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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갈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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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갈 2:20~21)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의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에릭 해리스(Eric Harris)와 딜런 클리볼드(Dylan Klebold)라는 학생이 15명의 교직원과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마다 머리에 총구를 대고 "하나님을 믿느냐"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살기 위하여 "믿지 않는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캐시 버넬(Cassie Bernall)입니다. 총구 앞에서 그녀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너희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된다". 그러자 그들은 "네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라" 며 그녀에게 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캐시 버넬의 뒤를 따르자" 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 역시 인터뷰를 통해 딸의 죽음은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말해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가장 슬픈 고통은 함께 하던 사람을 먼저 보낼 때입니다. 함께 있고 싶은 대상을 먼저 보내게 될 때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욕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길 원하십니까? 성경은 그 누구도,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분을 소개합니다. 그는 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대로 함께 하시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있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죄의 모양은 있어도 극복하려고 애쓰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단순히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해결해 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그리스도는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상담자가 되십니다. 곤경에서 건지시는 해결자가 되십니다. 동반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함께 합니다. 사람과 함께 합니다. 물질과 함께 합니다. 권력과 함께 합니다. 무엇과 함께 하십니까?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모습이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첫째로 죽었나니

웟치만 니(Watchman Nee) 목사의 간증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죄악에서 떠나기가 몹시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 내가 죽어야 죄에서 해방될 수 있구나. 이제부터 내가 죽자". 그러나 말로는 죽는다 했지만 자신이 여전히 죽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웟치만 니는 아래층의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머니, 웟치만 니가 죽은 것을 아세요. 그 사람이 죽었답니다".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알렸습니다. "웟치만 니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광고를 하자 그때부터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죽었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20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영어성경인 NIV역에 보면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지금까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왔고, 지금도 십자가에 못 박혀있다" 는 의미입니다. 토저(A.W. Tozer)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는 의미를 한 방향만 보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바라봅니다. 바울도 예수를 만난 후에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다른 것을 보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나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행하고, 교회도 소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온전히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반드시 죽어야 됩니다. 지금보다 더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나니

부흥전도자였던 무디(D.L Moody)를 찾아온 여자 교인이 말합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던가, 아니면 벌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이 분명해요." 말을 듣던 무디는 부인을 바라보며 다시 말합니다. "부인, 부인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교회를 얼마나 오랫동안 출석했는데요". 반문하는 그녀에게 무디는 말합니다. "당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혹 가면을 쓰고 다닌 것은 아닙니까? 이제 가면을 벗고 실체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새로운 삶이 열려집니다.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본문 20절 중반절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산다. 그러나 내가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모습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삶' 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거듭난 사람이요 새 사람입니다. 비록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나 내 안에 계신 예수가 강함을 믿는 사람입니다.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환경에 있을지라도 주께서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메시아(Messiah)를 작곡한 헨델(G. F. Handel)은 삶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1741년 파산하였고, 감옥에 들어갈 처지가 되었습니다. 화려했던 삶이 끝장난 것입니다. 결국 자살을 시도하지만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 군왕을 위해 작곡하고 명예를 위해 연주하던 삶을 포기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주께서 기뻐하시는 음악만 작곡하고 연주하였습니다. 그래서 만들게 된 음악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가능하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면, 고집과 욕심을 버리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복된 삶이 됩니다.


셋째로 믿나니

1889년 같은 해에 히틀러(Adolf Hitler)와 아이젠하워(D. Eisenhower)가 태어납니다. 히틀러는 술주정뱅이 남편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군대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제대합니다. 정치한다고 감옥에 드나들다가 정권을 잡았지만 그는 전쟁광이 되었으며,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출생한 아이젠하워는 텍사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믿음을 이어 받았습니다.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간 이후에 진급을 거듭하다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킬 무렵 유럽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그 전쟁에서 아이젠하워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제대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전쟁 중에도 주일예배를 드렸던 그는 대통령이 되서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80세에 죽을 때 세계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후르시초프와 정상회담을 할 때도 주일은 일정을 비워 둘 정도로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곳에 당장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 하반절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들은 삶의 방법이 달라집니다. 과거에는 내 실력으로 살았다면, 내가 가진 것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염려가 없어집니다. 걱정과 근심이 없어집니다.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교회 밖에서는 불신자와 구분이 잘 안됩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도무지 믿는 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믿음이란 행함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 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 사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무게가 같은 십자가를 주시며 말씀합니다. "이 길이 끝나는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너라." 첫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메고 갔으나 두 번째 제자는 힘들어 뒤로 쳐집니다. 첫번째 제자는 하루만에 도착하여 십자가를 예수께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등을 두드리며 "아들아, 잘 했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서야 도착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합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게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주시다니요". 예수께서 슬픈 얼굴로 말하십니다. "십자가는 둘 다 같은 무게였느니라." "아니, 그러면 왜 십자가를 지고 올 때 힘이 들었습니까?"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는 동안 네가 줄곧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야.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가 늘어난 것이지. 그러나 먼저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도 사랑을 실천했기에 사랑이 그 무게를 덜어준 것이야. 그래서 쉽게 십자가를 지고 온 것이란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응답의 부활, 치유의 부활, 회복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피하면 그 무게가 천근 만근이 되어 우리를 짓누를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고 썩어져야 사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합니다. 바울이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승리를 얻었던 이유는 날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도 임하리라 믿으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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