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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슥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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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슥 9:9)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의 여정을 기억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절기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간을 특별히 예수님을 생각하며 더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기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기간을 경건하게 보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로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 말씀으로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기,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더욱 주님의 모습 닮아가기, 등이 사순절을 뜻 있게 보내는 방법입니다. 이 사순절 여섯 주 동안에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행로를 따라가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주일로 마가복음11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님의 생애 자체가 모두 십자가를 향한 행로였지만, 본격적인 고난의 행로는 오늘 본문인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미 몇 번 설교했던 본문이지만, 오늘 다시 그 말씀의 깊은 뜻을 되새기면서 은혜 받는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모습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9:9

이 말씀은 메시야 예언의 말씀으로 유대인들은 모두 알고 있는 구절이었습니다.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을 예언한 스가랴의 말씀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자 모두 기대에 차서 흥분한 모습으로 환영하게 된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분,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이런 분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누가 메시야란 말인가! 이런 분이 메시야가 된다면, 먹을 것도, 병드는 것도, 로마의 세력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소동이 일어날 정도로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부르면서 옷을 벗어서 길에 깔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앞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찬양하며 대단한 환영을 하였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영도 잠간,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날은 바로 십자가 고난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이 몇 날이 못돼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치는 무리로 돌변하였습니다. 이들은 제 욕심과 제 감정을 따라서 예수님을 환영하다가 제 생각과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하여 금방 말을 바꾸어 십자가를 외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 제 욕심이나 제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이 소란 속에서도 아무 말씀이 없이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인류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제자들과의 대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11:2-3 

정말 감동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가 누구기에 '주가 쓰시겠다'하는 말 한마디에 '즉시 보내는'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것인가. 그가 누구기에 주님께서 그렇게 신뢰하며 믿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앞뒤의 내용으로 보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잘 알고 섬기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기꺼이 순종할 준비가 된 사람이요, 또 주님이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즉시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사람이라고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입니까?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인 모습으로 머리 숙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지요. 주님의 뜻에 가장 낮은 자세로 무릎꿇어 순종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지요. 비록 말씀을 완전히 행하지 못했다 해도 적어도 그 말씀이 진리요, 내가 따라야 할 거룩하고 흠 없는 말씀임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요. 그래야 적어도 주님 앞에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며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저의 부족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거꾸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에게 순종시키려 합니다. 하나님을 마치 알라딘의 램프처럼 문지르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며 나타나는 거인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 문제 해결의 하수인인 듯이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나의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요, 우리가 겸손히, 가장 낮은 자세로 무릎꿇어 순종해야 할 분이시지, 내 마음대로 움직일 분이 아니십니다. 

    나귀새끼의 주인은 오히려 절대적으로 주님께 순종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 성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가 쓰시겠다'하니 '즉시 보낸'것입니다. '즉시'라는 말에 한번 주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실 때, 즉시가 되지 않으면 거기 내 생각이 개입되고, 사탄이 개입되고, 계산이 개입되어서 처음과 다른 모습으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나니아 삽비라에게서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 하고 싶거든
  바로 지금 하세요.
  내일은 당신의 것 안될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지 않아요.
  사랑의 말이 지금 있다면
  바로 지금 하세요.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

  오늘 본문 속에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새끼는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구별되고 순결한 나귀였다는 뜻입니다.

    나의 첫 목회지에서 동화같은 아름다운 경험을 나는 지금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련골 깊은 골에 사는 두 노인네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 따라 교회 나오는 맘씨 좋은 분이요, 할머니는 순하게 생긴 권사님이셨습니다. 당시 전도사였던 나를 접대하신다고 한나절이 걸리는 산골로 올라오라고 하시기에 시적시적 올라갔더니 침침한 방에 커다란 화로가 놓여있고 그 화로 위에 화로만한 솥단지가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집에서 기르시던 토종 씨암닭을 잡으신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말씀합니다. '전도사님, 이거 할멈이 전도사님 준다고 나는 발쪽하나 손도 못 대게 했어' 나는 그 날 그 닭고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내려와 배탈이 났지만 그 사랑만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사를 잘 모시라는 말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는 그 두 노인네들의 아름다운 마음속에서 최응희 전도사에게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성별의 신앙을 보았습니다. 그 순진한 분들에게서 바로 그 성별하는 신앙, 하나님을 제일로 모시는 신앙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과 정성은 언제나 순결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규정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언제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는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구별시켰다는 뜻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예비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 나귀의 첫 번째 손님이셨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어떤 마음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해도, 찬송을 해도, 어떤 마음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헌금을 할 때, 구겨진 10,000원이나 새 돈 10,000원이나 물질적 가치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가치, 영적인 가치, 믿음의 가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제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생활의 첫 번째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한가하면 한번씩 기웃거리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삶의 제일 첫 번 째 손님입니다. 신앙은 우리 생활 중에 첫 번 째 해야할 제일 소중한 일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의 첫 번 째 손님이셨습니다.
늘 읽어도 마음에 감동을 주는 시 하나 있어서 읽어 드립니다.

    빌려쓰는 사람   
 
  당신을 위해선
  작은 나귀 한 마리도 기르지 못한
  목자여 가난한 자여,
  감람산 벳바게
  맞은 편 마을
  나귀를 빌려 타셨네.

  때가 가까워 제자들 함께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노라
  그리하소서 집도 없는 목자여
  물동이 이고 가는 여인의
  다락방을 빌리시고

  온 세상의 죄도 다 빌려서
  죽어 간 이여
  사흘 동안 무덤도
  빌려 쓴 이여

  너희도 빌려쓰는 자라고
  가르쳐 주신 이여
  생명을 빌려서
  그 안에 모든 물건을 다 빌려서
  아내도 자식도 지위도
  다 빌려쓰는 것인데

  우리는 오늘 무엇을
  당신께 빌려드리리까  - 임문혁-

    성도 여러분, 사순절이 시작됐습니다. 다른 어떤 때 보다 예수님 말씀 마음에 담고, 예수님 모습 닮아 사는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실 때에 '즉시 보냈'던 저 나귀새끼 주인의 믿음을 되새겨 보는 기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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