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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십자가 위의 말씀(1) : 용서 (눅 23: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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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말씀(1) : 용서 (눅 23:26-38)

  지금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각 당의 대통령후보를 뽑는 경선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이 공화당을 앞서는 가운데 민주당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힐러리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 부부대통령의 기록을 만들고, 오바마 상원의원이 대통령이 되면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는 기록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전국적인 지지도의 선두자리를 지켜오던 힐러리와 경선을 치르고 있는 오바마는 오프라 윈프리, 조지 소로스, 워렌 버핏, 케네디 의원 등 각계각층의 화려한 명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후보경선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1961년 8월 4일 하와이에서 태어난 46세의 ‘검은 케네디’라 불립니다. 아버지는 케냐출신 흑인 유학생으로 인종차별폐지론자로서 하와이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캔자스 출신의 백인 중산층인 여성을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하바드대학으로 옮겨가 박사학위를 받고 케냐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재혼을 하였으므로 그는 6~10살까지는 인도네시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와이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10대 때에는 술, 코카인, 마리화나에 손대어 어두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하바드 로스쿨에서 공부하여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학 로스쿨 강사로 일하다가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을 지나, 민주당 전당대회 후에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민주당대통령후보경선에 나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의 삶에는 남다른 상처가 많았습니다. 가정을 버리고 가버린 아버지 때문에 거의 부모 없이 자랐고, 혼혈아로서 미국사회에서 차별 받는 흑인이었으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방황했던 어두운 십대를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신앙으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하고, 극심한 인종차별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였으며, 정체성의 혼란으로 방황했던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고,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여 모든 미국국민의 희망으로 우뚝 섰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삶을 만듭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한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최악의 죄인으로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살인강도 바라바보다 더 흉악한 죄인으로 정죄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는 당대에 가장 흉악한 범죄자 두 사람이 예수의 좌우에 함께 십자가처형을 받고 있었습니다. 뭇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비난과 저주 속에 고난을 받던 그 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땅은 모든 빛을 잃고 한 밤처럼 캄캄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 이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온 세상, 온 인류에게 찬란한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는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곱 마디말씀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상 칠언”이라 하여 소중한 말씀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송에 부탁하나이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첫 번째 말씀 누가복음23:34을 생각합니다.
“아버지, 저희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짤막한 한 마디의 기도가 희망이 없던 죄인들에게 의인이 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자기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해 주시기를 비는 이 기도로 분노와 증오, 복수와 보복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역사를 관용과 이해, 용서와 사랑으로 가는 물꼬를 열었습니다.
세상은‘용서’하는 사랑으로 새롭게 됩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뀝니다. 절망 속에 희망의 길이 열립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용서는 과거 어둠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밝고 자유로운 희망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그렇다면 이런 용서하는 힘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용서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또 용서하기를 원하지만 나를 억울하게 하고 아픈 상처를 준 그 사람, 그 일을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흉악한 죄인으로 정죄하고, 최악의 처형을 자행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예수님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에서 용서와 사랑의 원천을 발견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입니다. 최악의 모욕이요, 최악의 비극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자신을 최악의 흉악한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고, 온갖 모욕과 저주를 퍼붓고 있는 마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아들로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2월 대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후보들 간의 선거운동을 하는 방법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한쪽은 끝까지 소위 ‘내거티브’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상대후보에 대한 온갖 모욕과 비방을 계속 쏟아내었습니다. 상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금방 뒤집힐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후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나입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나입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고통의 순간이 계속되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하는 일들이 사람들에게 인정과 지지를 받고 있을 때에나, 지금 극심한 비난과 정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악한 여론이 내 신분을 바꾸어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본질은 결코 변질될 수 없습니다.

  한 때 정치계에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유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여론으로 사람을 잡는 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마녀사냥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존재의 본질은 결코 변질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는 듯합니다. 한 방송사에서 대형교회 몇 몇을 난도질하면서,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부정하고 파렴치한 것처럼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난을 계속함으로, 교회들로 하여금 대형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켜 부흥과 성장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마치 죄 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묘종의 음모가 진행이 되고 있는듯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할 일입니다. 이러한 일로 한국교회는 깨어 긴장하여 기도하므로 보다 성숙한 교회로 매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역사를 보면 교회를 정죄하고, 박해하는 속에서 교회는 더욱 강해졌고,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왔습니다.

