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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롬 11: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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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 (롬 11:25-32)

남보다 더 많이 갖지는 못하지만 남보다 앞서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여러분의 입술에서 남보다 늘 감사하면서 사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도님들의 배려로 성지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여행을 하다보면 의문이 생기는 것은 저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거절하고 예수를 배척합니다. 저들이 베드로를 모르고 요한을 모르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에 사는 어부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를 아는가? 요한을 아는가?” 그들의 반문은 그들이 누구인가 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벳세다 광야는 있는데, 마가 요한의 다락방은 있는데, 저들은 열두 제자를 모르고 바울을 모르는 것입니다. 요단강도 있고 갈릴리 호수도 있는데, 저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신 분들이 감격에 겨워 요단강에서 세례식을 할 때 저들에게 이상한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기대를 안고 성지를 가보지만 때로 기대했던 만큼이나 실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 가보면 성지는 성지인데 더 이상 성지가 아닌 것입니다. 거룩함의 흔적은 있지만 거룩함이 없는 것입니다. 조국 땅에 이렇게 십자가가 많이 있으매 적어도 그곳에는 더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가보지만 아닌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처음 성전에 들어 가셨을 때에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없고 장사치들만 가득했듯 오늘도 예루살렘은 복음을 이용한 장사치들만 가득할 뿐입니다. 복음의 그늘에서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복음의 흔적 앞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의문을 가져봅니다. 저들은 왜 믿지 않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눈물을 흘리게 하고 감격하게 하는 것들이 왜 저들에게는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저들 역사 속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저들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도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 속에 주목하게 될 오늘 말씀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구원계획 말입니다. 2천여 년 전에 성경이 기록될 당시 바울이 고민했던 것이 있습니다. 목사의 자식이면 마땅히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장로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할 유대인들이 바울의 동족이 일찍이 구약에서 약속하신바 되었던 메시야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고 영원하리라고 하셨던 성전은? 저들은 포로로 끌려가면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복음을 계속 외면하는 가운데 바울은 궁금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기도하다가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울은 비밀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라고 합니다. 이 비밀에 대하여 너희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밀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신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이 아닙니다. 너하고 나하고만 알자 하는, 누가 알까봐 숨겨져야 하는 비밀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할 수 있거든, 비밀은 비밀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비밀은 공개적으로 알려져 있는 진리입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비밀이기는 한데 비밀이 아닙니다. 또 비밀이 아닌 것 같은데 비밀입니다.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른다, 나는 보이는데 너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 앞에서 우리는 감격하는데 저들은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볼 뿐입니다. 사실은 예수, 아무나 믿을 수 없고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식으로 사람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있는 대로 복음은 믿음은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 앞에서 감격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남보다 깨끗했던 것도 아니고 남보다 지혜로운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그 예수가 내 가슴속에서 그냥 믿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 모시고 목욕탕을 간적이 있습니다. 힘없는 아버님 깨끗하게 씻겨드리고 아버님 여기 잠깐만 누워 계세요 저 탕 안에 좀 들어갔다 올께요. 탕 안에 아무도 없어 눈을 감고 성경암송을 했습니다. 참 좋더라구요. 아버님 모시고 와서 그런지 마음이 더 좋았습니다. 눈을 감고 성경암송을 하는 중에 탕 안에 아무도 없었는데 누군가 풍덩풍덩 들어왔습니다. 그냥 눈을 떠 볼까 하다가 그냥 다 한참 암송을 다하고 눈을 떴더니 세상에 저위 절에서 스님 여덟 분이 단합대회 하러 왔더라구요. 탕 안에 저와 스님 여덟 분이 있는 거예요 우스울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스님들을 보면서 제 마음에 밀려오는 감격은 내가 어쩌다 예수를 알았지? 나도 저 스님들처럼 길 아닌 길이 길 인줄 알고 걸어갈 수 있었는데, 나도 저 스님들처럼 진리 아닌 진리를 진리인 것처럼 알고 그리 따라갈 수 있었는데, 내가 저 스님들보다 잘 생긴 것도 잘난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닌데 내가 어쩌다 예수를 알았는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 가까이 있다고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오셨는데 왜 이스라엘은 믿지 않고 전혀 상관이 없던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는 믿어진다는 것인가?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비밀이라 표현함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야 말로 너무도 위대하고 놀라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감격하게 했고 너희도 알아야한다 외쳤던 복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복음 중에 복음인 이 비밀은 바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으로 받아 한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함께 구원받아 함께 천국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장벽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그 선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원래 그러했습니다. 혹시 마태복음12장 46절 부터에 있는 말씀과 마가복음 3장 31절부터 나오는 말씀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중에 예수의 모친과 예수의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말을 전합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 쉬시지요 모친과 동생들이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인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모친이라”하십니다.