법, 또는 손해를 감수하는 법, 그것이 당시에는 어렵지만 해보면 거기에 엄청난 감동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쁜 것입니다.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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