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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기름을 짜는 기도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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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을 짜는 기도 (마 26:36-46)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 중턱에 있는 작은 언덕입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보입니다. 그러니까 감람산은 가운데에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성과 마주보고 있는 산입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보다 90미터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이 기도하기 위해 자주 가셨던 곳입니다. 산에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가 많아 감람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던 곳이란 뜻입니다. 수확한 올리브 열매를 이곳에서 기름으로 가공하던 곳입니다.

지금도 겟세마네 동산에 가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올리브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올리브나무의 평균 수령은 700년 정도입니다. 그런데 겟세마네에 남아 있는 나무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던 나무라고 합니다. 이천년이 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기에도 평균 수령을 훨씬 넘긴 나무처럼 보입니다. 이런 고목이 8 그루 정도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셨을 때 그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을 확인하려면 잘라봐야 됩니다.

이 올리브나무 고목 바로 옆에는 겟세마네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한 장소를 기념해서 지어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세계 16개국에서 보내온 성금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만국교회라고도 부릅니다. 교회 제단 앞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바위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가시면류관을 상징하는 낮은 울타리가 둘러있습니다. 귀퉁이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장식이 있습니다.

현장에 서보니 당시에 비장하게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만국교회 한켠에 조그만 부조가 있었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예수님의 기도 장면입니다. 이 부조를 보는 순간 정말 기름을 짜는 듯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예감하셨습니다. 죽음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이럴 때는 기도밖에는 다른 돌파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기도하기 위에 자주 가시던 감람산에 오르셨습니다.
제자들도 동행했지만 이들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의기양양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을 앉혔습니다. 당신은 저기 가서 기도하겠는데 제자들은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 중에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더 가셨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명의 제자를 더 곁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속마음을 내비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이들에게 특별히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이래보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강한 분이셨습니다. 어떤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한 번은 고향 나사렛에서 큰 봉변을 당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율법에 정통하셔서 성경을 푸는 능력이 탁월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에 나가서 이사야서를 읽고 강론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어서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엘리사 때에도 많은 문둥이 중에 나아만 장군만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강론은 소수의 사람만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강론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분이 가득했습니다. 강론하는 예수님을 깔본 것입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기이히 여겼습니다. 강론하는 내용이 듣기에 영 껄끄러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동네 밖 낭떠러지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밀어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성난 군중 가운데를 뚫고 나오셨습니다. 성경에는 단순히 그렇게 위기를 넘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어떤 힘으로 죽이려고 달려드는 군중 가운데를 뚫고 유유히 나오셨을까요? 눈빛 카리스마였겠지요. 카리스마가 넘치는 표정 하나로 그리 하셨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무술을 배우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얼음!’ 하시고 빠져나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만한 카리스마가 넘쳤습니다.