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님에게는 가족이나 국가 고향 이 울타리가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메시야의 복음은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는 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오셨지만 그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역사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계실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떤 벽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사마리아에도 갑니다. 세리를 만나줍니다. 간음한 여인을 품어줍니다. 저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은 아니야, 저 사람은 저주 받았어 하는 데도 예수님에게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복음은 유대인만의 육적 선민사상을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복음 앞에는 남녀노소, 종과 주인, 죄인, 의인, 복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저들을 찾아갑니다. 흑인이냐 백인이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인가 원수인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해주는가 아니면 나에게 핍박하는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일 뿐입니다. 적어도 복음은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적어도 복음은 우리가 먼저, 내가 먼저, 끼리끼리 좋아하는 이런 이기적 울타리에 갇혀 있으면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 앞에 기독교가 손가락질 당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기들만의 하나님, 자기들만의 예수, 이기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이런 속담 안에 갇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슈퍼가 하나 있습니다. 그 슈퍼를 하는 집사님이 우리교회 집사님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아집에 사로잡혀 있느냐 하면 우리 믿는 집사님 그래도 우리 믿는 집사님 걸 팔아줘야지 하고 온 교구 식구들이 가서 믿는 집사님 것을 팔아줍니다. 이때 옆에 슈퍼에서 너네들끼리 잘해봐라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만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복음을 가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기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식당하면서 장로님이, 권사님이 우리 집에 오지 않고 저 집 식당에 갔다하면 시험 드는 것입니다. 맛없는 그 집에 계속 가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맛이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복음은 우리 집 말고 그 집에 가주세요 이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무도 아멘 안하잖아요 식당 안하는 저분만 아멘하지! 바울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실은 내 민족도 전도하지 못했는데... 만약에 바울에게 내 민족이 먼저였다면 복음이 복음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처음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사역을 감당하면서 동족 이스라엘은 거룩한 부담이었습니다.

말씀을 드린 대로 9장 3절에 있는 대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내 가족이 믿을 수만 있다면 저들이 예수를 영접할 수만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도 관계없다고 말할 정도로 갈망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 믿지 않는 형제, 믿지 않는 조국, 부담 아니겠습니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배척하는 동족은 바울의 거룩한 부담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동족에게로 달려가고 싶은데 성령께서는 자신의 걸음을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설날에 집에 있었습니다. 손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설날에 저희 가족이 우리 집에 모였는데 4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우리가 9남매 아닙니까. 학생도 오고 청년도 오고 그리고 설날이 지난 다음날에는 장로님 내외분들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녁까지 집사님들이 오셨다 가셨습니다. 어제 마지막으로 청년들 48명이 밤 9시에 밀려와서 밥 안먹었답니다. 밤9시에 떡국 끓이고 밥해 피자 5판 통닭6마리 과일 있는 대로, 청년들 왔다 간 뒤에 우리 집은 완전히 메뚜기 떼 지나간 것처럼 남은 것이 없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내 곁에 이렇게 사람이 있어주는 것이 고맙고 와주는 것이 고맙고 그냥 감사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집에 왔다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분들이 왔다 가는 중에 가장 제 마음을 무겁게 하는 한 사람은 제 동생이었습니다. 그 동생만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 증인입니다. 안아주었지만, 그의 손을 잡아 주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집에 처음으로 찾아온 그 동생, 그가 믿지 않는 것은 저에게 아픔이요 고통이요 부담이었습니다. 제가 목사인데 말입니다. 가끔은 이런 설교 들어보셨습니까? 남편을 전도하지 못하는 아내들을 향하여 목사님들이 “도대체 남편을 어떻게 꼬시지 못해서 그 남편 하나 못데리고 나오냐”고, 그놈이 꼬셔서 될 놈입니까? 그리해서 될 것 같으면 간이라도 꺼내주지요. 복음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람하나 전도 못하느냐고 어쩌면 저도 그렇게 설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동생이 그걸 못하게 했습니다. 목회를 절제하고 내 동생에게 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갈등을 해본적도 있습니다. 바울에게 부담이 어떤 것입니까? 언젠가 동생으로 인하여 마음이 많이 아파하는 저에게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눈을 활짝 열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 기도 할 때에 그 120명의 무리 중에 이름을 강조한 사람들 중에 예수의 형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님 돌아가실 때까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복된 자리에 그 예수의 형제들이 와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가슴에 안고 주님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하셨지요. 저를 믿게 하신 하나님 제 사랑하는 동생도 언젠가 가장 복된 자리에 있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저는 완전히 자유 했습니다. 기도는 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자유 했다 합니다. 그렇게 유대인으로 인하여 눌려있던 그가 완전히 자유 한 것입니다. 복음 앞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복음은 진정한 복음은 절대로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내 주머니, 내 가정, 내 민족, 내 자식, 내 교회 이런 이기적 울타리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예수를 믿으면서 가정이나 자식이나 국가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누가 내 형제요 모친이뇨 하셨지만 십자가 앞에서 마지막 부담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반드시 가정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어른을 귀하게 여기고 그리고 효자 효녀가 되며 무엇보다도 역사 속에서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국가관이 있어 애국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청년들에게 세미나를 하면서 그대의 가슴속에 예수만 품지 말고 국가를 품으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조국을 품으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울타리를 뛰어 넘는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달은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이방인이 예수를 믿듯이 언제인가 유대인도 복음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것임에 이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며 이것이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이라 말했던 비밀이라 하였던 구원스케줄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이스라엘 동족으로 인한 거룩한 부담에서 자유 할 수 있었던 복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완악하다? 