근래의 중국의 기독교역사를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가 완성되고 1960년 문화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구시대의 모든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가치관들을 파타하자고 하는 이 문화혁명 때에 모든 외국기독교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교회의 문을 다 닫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기독교는 사실상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다음 1982년 9월 1일 등소평이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면서 중국의 기독교에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22년 동안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였던 기독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그 전 140여 년 동안 일구지 못했던 선교의 열매가 22년 동안 3배 이상 많은 기독교인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오늘의 중국의 기독교는 세계판도를 바꾸어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박해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외부의 힘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힘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라고 부르는 이 한 마디에 자신을 향해 모욕하고 정죄하며 말할 수 없는 고난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2.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이 나쁜 모든 짓이 다 무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 무지함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비웃고 정죄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납할 수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상대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를 그로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무엇이라 말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보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를 그로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 인류의 구세주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의 죽음이 인류의 죄악을 대속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 후에 일어날 부활의 역사를 알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이단아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박해하였습니다. 핍박자, 박해자, 포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디모데전서1:13)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이만한 사랑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폭이 어라나 큰가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는 그를 불쌍히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 사람을 바꿉니다. 세상을 바꿉니다. 사랑이 미움을 이깁니다. 빛이 어둠을 이깁니다. 희망이 절망을 이깁니다. 용서가 증오를 이깁니다. 사랑의 크기만큼  세상은 그만큼 밝아집니다.
마실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고 먹을 음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 세상이 기근과 기갈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설날 아침 서울역지하도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4시간을 있는 동안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참 추웠고, 힘들었는데 그 곳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잠바를 나누어 주면서,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희망의 물꼬를 열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이들이 합숙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면 교육하고 훈련하고 양육하여 세상에 건강한 사람들로 세울 수 있는 힘이 한국교회에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돈의 힘으로 세상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3.용서를 받아본 사람이 용서합니다.

이 사랑의 용서는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 때부터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 사랑의 크고 넓은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께 굴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다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로 3년 동안 동고동락을 하면서도 그 사랑을 다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살아나시기까지도 그 사랑을 다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예수님이 참 메시아임을 알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하고 나서야 제자다운 구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고서도 집사가 되고 나서도, 심지어 장로가 되고난 다음에도 제자들처럼 어리석게 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사가 되고나서도, 철이 들지 않아 정직하게 기도생활하지 못하고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주님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하는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용서와 사랑은 한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케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그 값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오직 하나, 예수께서 행하신 그 위대한 희생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 분의 완전한 용서를 감사함으로 충성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용서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은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는 의무입니다.
마태복음5:48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에베소서4:32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3:13입니다. 
“누가 뉘게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 용서하신 죄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깨끗이 잊어주십니다.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약점으로 잡아서 그것을 공격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잘못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너 전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그 습관을 못 버리고 그런다”고 불평하며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께서 하신 것처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적인 방법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겹겹이 기억하였다가 다 집어 씌워 올가미로 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잊어버리십니다. 우리의 죄용서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한 죄는 다시 되새기지 않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형들과 요셉의 사람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열일곱살 때 형들의 미움으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22년이 지난 다음 형들은 애굽에 곡식을 구하기 위하여 갔다가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알아보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형들은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그 때 요셉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창세기45:5,8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급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말씀 속에 요셉은 이미 그 형들을 다 용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애굽에 팔아서 종이 되게 한 일,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한 형들,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말로 누명을 씌워 감옥생활한 3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음을 알고 난 요셉은 그 모든 삶들에 대한 원한도 보복심리도 없었습니다.
용서는 받은 은혜만큼 용서하게 됩니다.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숙한 어른이 되면 됩니다.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납하면 사람도 세상도 변화됩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은혜가 오늘 여러분들 속에 성령으로 임하시기를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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