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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와 이성 (고전 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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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성 (고전 2:12~14)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2-14

저는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성도님이 섬기는 한 회사의 신우회에 초대를 받아갔습니다. 교회나 교단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서 말씀과 찬송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기업이 참 복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우회가 끝나자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목사님, 참 감동적이고 의미가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저는 모든 종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합니다. 삶에 교훈과 지침을 주고 나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기독교 신자인데 다른 종교 모임에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참 속이 좁은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스님, 신부님의 설교나 강문, 법문을 들으면 결국 ‘착하게 살자’ ‘거짓말 하지 말자’ ‘진실 되게 살자’ ‘이 땅에서 인간답게 살자’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면 어떻고, 불교인이면 어떻고, 이슬람교인이면 어떻습니까?” 이러면서 자기는 마음이 아주 넓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유명 사찰 앞에 대형 현수막이 걸립니다. “축! 아기 예수 탄생” 4월 초파일이면 성당에도 걸립니다. “축! 석가모니 탄생” 믿지 않는 사람은 가톨릭과 불교가 남의 종교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진 것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4월 초파일에 현수막이 걸린 교회를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 믿는 우리를 “속이 좁고 편협한 밴댕이”라고 합니다. 남의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성격의 기독교는 잘못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는 설이 있습니다. 명절에 친지들이 모이면 꼭 교회비판이 낍니다. 한국의 교회가 어려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고 여러분 나름대로 방어하려고 애를 쓰실 것입니다. 그런 때에 우리가 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 도덕과 윤리의 고급한 정신활동으로 봅니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충효는 다 가치 있고 귀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착하게 살자’는 종교로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보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동일한 종교가 아니라 “생명”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생명인 영적활동과 인간의 정신활동을 분별할 단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 신앙, 믿음이라는 말로 섞여있기 때문에 영의 생명을 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3-7절에 보면 니고데모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인,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유대의 선생으로서”라고 하신 것을 보면 굉장한 학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나라, 영적인 진리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아무리 세상 학문과 철학과 사상에 능통할지라도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靈)은 어떤 개념입니까? 여러분은 영과 정신활동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의 장면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육이 있고,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breath of life)를 불어 넣으시자 생령(living being)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몸은 영과 육으로 구별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이 과실을 따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아담은 곧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장 3절 이하를 보면 아담이 가인과 아벨, 셋을 낳고 또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수많은 아들들을 낳고 장장 930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영이 죽었다는 것은 육신의 호흡이 끊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전에 하나님과 아담은 아주 친한 관계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산을 거닐면서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는 하나님이 무섭고 두려워서 도망가 숨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습니다.

아담의 허리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감각이 단절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다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전의 인격과 인생의 목표와 지혜와 생각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모습 그대로 있되 하나님에 대한 감각만 새롭게 탄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감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정신활동은 영의 기능이 아닌 육의 기능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930년을 사는 동안 생각하고 판단하고 여러 일들 계획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영장류도 정신활동을 합니다. 동물 중에 아이큐가 가장 높은 것이 돌고래와 범고래이고 그 다음이 침팬지, 오랑우탄입니다. 5살 어린이 수준의 지식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서로 경쟁을 하고 질투를 하고, 먹이를 먹을 때는 도구를 사용하며 색깔도 구분하는 등 정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정신활동이라는 사상과 이념들은 영의 기능이 아니라 정신의 기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으며 정신활동, 즉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판단과 추적, 이해의 수단으로 삼게 됩니다. 문제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교만해져서 영적인 진리의 문제까지 간섭하는 것입니다. 요즘 EBS에서는 도올 김용옥이라는,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요한복음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듣는 것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 교회 교인들이 보고 헷갈려서 저에게 묻습니다. “뭐가 맞습니까?” 도올이 아무리 명석하고 세상 학력이 높고 학식이 많고 저보다 머리가 몇 배나 윤기가 나도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은 정신활동, 합리적 사고와 이성으로 절대 진리와 절대 하나님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것이 철학입니다. 철(哲)자는 밝을 철자입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의 역사를 관통해서 불변의 진리를 찾아보자는 것인데,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학자가 왜 찾지 못했는지를 고민하다가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는 만약 절대자가 있고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3차원 세계도 아니고 4차원 세계를 초월해 존재할 것이라 가정하고, 인간의 이성은 4차원에 있는 절대자를 보거나 음성을 듣거나 판단하고 감각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이로써 철학은 무너지고 이제는 분야별로 법철학, 생활철학 등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절대 진리가 무너지자 혼란이 왔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놓쳤는데 보다 나은 것을 추적 해보자고 상대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보다 나은 선,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인간, 이런 것을 찾으려 애 쓰는 가운데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이 나왔습니다.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보다 좋은 사회, 보다 행복한 삶, 보다 인간적인 삶이 무엇이냐고 10명에게 물었더니 10개의 답이 나왔습니다. 100명에게 물었더니 100개가 나왔습니다. 왜요?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보다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성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 굴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까지도 싫어합니다.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네가 너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왕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누가 이기나 봤더니 결국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더라는 만고의 진리가 거기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나 중심’의 흐름은 실존주의 철학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실존주의는 내가 느껴야만 진리입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 철학과 친구들 중에 참 이상한 친구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삼복더위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너희들은 덥다고 느끼지만 나는 춥다고 느끼기 때문에 입고 다니는 거야.” 한 겨울에는 반팔 옷을 입고 다닙니다. “너희들은 추울지 모르지만 나는 더워.”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느껴야 됩니다. 인간이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고 모든 질서의 최종 권위자가 되는 그 자리에 앉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이성입니다.