여기서 말하는 완악은 살인사건, 남의 것을 욕심내는 것, 이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음입니다. 믿음이 있냐 없냐, 믿냐 믿지 않느냐 이것이 내 선택인 것 같아도 나중에 은혜 받고 회개할 때 보면 제일먼저 하는 회개가 믿음 없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믿어지는 믿음이야 말로 은혜요 축복인 것 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완악은 무엇입니까?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요 이기와 율법의 이름으로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유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완악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완악은 대다수의 완악이라 할지라도 부분적 완악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거절당한것 같지만 이스라엘 전체에게 거절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복음 안에서, 믿음 안에서 복음이 복음 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완악은 시한부적 완악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믿지 않아 그 완악이 최종적인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때가 있어 그들이 반드시 복음 안으로 돌아오는 위대한 역사가 있을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아멘하며 넘어갑시다. 여러분 주변에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들의 믿지 않음은 절대로 지금의 결정이 영원한 결정이 아니라 시한부 적이라 그들이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그러한 것처럼 저들도 복음 안에 들어올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완악은 언제까지인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하고 이스라엘이 완악해져 있는 동안에 복음의 물결이 이방인들에게 흘러갔고 이방인들이 점진적으로 믿음 안에서 복음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바울의 바람이요 바울의 확신입니다. 막연한 바람이 아닙니다. 막연한 확신이 아닙니다. 약속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가슴에 안습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시지 않았는가, 메시야가 저들의 죄를 없이 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거절하매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유대인들도 복음 안으로 돌아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입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복음 안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선택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에 많은 별들이 있고 은하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한곳으로 모아졌습니다. 그곳이 지구입니다. 이 지구에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나라 중에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많은 나라 중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도 유대인들의 착각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셨다 하여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복음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인가? 모든 나라들 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더 많이 사랑하시는가?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사람의 사랑과 다릅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기에 누구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고갈되는 그 정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풍성합니다. 우리아내는 막내아들하고 큰 아들하고 편견이 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큰 아들을 위해서 먹을 걸 준비하는 걸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늘 알아서 먹습니다. 언제나 막내아들을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 준비합니다. 아내가 나쁜 것인가?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착해지고 싶지만 착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66권을 우리에게 완성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섭리하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 정도 작은 나라로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다면 역사 속에 그렇게 많은 나라에게 침략을 당하며 시달림을 당하는 나라로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심에, 섭리하심에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무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경 기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철저하게 섭리하셨지만 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역사 속에 1600년에 걸쳐서 완성되었습니다. 설화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설화였다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역사를 배경으로 실제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부터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까지 40여명의 저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형하고 동생이 세대차이가 있습니다.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있다합니다. 놀랍죠? 이 성경이 만약에 사람이 썼던 책이라면 5번만 읽으면 읽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세익스피어가 쓴 원작도 2번 읽으면 더 읽지 않습니다.

성경은 50번을 읽어도 100번을 읽어도 천 번을 읽어도 늘 새롭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16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는데 성경의 내용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알려주시고 출애굽기 40년 광야 여정을 통해 저들은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성경의 기록이 끝났습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대사를 아십니까?

AD70년에 로마 티투스 대장에 의해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 남김 없이 완전히 황폐화 됩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유대인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데 왜 멸망할까?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필요 없는가? 그렇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위해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AD70년에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는데 놀랍게도 AD70년 이전에 성경의 기록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나라가 지구촌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 기록이 끝이 났으니 이스라엘이 필요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의 시간표입니다. 아시죠. AD70년에 사라졌던 그 나라가 1948년에 독립이 됩니다.

