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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왕상 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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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왕상 19:1~18)

대중식당에 가서 자리를 하면 종종 술을 어떤 술로 하겠느냐는 종업원의 말에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 술(행 2:13)이라고 합니다. 새 술이라고 정확하게 알아들은 종업원은 당황하지만 잘못 들은 종업원은 최근 나온 술을 거침없이 가져오는 헤프닝도 있습니다.
북송사대가(北宋四大家)의 한사람으로 불리던 송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미쳤다고 술잔을 말리느냐"할 정도로 술꾼들을 부추겼습니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 (李商隱)은 "애끓어 마시는데 술 값 몇 천 냥쯤이야 "하고 노래했습니다. 송강 정철의 권주가(勸酒哥)에서도 "꽃 꺾어 술잔 수 세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라고 술을 예찬했습니다. 그의 저서 '관동별곡'에서도 "북두셩 기우려 창해슈 부어내여 저먹고 날머겨날 서너잔 기후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 술(성령)에 취(醉)하는 사람들이지 독주(毒酒)에 취(醉)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독주에 취한 사람은 술에 이끌리어 이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새 술(성령)에 취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됩니다. 인간들은 두 종류의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에 미쳐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미쳐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세상에 미쳐 있는 자들은 독주에 취하고 하나님께 미쳐 있는 자들은 새 술(성령)에 취한 자들입니다. 새 술에 취한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여기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하나님에 대하여 취한 자입니다. 취하지 않거나 미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교회 운동도 하나님에 대하여 미친 자들이 하는 운동입니다.

거짓 종교와 기독교가 맹렬히 대결했던 현장은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교주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아합의 처 이세벨과의 싸움은 구약 역사상에 매우 돋보이고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앞세운 거짓 종교가들의 흉계는 엘리야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보기 좋게 쳐부수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른바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환희의 시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살기가 등등한 이세벨의 무서운 통첩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통첩의 내용은 내일 이맘때면 엘리야는 생명을 빼앗겠다는 것이었습니다(19:2).
엘리야는 광야로 피신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면서 자신을 탄식했습니다. 낙심에 차 있는 엘리야는 천사가 가져다 준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먹은 후에 다시 천사의 위로를 받아 일어났습니다(19:5-7). 그리고 40주 40야를 행하여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에서 개혁(reform)이란 단어는 종교개혁과 함께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은 기독교 역사상에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단어의 표현은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시대부터 우리에게 보편적인 이미지로 친숙해졌습니다. 개혁의 속성이 본래대로 환원이라는 소박하고도 진솔한 명제인 것을 감안할 때 개혁은 새것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복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이란 말은 낭만적일 수 없습니다. 개혁은 소극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시킵니다. 개혁은 장엄한 것입니다. 개혁운동은 거친 사자의 이빨 같은 것이지만 때로는 돋는 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개혁 운동은 성과 교량 같은 것입니다. 개혁운동은 창과 방패와 같은 것입니다. 개혁운동은 용서와 징계가 같이 일하는 운동입니다.

Ⅰ. 개혁운동을 명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19장 1절에『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엄청난 갈멜산 상의 승리의 사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 잘못된 사상과의 분리입니다.
열왕기상 18장 17-18절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임한 심각한 가뭄은 아합이 볼 때는 엘리야의 저주 이후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17:1). 그러나 사실 이러한 가뭄은 아합 왕조에 의해 임한 재앙이라고 엘리야는 아합을 질타했습니다. 여기 당신의 아비집이라고 할 때는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 왕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므리(Omri B.C 885-874)왕조 이후에 우상숭배가 한층 더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습니다(16:25-26). 하나님이 명하시는 개혁운동은 바알 우상주의와 갈라지는 운동입니다. 위선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형식주의(formalism)와 결별입니다.

2) 타락한 문화와의 분리입니다.
열왕기상 18장 15-18절에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했습니다.
아합 왕조의 문화입니다. 바알 우상주의에 기초한 문화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발달하고 활성화 될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입니다.

3) 예외가 없는 단호한 분리입니다.
본문 18장 40절에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5-7절에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에게 있어서 분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장차 닥쳐올 위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엘리야의 개혁운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Ⅱ. 환란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19장 3-4절에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델리취는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라는 말이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그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려고 고요히 후퇴함이라"고 했습니다. 니케아 회의의 영웅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일당에 의해 쫓겨야만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1521년 4월 17일 브룸스 국회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내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습니다. 루터가 황제 앞에 서자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액크(Eck)라는 자가 루터의 소환이유를 설명하고 책상에 놓인 25권의 책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루터는 액크의 말을 한마디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쫓기는 루터는 삭소니 선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산성에 은신하면서 성경을 번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칼빈은 그의 친구 니콜라스콥의 파리대학장 취임 연설에서 그가 초안한 복음주의 색채가 짙은 연설문을 낭독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칼빈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진리가 비 진리에 의해 쫓기고 참이 거짓에 의해서 수난을 당하고 빛이 어두움에 의해 고난의 쓴잔을 마셔야 되는 것은 역사상에 자주 나타나는 드물지 않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신앙 조부들은 바로 살려다가 환난을 당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아니 아예 죽어 주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로마서 5장 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7장 14절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극한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Ⅲ. 사명 수행을 위해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19장 7-9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갈멜산의 영웅 엘리야가 쫓겨 다니고 피할 수만은 없습니다. 일어나서 그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종교 개혁의 의의를 교리적인 면에 치중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본래를 향하여 일어나는 영적인 부흥운동이어야 합니다.

