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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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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시 1:1-6)

아시다시피 올해 우리 교회의 기도제목은 ‘여유’입니다. 개인의 여유는 물론, 가정의 여유, 직장과 사업의 여유, 교회의 여유, 이민생활과 유학 생활에서 여유를 갖기 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거하는 모든 삶의 장소에서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 물질의 여유, 환경의 여유를 갖추며 살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삶의 여유를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여유’를 달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해주십니다. 즉 ‘이렇게 이렇게 하면 여유롭고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완전계시인 말씀을 통하여 주십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1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풍요롭고 여유로운 축복을 얻게 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은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풍요롭고 여유로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사람 잘 사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깡패와 어울리면 깡패가 되기 쉽고, 노름꾼과 어울리면 노름꾼이 되기 쉽고, 사기꾼과 어울리면 사기꾼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세상 부모님들도 자기의 자녀가 좋은 친구를 사귀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자기 자녀가 좋은 영향을 받고 좋은 자녀로서 복되게 살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복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을 잘 사귀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사귀어야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오늘의 본문은 악인, 죄인, 오만한 자를 멀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능동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선인, 의인,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의인이고 누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보기에는 나름대로 어떤 사람이 착하고 의롭고 겸손해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하는 격언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산에 올라가 살아야 착하고 의롭고 겸손한 삶을 사는 복 있는 사람일까요?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악인, 죄인, 오만한 사람 속에서 살기는 살아도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본 받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악인의 꾀를 좇지 말고, 죄인의 길에 서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 NIV에 보면 악인의 꾀를 'the counsel of the wicked'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악인의 충고, 악인의 카운슬링을 따르지 않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져서 자기의 욕심을 채울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딤후4:3-4) 즉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상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세상적인 사상, 세상적인 잔꾀에 물들어서 복 없는 길로 간다고 예언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말씀을 잘 안듣고 엉뚱한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니는 시절에 이런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 중에 공부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고 노는 데에만 상당한 은사가 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더불어 지긋지긋한 학교도 며칠간 안가고 열심히 놀다 보니 처음에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돈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배가 고프자 이제 각자 집에 들어가자고 친구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학교에 안가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집에 들어갈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그 친구의 가정은 부모가 그를 따뜻이 맞이할 가정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 친구는 가정에 들어가도 부모님이 차려주는 따뜻한 밥 한 끼가 나오지 않는 결손가정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친구는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찌 하든지 밖에서 놀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계속 집에 들어가자고 하니까 저의 모습을 보면서 말합니다. “자식! 겁은 많아가지고!”

그리고 더 나아가 저를 겁쟁이로 몰고 의리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아- 난감합니다. 가족을 택하자니 친구가 울고, 친구를 택하자니 가족이 웁니다. 그리고 버스의 라디오에서는 당시 이런 충고의 광고가 매일 나왔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내일을 위한 휴식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제가 당시 이런 충고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저는 친구의 잔꾀를 듣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요즘 한국의 우리 자녀들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보다 약한 학생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도둑질과 같은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러한 방법도 아주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용감하게 저질렀습니다. 물론 친구라고 하는 내 앞에서 자신이 깡다구가 있다고 폼을 재려는 영웅심리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 친구도 지금 저처럼 목사가 되었습니다.”라고 여러분에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 친구는 지금 전과 15범의 유명한 깡패 두목이 되어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람마다 자기가 인생을 사는 방법론이 있습니다. 그 인생의 잘못된 방법론을 택하고 좇아가면 재미가 없습니다. 나중에 복이 달아나고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경고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4-6)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복 없는 사람, 망할 사람, 심판 당할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하말티아)란 ‘과녁에서 빗나간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목표로 하지 않고 다른 것을 목표로 사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요? 불교에서는 탐욕이라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불효를 가장 큰 죄로 생각합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큰 죄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헬라 철학에서는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죄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바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사는 것은 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 이곳 캐나다까지 와서 사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아니면 나의 욕심입니까?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서 빗나가는 삶을 살면 나중에 복이 달아납니다. 반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풍요롭고 여유로운 복이 임합니다. 아무쪼록 바쁜 이민 유학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오만한 자’란 ‘조롱하고 비웃는 자’를 의미합니다. 부모를 조롱하고, 스승을 조롱하며, 권세자와 지도자를 조롱하고, 주의 종을 조롱하고 성도 간에 조롱하고 욕하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남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 습관화 될 때가 있습니다. 아주 경계해야할 모습입니다.

특히 한국 분들 중에는 대통령을 너무 쉽게 조롱하고 욕을 하는 것을 보면 제가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이 자기 마음에 안 맞는 정책을 펴기도 하고, 실수를 하여 나라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대통령을 조롱하는 것보다 대통령을 위하여 더욱 기도를 해주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지도자들을 도와주어야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비난하고 조롱하는 자와 같이 자리를 하고 또 자신도 그러한 죄를 지으면 복이 달아나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멀리해야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한 가지를 더 제시합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 1장 3절에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에너지가 나오고 그 에너지로 살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육체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는 기본원리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에너지의 공급이 없는 무한 동력은 없다."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의 공급이 있어야 움직이고 일을 할 수 있다는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 말씀을 잘 먹어야 에너지가 나오고 살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양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립니다. 불량 음식을 먹거나 암을 발생시키는 음식을 먹으면 건강을 잃습니다. 독약 먹으면 즉시 죽습니다. 즉 잘못된 이단 사상 먹으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먹으면 하나님의 사상이 안들어가게 되고 결국 그의 영혼은 죽고 맙니다. 복이 없어집니다.

고로 우리는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훈련된 귀,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갑갑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일부러 ‘노멘’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속박'을 느낍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여러분, 기차는 철로 위에 있을 때 자유가 있고, 비행기는 항로를 따를 때 안전하듯이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아멘'하며 살려고 할 때 가장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를 속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는 불편해 보여도 나중에 보면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미국 샬럿이라 곳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한 학생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주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명문대에 합격했으니 기념으로 자동차를 한 대 사주세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흔쾌히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졸업식장에 나타난 아버지는 자동차 열쇠 대신에 포장된 성경을 가지고 와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들아, 이 성경을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꼭 이 성경을 보기를 바란다.”

약속을 어긴 아버지의 행동에 아들은 너무 실망하여 아버지와 의절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성경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안에는 자동차를 사고도 남을 만큼의 큰 액수의 수표와 함께 이렇게 쓰인 아버지의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아들아, 그러니까 꼭 성경을 보라고 했지 않느냐? 성경 안에는 모든 축복이 들어 있느니라.”

그 후에 아들은 성경을 가까이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안에는 모든 보화와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언제나 승리를 거두며 축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말씀합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

결론입니다. 아무쪼록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는 중에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이 외국 땅에서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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