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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히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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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성탄절의 상징 꽃 포인세티아
성탄 장식의 상징 꽃 포인세티아는 잎이 붉은 색입니다.  포인세티아가 성탄의 장식의 상징이 된 연유는 이렇습니다.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마음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명의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이 병을 고치는 좋은 약초가 있다. 그것을 구해오면 병을 쉽게 치료할 수 있다.” 소녀는 명의가 그려준 약초를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소녀는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절벽 낭떠러지에  명의가 말한 하얀 꽃이 피어 있는 포인세티아를 발견합니다.  소녀는 기진한 몸으로 서둘러 낭떠러지를 내려갑니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친 소녀는 그만 추락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소녀는 소리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엄마의 병을 고쳐주세요”  낭떠러지의 하얀 꽃은 떨어진 소녀의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피 묻은 약초를 건네주었고 순간 소녀의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포인세티아는 겨울에 잎이 빨갛게 물듭니다. 이 꽃이 우리 주님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흠이 없는 흰 꽃 같은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붉은 꽃이 되셨습니다.

복음의 핵심 십자가는 대속의 사랑
“내가 죄 값으로 죽어야 하는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이 기독 교리의 가장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공의
우리 하나님은 완전 정의로운 분입니다.  정의는 잘못한 것은 이에 대한 심판을 받고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가 죽음이니,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신 12:23) 『... 피는 그 생명인즉 ...』이라고 했고  (히 9:22) 『...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이라고 했습니다.  대가를 치르되 그 대가는 나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 곧 공의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대속죄일(7월 10일)에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합니다.  둘을 놓고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피를 내어 죽여 제단에 뿌려 백성의 죄를 용서 받습니다. (레 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그리고 나머지 한 염소는 아사셀 염소로 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아사셀 염소에게 안수하여 전가시키고 멀리 광야에 내어 보냅니다.
(레 16:21-22) 『[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이렇게 죄를 사함 받아 사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니 죄인인 우리들은 심판 받아 다 죽고 영원한 형벌 지옥에 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
그런데 우리 모두가 죄로 인해 다 죽어 버린다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그 사랑의 성품은 어디에 간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대가를 물게 하심으로 공의를 이루셨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하신다면 한쪽 만 이룬 불완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시죠.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 대속죄일의 두 염소를 합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을 이 땅에 계셨는데, 30년은 육신의 부모님 밑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3년을 공생애로 사셨습니다.  그러면 그 공생애의 시작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 시작 기준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때부터입니다. 
(마 3:13-15)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세례요한은 감히 어찌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양하는 세례요한에게 ‘머리에 손은 얹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레위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제물에 손을 얹어 우리들의 죄를 전가하는 것, 이것은 주님이 속죄 제물이 되는 첫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공생애는 하나님의 의를 이룬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고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제부터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생략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어린 시절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태어난 것을 전하고 건너 뛰어 곧바로 공생애- 나를 위해 죽으시는 것부터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피 제사는 매번 죄를 범할 때마다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을 지냈습니다.  피 흘림의 제사가 언제까지 유효하겠습니까?  제사 하러 가다 죽으면  죄 있는 채로 죽으니 지옥을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그래서 주님은 단 번에 영원한 속되 제물이 되셨습니다.  (히 9:12-14)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과거, 현재, 미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열려진 하나님 만나는 길
이제 대속의 십자가에서 하나님 만나는 길이 열려졌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밤하늘을 수 놓는 별똥별은 보기에 좋지만 별의 입장에서 보면 죽는 것입니다.  별들은 만드실 때, 하늘 궁창에 두셨습니다.  하늘 궁창이 별들의 자리, 있어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있어야 할 별이 지구를 향해 떨어지면 재난이 생겨집니다.  별동별은 그 재난을 막아내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대기권에서 공기와 마찰을 하면서 불타서 죽는 것입니다.  만약 미리 불타 없어져 죽지 않는다면 지구의 표면은 매 순간마다 미사일이 터지는 것처럼 될 것입니다. 
별동별이  멋있기만 하다면 ‘기차별’ ‘화살별’ ‘긴빛별’등 다른 멋있는 이름으로 지을 터인데 왜 별똥별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자기 자리를 떠난 별이 얼마나 급한지 똥을 싸며 죽습니다. 그래서 별똥별, 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이 화려해도 별동별처럼 죽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살인, 거짓말, 부정과 부패도 죄인데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생겨진 결과들입니다.  물이 새어 나오고 있는데, 계속 닦아 낸다고  물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물이 새어 나오는 곳을 찾아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닦느라고 고생만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그래서 ‘경찰서를 100개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낫다.’라고 하셨습니다. 
13억 중국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붉은 색을 좋아해서 간판은 물론이고 가로등까지도 홍등을 달아 놓아 온통 붉은 빛이 거리를 밝히고 있는데,  십자가의 붉은 빛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난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십자가를 통해서 열려진 길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요 14장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장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공의 사랑으로, 수직의 심판, 그러나 끌어 안음의 사랑으로 이 둘이 합쳐져서 십자가를 이룹니다.  하나님 만나는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자
자 이제 예수님은 그렇게 대속의 사랑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아사셀 염소가 되셔서 도성 밖으로 나가십니다. 골고다 언덕은 예루살렘 도성 밖(영문 밖)에 있습니다.  도성 밖으로 나간 것은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피를 흘려 제물로 드려진 염소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졌으며 또한 아사셀 염소는 사람들이 사는 도성 밖 광야로 무인지경(無人之境)- 아무 사람도 살지 않는 곳으로 보내어졌습니다.  이는 전가된 죄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동과 서를 남과 북이라고 하면 안될까요?  ‘남이 북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겼다’고 하면 안됩니까?  죄의 용서를 받는 성막의 문은 항상 동쪽에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죄인이 들어 옵니다.  그리고 반대편 서쪽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그 법궤 앞에서 사함을 받습니다.  동쪽과 서쪽은 멉니다.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이제 나의 죄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으니 나를 죽일 수 없다는 선포요 선언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사는 것은 이 십자가를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되려면,  하나님 떠난 원죄를 해결 받은 우리가  살면서 지은 죄, 자범죄도 이기면 살려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내가 죽고 주님이 살아야 하고요,  우리 주님이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사랑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 곁으로 날마다 새롭게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13절을  (히 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온 몸에 흙탕 질을 하고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물이 똑똑 떨어지는 채로 어떤 소년이 자기 엄마에게 자초지경을 말했습니다.  "나쁜 자식! 철식이가 내 숙제장을 찣어 버리고 내 책들을 창문으로 던져 버리고 나를 진흙탕 속으로 넣었어!"
그리고  이 소년은 목욕탕 욕조 앞에서 흙투성이의 옷을 벗으며 자기 엄마에게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또 이야기 합니다.  " 그렇지만 나도 그 자식을 그냥 두지 않았어요!"
"그래  그러면 네가 어떻게 했는데?" 하고 엄마가 물었습니다.  이 작은 소년은 욕조 안의 따뜻한 물 속으로 잠기면서 대답했습니다. 
" 그 애를 용서했어요.."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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