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아! (마 5:1-12)

  • 잡초 잡초
  • 528
  • 0

첨부 1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아! (마 5:1-12)

I. 고난의 신앙

옛날 한 고을에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게으름뱅이가 있었습니다. 해가 밝았는데도 할 일이 없으니 안방에서 이리 딩굴 저리 딩굴 엑스레이만 찍고 살았습니다. 낮잠이 들어서 꿈을 꾸었습니다. 돼지들이 오글오글 꿀꿀거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인가? 싶어서 해몽가를 찾아갔습니다. 꿈 얘기를 들은 해몽가가 "맛있는 밥을 얻어먹을 것 같으니까 기대해도 좋겠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 기다리는데 친구가 찾아와서 걸게 한 상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똑같은 돼지꿈을 꾸었습니다. 돼지 한 마리가 꿀꿀거리고 자기를 따라 오더랍니다. 해몽가를 찾아가서 꿈 얘기를 했더니 "이번에는 옷을 얻어 입을 것 같으니 기대하시라고." 아니나 다를까? 사돈영감이 오시더니 양복점에 데리고 가서 좋은 옷을 한 벌 얻어 입었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셋째날은 꿈을 꾸지도 않았는데 돼지꿈을 하나 만들어서 해몽가를 찾아갔습니다. 이러이러한 돼지 꿈을 꾸었다고. "이번에는 크게 다칠 염려가 있으니까 조심하는게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출을 삼가고 안방에서 이리 딩굴 저리 딩굴 엑스레이를 찍고 살았습니다. 갑자기 선반위에 올려놓은 메주짝이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찢어졌습니다. 꿈을 꾸어도 안 꾸어도 신통방통하게 알아 맞춘단 말이예요. 해몽가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어떻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일과를 다 맞출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인생이 별거더냐구. 돼지가 꿀꿀거릴 때에야 배가 고파서 꿀꿀거리는 것이니 밥을 얻어 먹게 되어 있는 것이고, 배부른 놈이 꿀꿀거릴 때에야 잠자리가 불편한 것이니까 옷을 얻어 입게 마련이라고. 등 따시고 배부른 놈이 그걸 만족하지 못하고 꿀꿀거릴 때에야 매 밖에 맞을게 더 있겠냐고." 그러더랍니다.

그게 인생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군중들의 박수갈채 속에 있는 금메달 리스트처럼 영광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사람들에게 도전과 충격을 주는 말씀입니다. 핍박받는 것이 복이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 세상 어디에서나 의롭고 선하게 살면 칭찬과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잘 믿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살면 최소한의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은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말하고 그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우리의 신념과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말씀이 오늘 여덟 번째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핍박이 복이라니?
·박해와 고난이 축복이라니?
·손해보고 억울한 말을 들으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니?

그러나 분명 이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기독교만이 핍박을 받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상징인 불교 만 卍 에는 핍박이 없습니다. 끝이 꼬부라져 있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 들어가든지 다 맞추어서 굽혀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가 사방으로 반듯합니다. 위로 하나님과 반듯하고 옆으로는 이웃과 반듯한 직선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이 진리를 굽힐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핍박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 기독교는 독선적이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일찍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고통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고통과 시련을 제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처럼 다가오는 고통을 대처하며 그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고난의 종"이라고 했으며 그런점에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고난속에서 고난이 결코 저주이거나 패배의 표상이 아님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완성이 되었습니다.

II.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닌 것 & 진정한 핍박

그러나 문제는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의를 위하여"라는 단어를 달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했지 핍박이나 고난 자체가 복이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핍박이나 의미없는 고통이 축복일 수야 없는 것이지요.
핍박과 형벌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실수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을 우리는 의를 위한 핍박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상급도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라고 했고, 4장 15절에서는 살인, 도둑질, 악행 그리고 "할 일 없이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고난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 한 분은 성격이 괴팍해서 회사에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마찰이 잦습니다. 그때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저모양이라는 핀잔을 듣는 모양입니다. 언젠가 저를 만나서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이 많다고"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 "당신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이 많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당신 때문에 핍박이 많수다." 물론 속으로 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나 허물 그리고 지혜가 없고 괴팍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핍박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벌이지 핍박이 아닙니다.

둘째,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의"이지 자기 "의" 인간적 "의"가 아닙니다.

성경 본문은 "의"가 누구의 "의"인가를 설명하는 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즉 성경의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는 것이지 자기 주장이나 사상 혹은 이데올로기나 자기 의로 인해 고생해 놓고 그것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핍박인양 자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있는 핍박은 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핍박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욕을 먹고 손해를 당하며 박해와 환란을 당하는 사람처럼 큰 축복의 대열에 선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딴 사람들이며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천국에 당당한 주인으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III.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왜 핍박을 당하는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핍박을 당하는가? 말입니다.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존경을 받고 칭찬과 갈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도리어 핍박을 받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르게 사노라고 하고 신앙생활을 하노라고 하지만 우리 곁에는 좋은 이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살게 됩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칭찬받고 지지만 받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칭찬만 받고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제가 처음 담임목회로 부름받은 교회에서 위임식은 안했지만 위임투표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젊은 패기와 교만으로 당회석상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300명 공동의회 회원 중 단 1명만 반대가 나와도 나는 위임을 받지 않겠습니다." 반대표 나왔을까요 안나왔을까요? 투표 결과 3명의 기권표가 나왔습니다만 돌이켜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터무니없고 철없는 교만이었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관대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겠다는 겁니까? 이 얼마나 잘못된 교만입니까? 이 얼마나 오만불손한 태도입니까?

