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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다시 광야에 들어가며 (신 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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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광야에 들어가며 (신 8:11~20)

<조선의 광야 ‘배론 성지’에 다녀오다>

      구정연휴를 맞아 잠시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제천 근교에 있는 천주교 배론 성지에 들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 근처를 숱하게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었기에 큰 맘 먹고 갔습니다.

      ‘배론’은 계곡이 하도 깊어 배 밑바닥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배론은 과연 심산유곡이었습니다. 충북과 강원도 사이에 깊숙이 박혀있는 계곡이었습니다. 여기에 박해를 피해서 수많은 신자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가 황사영입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를 피해서 서울을 탈출해 배론에 숨어들었습니다. 배론에 토굴을 만들어 숨어 있으면서 그 유명한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씁니다. 하얀 비단 위에다가 13,384글자를 빼곡히 적어 천주교 박해 사실을 낱낱이 알린 것이지요. 이내 체포된 황사영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고 일가족은 노비가 되거나 유배를 당했습니다. 황사영이 백서를 기록했다는 토굴 안을 들어가 봤습니다. 금방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배론은 또한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며 김대건과 더불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묘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정말 숙연하게 만든 것은 옹기 가마를 본 순간이었습니다. 백년 가까이 박해가 계속되자 많은 신자들이 산골짜기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었습니다. 졸지에 가족과 재산을 다 잃어버린 신자들은 산속에서 옹기 굽는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포졸들의 감시망을 따돌리는데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더욱이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걸머진 채 이집 저집 쉽게 다니면서 전도하거나 교우들의 소식을 알리는 데에도 그만이었습니다.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산골짜기 배론은 영락없는 광야였습니다. 조선의 광야였습니다. 그 옛날 언제 어떻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신앙의 지조를 지켜나간 이들이 생각나 저절로 경건해졌습니다. 거기에는 매일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유리방황했던 광야가 꼭 배론 산골짜기 같았을 것입니다. 도무지 사람이 살기에 적합지 않습니다. 배론에는 그래도 물이라고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지만 광야에는 물이 없습니다. 항상 메말라 척박하고 황량합니다. 간간이 보이는 것이라고는 키 작은 관목들만 있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낮에는 더위를 피할 만한 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밤이 되면 기온이 급강하해서 살을 에는 듯 춥습니다. 인간이 살기에 최악의 조건이 광야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자그마치 40년을 고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훈련받는 유격장이었습니다. 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요구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제(私製)물을 다 빼라는 것이지요. 사회에서 행했던 모든 사적인 행동양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변해나가는 것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이나 몸담아 살면서 안주했던 이집트식 생활양식을 다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훈련받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불신앙에 가득차 우상숭배 했던 옛 생활을 청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군사력 경제력 문화력을 자랑했던 이집트 문명에 길들여진 습성을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자기의 힘만 믿고 날뛰었던 이집트식 생활양식을 떨쳐내는 곳이었습니다. 광야에는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화려한 이집트와 달리 아무 볼거리도 없었습니다. 문화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하늘만 빠끔히 열려 오로지 하나님만 쳐다보면서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 일체를 하나님께 의존하는 장소였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기 위해 훈련받는 유격장이었습니다. 이집트식 생활양식을 청산하는 장소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절감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신앙훈련의 장소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오로지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두는 곳이 광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은 내남없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순례의 과정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고향이 광야인 것이지요!

      어느새 사순절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내일부터 3월 21일까지 매일 새벽 4시 30분에 모세의 일대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40일 새벽기도회가 꼭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40이라는 숫자는 완전숫자요 성수(聖數)요 천수(天數)인 까닭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꼬박 40일 동안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고행을 해야 합니다. 그동안 새벽기도를 하지 않은 분들은 생활습관의 일대 변화와 수정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멀리 한 시간 이상이나 차로 달려와야 할 분들은 매일 새벽 3시쯤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참 힘든 일이지요. 때로 고달프고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지요. 저의 경우만 해도 매일 한 편씩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저도 힘들고 여러분도 힘든 일을 왜 해야 할까요? 40일 새벽기도회는 다시 광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문명문화, 화려하고 찬란한 이집트식 생활양식, 즉 세속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버리고 혹독한 시련과 훈련이 기다리는 신앙학교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40일 새벽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광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믿고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생활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황폐해진 마음이 기름진 옥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난 인격이 깎여지고 다듬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이번 40일 특별 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전격적으로 성경을 바꾸려고 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개역성경과 찬송가를 버리고 개역개정판 성경과 새찬송가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지금 서울과 지방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새로 나온 성경과 찬송가를 쓰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번 40일 새벽기도회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시는 분들은 우리 교회 이름이 멋지게 새겨진 개역개정판/새찬송가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40일 광야생활을 통과하는 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잊지 마십시오!

