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광야의 은혜 (마 4:1-11)

  • 잡초 잡초
  • 423
  • 0

첨부 1


광야의 은혜 (마 4:1-11)

1.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많은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계획한대로 일이 잘 되고, 승진하고, 사업이 번창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그러나, 춥고 배고픈 시절도 지나고 보니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있게 하시는 하나님, 부족한 가운데서도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서게 하신 하나님, 욥처럼 다 빼앗겼지만 더 좋은 것으로 갑절로 채워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부유하거든지 궁핍하든지, 건강하든지 몸이 병약하든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모든 환경, 처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의 누리는 평안과 안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광야의 시련도 있습니다.
모세는 40년간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로서 모든 좋은 것을 다 누려보았지만, 그가 궁궐에서 배운 지식과 교양, 그리고 무술만으로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궁궐에서 도망쳐 나와 허허벌판 광야에서 40년간 신앙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의 인생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때,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훈련받은 모세의 지도력에 힘입어 40년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복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쳐간 광야, 그곳은 매일 하늘로서 내리는 은혜를 공급받는 은혜의 장소였습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고 먹을 양식, 마실 물 한 방울 구하기 힘든 메마른 광야, 시뻘건 모래 언덕밖에 볼 것이 없는 척박한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라는 먹을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나오게 해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셨고 길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광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광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광야, 이곳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자리였습니다.

광야, 사막, 그곳은 객관적으로 궁핍의 자리, 실패의 자리, 고통의 자리, 눈물의 자리, 탄식의 자리입니다. 그러하기에 그곳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자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2. 성령께서 우리를 광야로 이끄신다

  객관적으로 몹시 고통스러운 광야, 가고 싶지 아니하는 광야, 척박한 광야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광야로 이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1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광야의 은혜가 예수님께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절을 잘 읽어보시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목적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광야는 마귀의 시험을 받는 곳입니다. 마귀와 싸우는 곳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세 가지 입니다. 물질욕, 인정받고 싶은 욕구, 지배욕입니다.
40일간 금식하여 몹시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고 마귀는 시험하였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여 그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의 중심 번화가에 있습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데 천사들이 예수님을 받드는 모습을 지나가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얼마나 대단한 광경입니까? 졸지에 예수님은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않겠습니까? 마귀는 우리 안에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세 번째,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질적인 욕망인 지배욕을 시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시에 물질욕, 인정받고 싶은 욕구, 지배욕, 이 세 가지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도 모르게 거기에 물들여져있고 빠져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 세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세속화라고 합니다.
돈 버는 것, 인정받는 것, 남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것, 이것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절대로 우리에게 안 좋은 것으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시험합니다.
문제는 돈 버는 것, 인정받는 것, 남을 다스리는 것, 이 세 가지를 최고의 가치, 최고의 목표와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돈 없어도 모든 사람은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정받지 못해도, 남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지 못해도 그는 하나님을 닮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돈, 명예, 권력, 이것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수단입니다.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돈 버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면 타락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진다면, 기꺼이 그것들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돈버는 것, 인정받는 것, 남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것, 이 세 가지에 대한 강박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세 가지를 달성하기 위해서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는 와중에 자신의 삶이 점점 무너져가는 것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좀 더 많이 일하고, 좀 더 많이 벌고, 좀 더 많이 친구를 사귀고, 좀 더, 좀 더.....
이러다가 건강을 잃기도 하고, 가족관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신앙의 열심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영성가 토머스 머튼은 이런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난파선”에 비유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면 결국은 그 인생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돈, 인정받는 것, 지배욕에 심각한 강박증을 갖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거기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에 나오면, 당장 함께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습니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으니 쓸 일이 없습니다. 참석할 모임도 없습니다. 즐길 음악도 없습니다. 고급 레스토랑도 없습니다. 돈 쓸 일이 없습니다. 자신을 인정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부릴 부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귀가 유혹합니다.
“돈으로 힘 좀 쓸 데로 가라. 너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는 시내로 가라. 너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너를 찾고 있으니 거기 가라.”
이런 마귀와의 고투가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여기에서 몹시 힘들어하면서, 서서히 자신이 물질욕, 인정받고 싶은 욕구, 지배욕에 물들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다. 내 껍데기이다.’
껍데기에 희로애락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광야의 은혜입니다.

이제 자신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나니,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상처입기 쉬운 나 자신, 약하고 죄많고 부서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단계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아무 것도 없는 메마른 광야, 거기에 홀로 계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10절)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만져주심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광야의 은혜입니다.


3. 살기 위해서는 광야로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려면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물욕, 명예욕, 권력욕에서 벗어나려면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의 교부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자가 성 안토니입니다.
안토니는 지금부터 약 1700여년 전, 주후 251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18세 때, 교회에서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는 말씀을 듣고, 사막으로 들어가서 20년 동안 사막에서 오로지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사막에서 돌아오니, 사람들이 그에게 치유와 위로와 지도를 받으려고 벌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균형잡힌 사람, 온화하며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빛났습니다. 그의 존재 전체가 감동이요 은혜요 감격이었습니다. 그는 옛 자아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어 작은 예수가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하지 않아도 내가 거기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은혜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토니처럼 사막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작은 광야를 만들면 됩니다.
온갖 분노와 탐욕에 물들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광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치유받고 회복될 수 있는 광야,
물질욕과 인정받고픈 욕구와 지배욕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는 새 사람으로 빚어지는 광야, 그 광야를 우리 직장에서 가정에서 만들어봅시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매일 한 시간씩 조용히 하나님을 만나는 광야의 시간을 가집시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을 볼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기도의 시간, 광야의 시간이 우리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로 작은 예수로 살아가게 할 능력을 공급해줄 것입니다.


4. 광야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전부이심을 고백하는 은혜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의 자리, 슬퍼 눈물 흘리는 탄식의 자리, 실패의 자리, 그 자리가 여러분의 광야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 곁에 계셔서 여러분을 도우시는 하나님, 주님을 뵙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재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