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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마 6: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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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님의 뜻을 (마 6:24-34) 

  저는 새해가 되면서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금년 한해를 어떻게 살며 어떤 뜻을 가지고 살까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금년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고 일하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년에 나 스스로가 다짐하고 각오하고 서원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그렇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은혜를 입고 복을 받고 살아가는 비결이고 방법이고 길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성경의 기준의 말씀은 오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먼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모든 것”은 영혼의 만족함을 말하고 영혼의 평안함을 말할 것입니다. 영혼의 만족함과 평안함을 얻는 삶이 가장 소중한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필요가 되는 모든 것들도 포함해서 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처럼 매사를 풍성하게 주시는 마음으로 다가오십니다.

초대교회 시대 교부였던 오리겐(Origen)은 이 구절을 풀이하기를 이 말씀은 “너희는 먼저 하늘의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시겠다.”라는 뜻이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면 세상적인 필요도 덤으로 채워주시겠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최선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의 내용은 이와 같은 삶일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우선의 삶을 사랑가시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의 내용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이 일은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주일날이면 아무리 바쁘고 분주해도 만사를 제쳐두고 우선해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삶, 그것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 삶의 모습에서 향기가 나오고 멋이 나오고 삶의 중심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곧 돈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돈을 내라면 내겠는데 꼬박 주일마다 나오라고 하지는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성행하는 실용주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쉽다면 성경에서 굳이 하라고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성경은 더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고 복을 받고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방법이 삶의 가장 지혜로운 길이고 방법이고 원리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959. 9. 27.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수상 흐루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련수상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다음날은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숙소에 있는 흐루시초프에게 “오늘이 주일인데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흐루시초프는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가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면 한 시간 반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 위치에서 한주일쯤 주일 예배를 빠지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예배에 충실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와서 흐루시초프에게 물었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그랬더니 소련수상이 대답합니다. “먼 길을 찾아왔는데 손님을 놓아두고 교회에 가야만 하는 당신의 핑계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방인 무신론자 소련수상 흐루시초프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일날이면 예배드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명히 교회에 갈 텐데 과연 그는 무슨 핑계를 대며 교회에 갈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례인줄은 알지만 그를 이해해 주었고 양해해 주었고 실례를 인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자신 있는 모습입니까.

그렇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니까 이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개인에게도 복을 주시지만 그 나라에도 복을 주시고 그 민족에게도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의 것을 우선하고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니까 오리겐이 말한 대로 이 세상적인 것들도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그것이 신앙인이 살아갈 자세이고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영적인 건강한 삶도 주시지만 이 세상적인 것들도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두 번째로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고 은혜가 주어지고 응답이 주어지고 감동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르셔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삶의 현장에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양을 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형들은 집에서 안락하게 지냈지만 그는 자신이 사육하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짐승 떼와 싸웠고 밤새워 지켰습니다. 얼마나 충실한 모습입니까. 엘리사는 소 12마리를 부리며 열심히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심부름 하며 잃은 소를 열심히 찾고 돌아다닐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열심히 포도타작을 위해서 땀 흘리며 일할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형제도 모두 열심히 고기잡이에 몰두할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일행이 밤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허기지고 목마르고 피곤하고 지쳐있었겠습니까. 그런 때는 만사가 귀찮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철수하기 위해서 지금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그때 그곳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다시 한 번 던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의 심정은 이제는 고기가 잡힌다 해도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 말을 듣고 그물을 들고 다시 바다로 나아가 그물을 던졌습니다. 얼마나 우직하고 순수한 사람입니까.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그때 베드로를 시험하려 하신 것일 것입니다. 시험해 보았더니 베드로에게는 남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침내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는 기적을 연출하지 않았습니까. 기적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현장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근대역사에서 대표적인 지성인을 꼽으라면 백락준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락준이 어느 선교사 집에서 일을 합니다. 어느 날 선교사로부터 “나무를 패라“는 부탁을 받고 열심히 장작을 팼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장작을 패고 있었습니다. 밖에 나갔다 뒤늦게 돌아온 선교사가 “이 어두운 밤에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나무를 패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아니 이렇게 늦게까지 나무를 패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자 “나무를 패라는 말씀만 들었지 그만 두라는 말씀은 듣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직합니까. 그 모습에서 잔꾀 같은 그림자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선교사가 그 젊은이의 말 한마디를 듣고 그 젊은이를 신뢰하게 됩니다. 그 모습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미국에 보내 공부를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백락준이 오늘 한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직함은 전수됩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 백사겸은 평안도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에 서양에서 온 선교사가 와서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동네에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마침내 교회를 짓다가 돈이 없으니까 도중에 중단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에 안쓰러움이 있어 자기의 전답 천 평을 팔아 건축하라고 바쳤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우직합니까. 그 모습을 보고 이 선교사가 너무 미안하게 생각되어 그를 교회의 사찰로 일을 시키고 월급을 줍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나무를 패라니까 그 아들은 밤새도록 나무를 팬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받아 그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 것인데 그가 커서 돌아와 연세대 총장을 역임했고 문교장관을 지내게 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감동시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면 하늘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입니다. 그 삶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 이 세상을 치유하고 이 세상을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주어진 터전에서 이렇게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그러면 은혜의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정신을 구현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정신을 구현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세상에 표현하고 심고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삶에서 한층 더 높은 이상과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직업을 가지고 살 때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직업 이상의 뜻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하면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보다 한층 더 높은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 아이들에게서 미래에 무엇인가를 이루어주려는 의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가르치고 있는 여러 명의 아이들 중에 이 다음에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질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비전이고 꿈이고 이상입니다. 그래서 교사의 직업은 직업 그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대통령 시절에 어느 분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전도를 받은 박대통령은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도 어려서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그때 교회 선생님들이 나를 잘 돌보아 주었더라면 나도 지금쯤 좋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꼬리를 흐리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할 말이 가득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대통령 시절에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의 자리에 있는 분이 그렇게 볼품이 없었는데 가난하고 헐벗을 때 그의 모습은 더 보잘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학교 교사들이 어린 박정희를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새까맣게 생겼으니까 우습게 그냥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이 어쩌면 그 어린 마음에도 한으로 남았을는지 모릅니다.