성경에 예언을 아십니까.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나고 싹이 나면 때가 온줄 알라. 바로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질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성경을 기록된 말씀으로 주신 하나님이 이제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오늘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적용시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인가? 농부가 논에 벼농사를 짓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농사는 지어 보셨습니까? 저는 감사한 것 중에 하나가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 왔는데 그전에 농사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논에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 제일먼저 농부가 하는 일은 못자리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농부는 이 못자리에 최선을 다하여 정성을 쏟습니다. 논을 갈아엎고 그리고 벼 씨를 뿌리고 피를 뽑아주고 다듬어 주고 거름을 줍니다. 이 못자리에 온갖 정성을 쏟지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농부가 못자리에 정성을 쏟는다 해서 못자리만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의 머릿속에는 농부의 계획 속에는 못자리에 관심을 쏟지만 언젠가 온 논에 모를 심기 위하여 그리고 모가 다 자라면 사정없이 모를 뽑아 온 논에 모를 흩어 심게 됩니다. 그리고 추수 때를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복음의 못자리를 이스라엘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수천 년의 역사 속에 개입하셨고 간섭하셨습니다. 섭리하셨고 운행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어야 했다면 이스라엘에게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하나님이었다면 이스라엘을 저렇게 작은 나라로 그냥 두겠습니까. 그런데 그 흥망성쇠를 통해 성경을 기록합니다. 못자리를 다독이듯이. 그리고 못자리가 다 성장하듯 성경이 기록되매 다 흩어버립니다. 그리고 복음이 흩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전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추수 때를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루어 가심에는 실패가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완벽하게 그 구원계획을 펼쳐 가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믿지 않는다하여 바울이 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저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사람에게는 실패였다 하여도 절대로 하나님에게는 아닙니다. 우리교회가 지난 19년 정도를 달려왔습니다. 우리교회가 험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에 때로는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 안산에 목사님들이 안산에 성도들이 저 교회는 끝났어, 저 교회는 없어질 거야 생각을 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면 아멘 합시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저와 여러분을 믿게 하신 하나님에게는 후회가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저와 여러분을 믿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대인의 구원문제로 애타하던 바울이 자유함을 얻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제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음으로 너희가 긍휼을 입었느니라. 이 말은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는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배척함에 너희가 복음을 영접한자가 되었구나. 이제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지만 너희에게 베푸시던 긍휼로 인하여 이 복음의 물결이 이스라엘에 흘러올 것이다.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 말은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영접시키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상태에 머물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가슴속에 긍휼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긍휼이 있고 이것이 원칙입니다. 대통령을 보아도 긍휼이 있습니다. 불쌍한 것입니다. 지도자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른 노릇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순종이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긍휼의 베푸심의 원리입니다.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바울은 이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 하면서 경고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지 말라. 이 비밀을 스스로 깨달은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으로 들어갔음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합니까? 너 모르는 복음을 나만이 가졌으니 하고 영적 교만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멸시하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성지순례 가보십시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습니다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디를 가도 고추장은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거 아주 중요합니다. 고추장... 이스라엘에 가면 식당에서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추장을 그릇에 떠놓고 먹으면 유대인들은 우리 보는데서 그릇을 버립니다. 이방인의 음식이 묻었다고 말입니다. 상처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 모르는 복음을 나 알았으니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멸시하고, 이런 천박한 모습으로서 그리스도인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쩌다 예수를 믿었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나를 믿게 한 하나님이 누구라도 믿게 하지 않겠습니까. 자격으로 말하자면 제가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제가 남보다 깨끗해서 목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재미있는 표현으로는 제가 우리 아내를 무서워해요. 무서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무섭기도 하지만 진짜는 우리 아내가 제 비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의로워 지려고 하고 남보다 깨끗해지려고 남 앞에서 아무리 해도 우리 아내는 저를 알아요. 그래서 만약에 제 비리를 에이포 용지에다 기록해서 우리교회에 돌리면 나는 내일 쫓겨납니다. 그래서 우리 아내는 시험 들면 안됩니다. 우리 아내한테 정성을 다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위로 보면 사실은 나보다 여러분 옆에 사람이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어쩌다 예수를 알았지? 내가 어쩌다 예수를 믿었지? 그래서 이렇게 신음소리를 내뱉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넘어 온 인류를 계획하듯, 진정한 복음은 내 울타리를 넘어 또 다른 나를 향해야 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 이 말은 너는 복 받고 너 혼자 잘 살아라 이 말이 아니라 너로 인하여 또 다른 사람이 복을 받게 하라 너로 인하여 또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하라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제 짐을 벗습니다. 유대인의 구원,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맺게 될 열매인 것입니다. 대신 내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전도하면 유대인들에게 때가 되면 구원 있으리라 이것이 바울이 더 열심 내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밀을 알았습니다. 복음 안에서 장벽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이기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지 말고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뛰어넘어 또 다른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옆에 사람이 한 해 동안 많이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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