1) 무엇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까?
본문 19장 5-7절에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가져온 천사는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떡과 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찬 계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엘리야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에게 오히려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의 상징물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상징은 성찬입니다. 성찬의 의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운동입니다. 교회운동은 주일 성수에서, 전도하는데서, 기도하는데서 거룩한 열매를 봅니다.

본문 19장 12절에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13절에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세미한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세미한 소리는 살아 계신 주님의 소리입니다. 세미한 소리는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소리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미한 음성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미한 음성(성경)으로 일어나고 그 말씀으로 고침 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2) 왜 일어나야 합니까?
(1) 기름 붓는 사명입니다.
엘리야는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할 일은 또 남아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받은 사명을 절대로 소홀하게 취급하지 아니합니다.
그 사명은 본문 19장 15-16절에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사명은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사명입니다. 오늘에 있어서 기름 붓는 사명은 주님의 이름으로 택한 백성들에게 인을 치는 사명입니다. 이것은 교회운동의 근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교회로 불러 왕 같은 제사장의 은총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2) 제자 양성의 사명 때문입니다.
본문 19장 16절에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 신학교의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였습니다. 이것은 진리 운동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가도 엘리야에게 맡겨진 일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보다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열왕기하 2장 9절에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이적보다 숫자적으로 갑절의 이적을 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17절에 보면 상속자에게는 갑절의 재산을 주는 것이 그 시대의 상속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은 상속자 곧 후계자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엘리야에게 주신 사명인데 그 일을 엘리사가 합니다.
우리는 앞서간 선지와 사도들과 이천년 기독교사에 찬연히 빛나는 영웅적인 신앙 조부들의 갑절의 영감을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 운동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병행하여 장차 우리 스스로가 좋은 신앙의 선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당부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땅에 전개 될 복음사역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팔레스틴에서 세계적이요, 시간적으로는 33년이 아니라 우리 평생의 시간입니다. 종족적으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족속입니다.

갈보리교회는 개혁주의 교회입니다. 비 진리와는 타협이나 양보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짓밟고 암울하게 했던 로마 카톨릭과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카톨릭을 기독교의 큰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회개하고 진리 지식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프랑스는 드골이 집권하자 당시 괴뢰정권 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패탱 원수를 사형에 구형했다가 무기징역으로 무인도에 유배시켰습니다.
청나라 때에 일본군에 부역했던 자들을 중국이 들어서면서 모두 숙청시켰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모택동이나 장개석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마지막 황제 부의'라는 영화가 바로 이러한 역사를 다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좀 다른 양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움직임이 해방직후부터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되면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친일파 인사들과 함께 반공운동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친일파 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와 인맥을 무시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ㆍ25가 발발했습니다. 6·25는 우리가 아는 대로 조국산하를 폐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또 다시 조국산하의 복구를 위해서 친일파 인사들을 재 등용시켜야만 했습니다. 계속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이른바 새마을 운동에 친일파를 제외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민족양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러한 과정에 친일파 인사들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계, 언론계 등 사회전반에 걸쳐 여전히 주도권을 잡고 거침없이 성장했습니다.

광복회는 2002년 2월 28일을 기하여 친일파 인사 708명을 공개한 이후로 역풍을 맞아 2차 조사 작업을 포기했습니다. 광복회는 5,300여명의 애국 후손들의 복지와 애국지사 발굴 작업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극동 아시아에서 우리나라만이 친일파의 힘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친일파를 운운하는 것이 웃기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일파를 처단하려면 해방 후 민족적 양심에 비추어 그들의 입지가 약해져 있을 때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받은 자들이 기존의 세력보다 왕성할 때 교회는 고스란히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왕성하면 안 됩니다. 성경관, 구원관, 종말관, 기독관, 교회관이 잘못된 자들이 교회에서 왕성하면 교회는 치명적입니다.
마치 몸속에 있는 암 종양이 적을 때 발견해서 떼어내면 치료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암 종양이 커지면 몸이 암 종양을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죽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최근에 메스컴을 타고 한국교회를 향한 자성의 소리는 들어야할 소리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하지 못하니 당돌하게도 세상이 교회의 개혁과 자성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딱한 지적도 없지 아니합니다. 목사는 납세와 국방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선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운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노인들이나 노숙자들에게 몇 끼의 밥을 나누어 주는 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들만을 존경하고 훌륭하다고 하는 사회운동, 구제운동,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선지와 사도의 터를 중시하고 이어지는 개혁주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신봉하고 신행일치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 중심ㆍ성경 중심ㆍ교회 중심을 우리의 생활 원리로 삼는 교회입니다. 개혁주의 교회운동은 새 술에 취한 자들만이 하는 운동입니다. 우리 모두 엘리야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다짐합시다. 우리와 오고 오는 우리 자손들이 섬길 이 교회를 세속에 물들지 못하도록 개혁에 개혁을 더하기로 굳게 맹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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