      <광야 생활의 두 가지 선택 가능성>

      자,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신 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엄청난 풍요를 누리게 될 때 광야 생활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광야의 시련과 훈련을 절대로 잊어서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40일 동안 우리도 이와 같은 광야 체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믿고 의지했던 옛 이집트식 생활습관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길로 이끄실지 하나님의 뜻을 한 번 물어봅시다. 날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또 의지해서 우리가 누리는 일체의 소유가 다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이라는 고백을 해봅시다.

      여러분, 왜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까? 본문 15-16절을 보세요.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여기 보세요. 광야는 넓고 황량합니다.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립니다. 물도 없습니다. 사람 살기에 참으로 척박한 곳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이겨내도록 도우시고 이끌어주셨습니다. 물을 구하지 못해 목말라 할 때마다 차돌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쩔쩔 맬 때마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여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6절 말씀 후반부에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광야에 들어갈 때마다 두 가지 가능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고통만 생각하고 유혹을 받든지 아니면 그 고통 한 가운데에서도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면서 연단을 받든지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힘들고 부정적인 면만 바라보는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하여 끝없는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나 유혹하시지 않습니다. 유혹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광야는 분명히 고통스럽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광대하고 위험하고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리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입니다. 고통스러운 광야의 현실만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이집트식 생활양식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고 내 뜻과 내 고집과 내 실력만 앞세우는 인본주의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가 꼭 그랬습니다. 고통스러운 광야의 현실만 바라보게 해서 돈과 명예와 권세만 붙들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최우선해서 붙듦으로서 마귀의 유혹을 차례로 물리치셨습니다.

      광야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져주시는 섭리와 보살핌의 장소가 광야였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와 같은 광야체험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잘 되더라도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본문 17-18절을 보세요.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혹시라도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으로 모은 것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조심하라는 말씀이지요. 재산을 모으는 힘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40일 동안 우리는 광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광야 생활은 두 가지의 선택 가능성을 제시할 것입니다. 고통만 생각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적 생활양식으로 빠져들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했던 이집트 생활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고생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로 두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고 시험하시기 위한 소중한 과정으로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광야에서 ‘아빠,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며>

      어떤 분이 나이 사십이 넘어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박사과정을 다 끝내고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논문을 쓰려니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 분의 전공은 신약학이었기에 논문 주제를 정하는 일조차도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원래 짧은 분량이기 때문에 지난 5백 년 동안 웬만한 주제는 누군가 미리 연구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 분은 로마서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원했지만 지도교수님은 고린도 전서에 대해서 논문을 쓰길 원했습니다.

      점점 자신감이 줄어들었습니다. 약속한 유학 기간이 끝나면 장학금 지원도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수시로 찾아왔습니다. 더욱이 고등학교 때 검사했던 IQ가 98밖에 안 된다는 사실도 끝없는 열등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때마다 이 분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길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논문에 대해서 절망감이 밀려올 때마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캠퍼스를 배회하며 “아빠, 아버지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쉴 새 없이 하나님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만 의지했더니 논문 주제도 순식간에 통과되었을 뿐 아니라 그 어려운 신약학으로 Ph.D. 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자기가 정처 없이 광야에서 헤맬 때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셨음을 철두철미 믿었기에 논문 첫 페이지에다가 “To My God”이라고 써서 박사학위 논문을 하나님께 봉헌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사순절 새벽 기도회 시간에 이와 같이 광야 한 가운데에서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아빠, 아버지 하나님’을 여러분 모두가 다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비단 이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분들 가운데 단 한 번도 쌀이 떨어진 것을 걱정해보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져서 힘들어 할 때마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번 40일 광야 체험의 기도회를 통하여 이와 같이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다 체험할 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병고와 가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병고와 가난은 광야체험을 의미합니다. 혹독한 광야의 시련을 당할 때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지요.
      저는 여러분 모두가 내일부터 시작되는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섬세하게 베푸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다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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