그들은 이런 사상으로 성경을 추적합니다. 처녀 10명을 선발해서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 사람이 있는지 1년 동안 테스트를 합니다.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은 있을 수 없다. 빼자!”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병원의 영안실에서 죽은 사람을 놓고 3, 4일 후에 부활하는 시신이 있는지 열심히 관찰합니다. 없습니다. “이 관찰로 보아 예수님의 부활은 뻥이다. 지우자!” 인간의 이성으로 어긋난 모든 것은 지워집니다. 그렇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그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 이런 멋있는 말씀은 다 살립니다. 성경 말씀 중에 본인이 믿을 수 없는 것은 다 잘라버리고, 인간의 이성으로만 영적인 것을 판단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인간이 범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 제도가 될 수 없으며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이다. 21세기 종교는 이해 할 수 없는 신앙을 더 이상 강요해서는 안 된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작년 12월 11일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있었던 ‘한국 교회와 성서’라는 토론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그는 왜 이해할 수 없을까요? 영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학을 공부했고 불경에 대해서도 박식합니다. 그가 이 세상의 지식과 이성, 합리적 사고로 성경에 손을 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을 강요하는 기독교는 더 이상 21세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틀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절대 진리를 놓친 이성이 추구하는 종교는 도덕과 윤리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 착하게 살자는 건데 어떤 종교면 어떠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자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근간이요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나도 그의 영혼에 예수의 생명이 없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의 영혼은 죽은 자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시며 또 무엇을 가증하게 여기시며,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명령하시는지를 알아서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고통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멘’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나에게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은 착하게 살아야 하고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을 용서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시고 요구하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부모를 공경합니까? 유교적으로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적질이나 살인을 하면 무거운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그 이전에 먼저 적용되는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 명령에 불복종한 죄’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시면 하지 않고, 하라시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래 참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는 것이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한 주간 설 명절에 많은 일가 친척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대화 속에 예수와 교회와 목사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은 그들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싸우지 말고 논쟁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14)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진리들을 더 깊이 알고 깨달으라고 우리에게 지혜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믿고 보고 소망하는 것들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영적으로나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맞서서 설명하고 논쟁하더라도 결국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과 덕이 없고 오히려 상처만 됩니다. 성경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와 죽은 자가 이 진리를 가지고 싸우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장 20-24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변론을 피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친지들이 기독교에 대해, 우리가 믿는 천국 소망에 대해 비판하더라도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부딪히거나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영이 죽어 있는 세상 사람들은 종교의 근원을 도덕과 윤리로 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덕과 윤리적 차원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와 부패의 세력이 득세하는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처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 외에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더 많이 참으세요. 더 많이 일을 하세요. 더 많이 양보하세요. 더 많이 견디세요.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님의 그 겸손함으로,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그 방법 외에는 우리의 참된 신앙과 영생의 은혜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번 한 주간 불신자 가족과 만났을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착한 행실로 이 세상 앞에 드러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3-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종의 직책이 자신의 잘못된 행실로 훼방 받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무엇에도 거리끼지 않게”했다고 합니다. 환란과 핍박, 매 맞음, 갇힘,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견디는 것은 그가 전하는 예수의 생명의 말씀이 훼방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가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은 그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이 세상 밖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답답하고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당할 때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는지를 살펴서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이 있습니다. 그 남편들이 믿게 된 후에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내에게 교회 가지 말고 주일에 골프 치러 가자고 했다고 저더러 ‘당신은 마귀야!’라고 했어요.” 설령 마귀 짓을 했다고 해도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됩니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딛2:4)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젊은 여자들에게 “근신”(self-control)하고 “집안일을 하며”(be busy at home)라고 했습니다. 교회 일을 하니 남들보다 배나 바쁩니다. 여러분이 교회 일을 하고 은혜 받으러 기도원에 가기 위해서 “여보, 일주일치 라면 사 놓고 곰국도 끓여 놨으니 차려 먹어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남편이 교회를 욕하고 목사를 욕한다 할지라도 “마귀!”라고 하지 마시고, “나는 그래도 당신만을 사랑해요~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뿐이야~” 이렇게 은혜를 끼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훼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과 정신활동으로 기독교를 재고 비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더 거룩하고 더 겸손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고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속이 상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몸을 처 복종시키노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고백이 이 한 주간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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