여러분, 나쁜 소리도 필요하고 반대도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입을 함부로 열지 마십시요. 내가 비난하기 시작하면 그만이야 내가 남을 핍박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핍박의 내용을 밝히는 10절 이하에 보면 "욕하고"하는 말이 나오고 "악한 말"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핍박은 대게 입으로 오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좋은 교인이 반드시 좋은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신앙인은 좋은 교인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좋은 교인이 되려면 첫째, 입을 조심해야 하고 둘째, 문제 처리를 잘해야 합니다.

허나 본문은 핍박하는 자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고 핍박받는 입장에다 초점을 두고 말씀을 합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핍박할 때 그 일로 인해 내가 손해를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다른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사실 미워한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원수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클린턴 대통령을 미워하고 저주한다고 우리 사이에 원수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다 보니 섭섭증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고 상처도 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대가 나를 미워한다고 내가 상대를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미워하면 손해보는 쪽은 나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찬스가 온 것입니다. 핍박받았다고 같이 대적하고 핍박하지 마십시오. 속상한 일, 억울한 말 잊어버리기를 잘하면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서운한 말 한번 들었다고 도장 새기듯이 새겨 놓고 두고 두고 생각하며 살겠습니까?

이것은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이야기이고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핍박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어둠속에 빛이 들어오고 불의가 있는 곳에 의가 들어올 때에 거기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눈 가진 원숭이가 눈 하나만 가진 원숭이들이 사는 마을에서 병신 취급을 받고 놀림을 당하다 못해 눈알 하나를 빼 버리고 말더랍니다.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때로 바보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은 고난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은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다니엘은 사자굴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죽은자에게는 핍박이 없습니다. 소가 없으니 외양간도 깨끗할 수 밖에요. 생명이 있기에 갈등이 있는 것이고, 일을 하다 보면 비난도 있을 수 있고, 의를 위해 살다보면 핍박도 올 수 있는 것이지요.

IV. 핍박이 어떻게 복이 되는가?

의인이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이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핍박이 복이 된다니 쉽게 이해가 안됩니다. 칭찬이 영광이 되고 존경이 복이 된다면 이해할 수 있으나 어찌 핍박을 받는자를 향하여 복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핍박은 참된 성도와 가짜 성도를 구별해 줍니다. 그래서 복이 됩니다.
핍박은 알곡과 가짜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핍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왓슨(Thomas Wattson)은 "가짜 성도들은 예수를 따라 감람산까지는 갈 수 있으나 갈보리까지는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핍박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거룩하게 합니다. 뜨거운 풀무에서 순금이 나오듯이 핍박속에서 순결한 믿음이 나옵니다.

서양 속담에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 버리면 시내는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셋째, 고난은 신앙인을 성숙하게 해 줍니다. 때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고난 속에 믿음이 자라고, 고난 속에 신앙이 일어나고, 고난 속에 열매가 임합니다. 뿐만 아니라 핍박 속에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핍박은 천국의 소망을 확실하게 해 줍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것을 본문은 한 마디로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핍박받는 사람에겐 항상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V. 기독교 역사는 핍박의 역사

로마의 통치에 시달리고 종교인들의 율법에 지쳐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온 그 사람들을 향하여, 정말 위로가 필요하고 달콤한 약속이 필요한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가 핍박을 받을 것이다" "나를 따르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따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입을 열어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한 처음부터 고난과 핍박과 죽음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기독교 역사는 곧 핍박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읽어보면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기까지 로마에서 열 번에 걸친 박해가 있었습니다.