강아지도 주인이 사랑해주는 것을 알고 미워하는 것을 아는데 어린 박정희라고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니까 후에 그런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교사가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초라하고 어린 그를 돌보고 가르쳤더라면 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겠습니까. 지금도 이 땅의 많은 학교에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사들이 그런 우를 쉽게 생각 없이 범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인격이 망가지고 굴절되는 아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방법은 모두 힘에 의존합니다. 이 세상은 힘이 세면 어느 정도 통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삶의 목적이 힘 있고 잘 나가는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힘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힘으로 다 정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힘으로 다 되었다면 히틀러, 나폴레옹, 무솔리니, 일본의 천황, 김일성이 이 세상을 다 정복했어야 합니다.

가진 것으로 다 되었다면 이 땅의 재벌들이 이 세상을 다 정복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은 힘으로 재물로 일등으로 다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문제를 풀고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정신을 세상에 구현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일터에서, 소속된 삶터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인은 그 자리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과 능력을 발휘할 곳입니다. 자리에 너무 연연하면 그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오히려 더 아부하고 더 적당히, 앞장서서 충성맹세도 하고 한술 더 뜨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이 세상을 정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국회 내에 그리스도인 의원들이 반수가 넘는다는데 전혀 역할이 없습니다. 말해야할 때 침묵하고 소신을 발휘해야 할 때 주어진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조용히 침묵하고 앉아있고 침묵해야할 때 더 충성하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까 이 세상이 도무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뿐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의 빛이 바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인들, 국회의원들이 싸잡아 욕을 먹지 않습니까. 구실 못하면 욕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밟히는 것입니다. 버려진 소금입니다. 그러니까 밟히는 것입니다. 욕을 먹습니다. 무슨 욕을 먹는지 아십니까.

한강에 국회의원하고 수녀가고 함께 빠졌습니다. 119 긴급 구조대가 출동을 하더니 한강에 뛰어 들어가 국회의원만 끄집어 내 왔습니다. 그래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왜 국회의원만 사람이냐, 수녀는 왜 버리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구조대원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국회의원을 그냥 한강에 놔두면 한강 물이 오염될까 봐 건져내왔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힘으로 개혁으로 혁명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으면 히틀러가. 나폴레옹이, 무솔리니가, 일본 천황이, 김일성이 이미 다 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변화는 힘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섬김과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으로 비로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신으로 투자하고 투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교조는 생명을 내걸고 저렇게 치우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팔짱만 끼고 삶의 현장에서 소극적으로 아무 정신을 발휘하지 못하고 살아가니 언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 이루겠습니까.

주님은 “너희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했습니다.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서 소극적으로 그냥 녹지 않고 있으면 그게 무슨 소금입니까.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면 섬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소금이 녹는 것입니다. 녹을 뿐 아니고 모습조차 소멸시켜 버리니까 소금이 들어간 곳에 맛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의 값이고 존재이유이고 모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는 이 한해를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동안에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금년에는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중심 있게 살아보려고 다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삶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의 근원이고 길이고 진리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나와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 모두 이 말씀이 삶의 근본이 되어 금년 한해를 그 어느 해 보다도 힘 있고 능력 있게 은혜를 입으면서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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