그랬던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는 너무도 연약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렸습니다. 기도 내용도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지만 예수님도 이 기도가 먹힐 것이라고 기대하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달리는 것이 인간적으로 너무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처절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진짜 피가 땀처럼 배어나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애쓰는 모습이 핏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간절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겟세마네 기도는 사력을 다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달인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큼 기도를 잘하는 분은 없습니다. 기도만 하면 척척 응답이 되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제일 잘 통하는 분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는 분이십니다. 기도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 뜻에 맞추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겟세마네의 기도는 왜 그리 힘들게 하셨을까요?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형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시려는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는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무게를 저울로 달 수 없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영적 부담을 지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총공세를 취했을 것입니다. 이에 맞서는 기도였기에 주님은 엄청나게 짓누르는 사단의 훼방을 이기기 위해 힘을 쏟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겟세마네 기도는 하나님 뜻 말고 내 뜻에 한번 맞춰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의 잔이 그냥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달라고 했습니다. 이대로 죽는 것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살려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너무도 고통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다른 방도를 찾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제자들에게 와보니 한심했습니다.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깨웠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 질문 속에 예수님의 서운함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들에게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늘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예수님이 기도를 받아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입니다. 과로하면 피곤을 느끼십니다. 끼니를 거르면 시장하십니다. 육체적은 조건뿐만 아닙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가 계십니다. 예수님의 힘든 마음을 돕는 길은 역시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주었습니다. 그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피곤함 몸을 핑계대면서 잠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베드로에게 야속하셨을 것입니다. 죽기를 장담하면서 주님을 지키겠다고 했던 베드로 아닙니까? 그 장담은 어제한 약속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기 직전에 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기도할 수 없냐고 하셨습니다. 한 시간 기도하는 것은 짧지는 않습니다. 기도 훈련이 안 된 사람은 아주 길게 느껴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긴박한 분위기를 봐서 그런 계산할 겨를이 아닙니다. 무조건 엎드려 집중 기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을 위해 간절히 합심 기도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워 놓고 다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가 돌 던질 만큼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가까운 근거리입니다. 서로 기도가 방해받지 않을 만큼 떨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가까이 있다고 느낄 만한 거리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까와 같았습니다. “이 십자가의 잔을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지나가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어야지요.” 예수님의 기도는 점점 하나님의 뜻과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번째 기도와 아까와 마찬가지로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기도하는데 헐렁합니다. 합심해서 기도하면 힘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역시 제자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가 외로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더욱 진액이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다시 깨웠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삼 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다. 기도훈련도 시키고 전도훈련도 시키셨습니다. 기도할 때 합심해서 기도하면 놀라운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 18:19-20 절에서 분명히 합심 기도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지금이 바로 합심 기도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이날을 위해 준비되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힘을 합해 십자가 지는 일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자고 함께 산에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깨어 기도해야할 제자들은 자꾸 쓰러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 예수님이 자세히 보셨습니다. 보니까 눈이 피곤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입니다. 피곤할 때는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감깁니다. 천하장사도 피곤해서 내려앉는 눈꺼풀은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운전하다가 졸리면 큰일입니다. 어제 새벽에 어느 집사님이 대구에서 올라오면서 겪은 일입니다. 새벽까지 일하고 차를 몰고 상경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졸음을 쫓으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앞서 가던 벤츠 승용차가 갑자기 중앙 분리대를 들이 받고 한 바퀴 굴렀습니다. 졸음운전을 했던 것입니다. 사고 나는 것을 보니 정신이 바짝 나더랍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럴 때는 휴게소에 들러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합니다.

눈이 풀려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니 예수님도 어쩌지 못하셨습니다. 그냥 잠자게 놔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다시 가서 세 번째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는 십자가를 지느냐 마느냐 결단하는 기도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죽음을 택하는 결단의 기도인데 아무도 돕는 사람없이 그렇게 외로운 밤을 보내셨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에는 하늘의 천사가 예수님의 기도를 도왔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철없는 제자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이때는 서운한 마음보다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그 후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서 체포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체포할 사람들을 데리고 가까이 온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는 함께 도망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잡혀 죽기 위해 당당히 맞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용기입니다.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고민하고 슬퍼했던 그 모습이 아닙니다. 죽게 되었다고 괴로워하던 모습이 아닙니다. 이제는 오히려 죽기를 각오하니 생기가 넘쳤습니다. 잠시 흔들렸던 예수님이 아닙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인성을 흔들어 십자가를 지지 않고 도망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의 기도를 통해서 그런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기도였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서운하게 한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 한심했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에 잠을 잤기 때문에, 예수님이 체포되자 제자들은 저마다 제 살 궁리를 하면서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기도를 안 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동안 기도를 많이 해두었으니 이제 쉬어도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이 평소에 기도하시던 장소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장소로 애용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기도하기 좋게 길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서 조차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졸기만 했습니다.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서 기도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배짱입니까? 기도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 직분을 받은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언제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 없어도 순발력과 평소의 재치로 넘겨도 됩니까? 기도 하나 안 하나 결과는 똑같습니까? 누가 그런 말을 속삭입니까? 사단이 떡 주무르듯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셀 수 없을 만치 가르쳤습니다. 복음서에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곳이 가득합니다. 언제나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졸려도 피곤해도 기도를 생략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도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과 재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뭘 하면 망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던 곳입니다. 여러분의 겟세마네 동산은 어디 있습니까? 겟세마네를 찾아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간절히 기도합시다. 지금 기도할 때입니다.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더냐고 묻고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기도할 줄 모릅니까? 한 시간만 엎드려 기름을 짜내듯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용을 써보십시오. 기도문이 열릴 것입니다. 기도하는 멋진인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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