제일 첫 번째 박해는 주후 67년에 네로 황제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아주 잔악무도하고 방탕했으며 괴상한 취미를 가진 황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을 죽일 때 동물 가죽을 뒤집어 씌워 죽을 때까지 굶주린 개에게 뜯어 먹히게 했는가 하면, 왁스를 바른 옷을 입혀 기둥에 묶어 놓고 불을 질러 자기의 정원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나중에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로마시에 불을 질러놓고 그것을 즐기기 위해 멕카나스 탑 위에 올라가 하프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시민들의 비난이 들리기 시작하자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띄우게 되었습니다. 네로는 몇 가지 거짓 누명과 모략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들은 식인종이라는 비난이었습니다.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은 "이것은 나의 몸이요 이 잔은 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다"고 하셨는데 이 말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아이들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둘째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방화범이라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날에 불심판이 있다고 표현했는데 이 말을 가지고 신자들을 방화범이라고 비난하고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셋째는 비도덕적이란 비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모여 아가페라고 불리우는 사랑의 식탁을 나눴습니다. 이것이 잘못 와전되어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 남녀가 함께 모여 먹고 마시며 흥청거린다는 그릇된 비방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영입니다. 언제나 거짓말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에서 "거짓으로"란 말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상의 비난은 거짓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박해의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 사상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을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로마의 지배자들은 이 기독교 집단을 로마 정권에 도전하는 가장 무서운 집단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거의 250년을 거쳐 가혹하게 불어닥쳐 왔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기독교는 로마나라에서 점점 더 흥황해 갔습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부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세계교회가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하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핍박과 피뿌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로부터 이 순교의 핍박의 역사는 시작이 됩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 예배한다." 소리치며 톱에 켜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을 맞고 쓰러진 후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습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를 부르다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백살까지 온갖 시련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있는 순교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교회 성도를 표현하는 1세기의 단어 가운데 마르투스(Mart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증인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순교자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헬라어입니다. 당시 문헌이나 성경에 이 말이 나오면 이 마르투스를 증인으로 번역해야 할지 아니면 순교자라고 번역해야 할지를 망설이게 됩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증인된 삶을 살면 순교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가 된다는 것은 곧 핍박과 박해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VI. 기뻐하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국이 우리의 것입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고 세상의 고통과 환란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의 물질이, 명예가, 쾌락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얻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신 팔복의 말씀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서로 사랑해야 할 곳에서 전쟁하며, 치료해 주어야 할 곳에서 서로 상처를 주며, 나누어 주어야 할 곳에서 훔치고 빼앗으며, 의의 자리 대신 불의의 자리에 서고, 세상으로부터 비판받기는커녕 비판하고, 핍박받기는 커녕 핍박하는 위치에 서지는 않습니까?

특별히 여기 주님의 몸된 교회 - 마태교회는 지금 그 자리에 간밤에 복음을 전하다가 자식을 잃어버린 아비와 어미가 울며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정으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있습니다. 아내를 잃어버린 사람, 남편을 잃어버린 사람이 울며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향하여 마태교회는 담대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클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네 육체에 채우노라." 이것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고난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뭔가 부족함이 있어서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에 뭔가 우리가 더해야 된다는 말일까요? No. 그런 말이 아닙니다.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님의 보혈의 피 한 방울이면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위한 남은 고난은 무슨 고난일까요?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고난이었다고 한다면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키다가 당하는 성도들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고난은 때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만큼이나 아플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고 묵묵한 인내와 헌신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눈물과 피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수는 없을지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한 두번이라도 주님과 함께 고난의 행렬에 참여하고 몸된 교회를 위해 결정적인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두번의 핍박이나 희생도 없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서야 한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삶이 되겠습니까?

어떤 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하는데 교인들의 발걸음과 얼굴의 감격이 다르더랍니다. 힘에 겹도록 헌신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물어린 감격과 자랑이 있더랍니다. 또 한편에서는 부끄러움이 있더라는 거지요. 얼마나 헌신했느냐 하는 봉헌의 량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부끄럽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저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을 때 우리 믿음의 선진들 그리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저기 북한 땅에서 온갖 핍박 중에 예수를 믿는 지하교회 성도들을 생각했습니다.

한 성도가 한 처소교회 지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공안원에 붙들려 갔습니다. 간수가 먹을 것을 주지 않더랍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도 준다매?" 조롱했습니다. 바로 그날밤부터 식사 때마다 쥐가 나타나 이 성도 주변을 맴맴 돌더랍니다. 그때부터 쥐를 잡아먹으며 긴 시간을 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공안원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 성도를 살려보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얼마나 땀을 흘려보셨습니까? 얼마나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얼마나 모욕과 능욕을 당했으며 얼마나 고난과 박해를 당해 보셨습니까? 그 분량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받게 될 상급의 분량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의외로 축복의 기회입니다.

여러분 !
세상의 의와 천국의 의가 다르니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저주가 아니고 복이라고 말씀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또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니 인내하고 참고 견디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핍박을 받을 때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기다리라고 격려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팔복의 마지막절 12절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또 다른 본질,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인상쓰고 찡그리며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승리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혀 굶고 매 맞으며 "기뻐하고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손해보면서 기뻐하고 억울해도 기뻐하고 속이 뒤집어져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두 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심판이 있고 천국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과 전도만 상급이 아니라 핍박받고 기뻐하기만 하면 상이 크다고 하시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편안해지고 좋기만 할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손해보는 것이 행복이요 고난이 기쁨이 되는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상식적인 헌신, 합리적인 희생만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감동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 고난과 순교의 감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울어야 하는데 웃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다 잃고 손해보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빼앗을 수 있는데 자기가 빼앗기고 사는 사람들, 죽일 수 있는데 자기가 죽고 사는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받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 그곳이 교회입니다.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사는 사람들아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로다 !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