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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형통 (창 3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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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형통 (창 39:1-23)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기까지의 구속사적 과정의 기록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관련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 기사도 단지 한 신앙적인 청년의 성공담을 말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처럼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 방법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본문에 접근하는 태도는, 성경의 기록 목적을 외면하고 자의적으로 왜곡하게 됩니다. 보다 건전한 태도는 요셉의 종살이와 옥살이 사건이 하나님 언약의 성취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염두에 두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부족을 심한 기근으로부터 보존하여 큰 민족으로 자랄 터전의 마련을 위해 요셉을 주권적으로 쓰셨습니다. 특히 창세기 39장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어떻게 요셉을 대하시며 인도하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절을 보면, 형들이 팔아버린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2). 보디발은 요셉을 지켜보면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3). 이로 인해 요셉은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주인의 모든 소유물을 맡아서 다스리는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4). 그리고 요셉이 가정 총무가 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과 소유에 복을 주셨습니다(5). 보디발은 요셉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으므로 자기의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고 전적으로 요셉에게 다 맡겼습니다(6).

이상에서 요셉의 생애는 아주 간략하게 스케치되었습니다. 요셉의 성공담이라면 요셉이 어떻게 해서 성공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셉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성공 요인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요셉은 계속 수동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다른 성경의 본문들처럼 역시 이곳에서도 주인공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30세의 나이에 총리가 되었다는 그 결과만 바라봅니다. 겨우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배다른 형제들에게 심각한 왕따를 당했던 일, 인신매매를 당해서 외국으로 팔려간 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밑바닥 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일 등은 너무나 쉽게 간과해버립니다. 요셉의 생애 중 30세 이후의 삶은 부러워하지만, 17세부터 30세까지의 삶은 결코 부러워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의 때에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형통’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처음부터 왕따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인신매매가 되거나 삶의 밑바닥 생활로 전락하는 일 등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흉악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나 발생하는 일들처럼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불신자들보다는 덜 슬퍼야 하고 덜 괴로워야 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추측이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환난을 만날 수 있음을 숨기지 않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보디발이 요셉보다 훨씬 더 풍족하고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문은 도저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야곱과만 함께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땅에 팔려간 요셉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이 색동옷을 입고 있을 때만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종살이 하고 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즐겁고 기쁜 때만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비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은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커다란 구속 역사의 한 부분을 완성해가고 계셨습니다.

지난 주 대구 한 마음 교회 이광호 성도님이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온유하고 마음이 청결했던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선천적으로 혈관 벽이 얇은 희귀병을 자신도 모른 채 앓고 있다가 복부 동맥 파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은 아내와 5살짜리 딸, 그리고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님만 남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너무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 고인이 참석자들에게 남겨주고 간 교훈은 많았습니다. 젊은 주검 앞에서, 성공과 성취를 위한 쉼 없는 우리네 발걸음이 어디로 향해져야만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이 땅의 삶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했고, 완성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했습니다. 수석으로 합격하고 수석으로 입사했다는 그의 경력들은 오히려 안타까움만 줄뿐이었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았던 그의 삶의 자취들만 우리네 가슴에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그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만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만이 의미 있게 남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가르쳤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살라고 했습니다. 범사란 감사할 수 있을 만한 때만이 아니라 도저히 감사하기 힘든 순간까지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방식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실한 성도는 그분의 주권적인 역사하심 속에 선하신 당신의 뜻이 있음을 ‘인정’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섣부른 해답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그 고통의 순간조차도 함께 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감사가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서야 우리는 요셉의 17세부터 30세까지의 시간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들임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요셉의 또 다른 일화를 보도록 합시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는데(29:17), 요셉도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습니다(6). 히브리어로는 둘 다 같은 단어(hp,y:)가 쓰였습니다. 요셉의 준수한 용모에 반한 미세스 보디발이 눈초리를 요염하게 들어 올리며 잠자리로 유혹했습니다(7). 그 유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날마다”(10) 계속되었습니다. 요셉은 가정총무였으므로 여주인께 보고하거나 상의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집 사람이 아무도 없는 어느 날에 여인은 요셉의 “옷을 잡고” “나와 동침하자”며 적극적으로 매달렸습니다. 능력과 외모를 갖춘 젊은이가 낯설고 외로운 객지에서 적극적인 유혹을 받았을 때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유혹이 자신의 안위뿐만 아니라 생사까지 손아귀에 쥐고 있는 직속상관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거절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주인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 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8-9).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예민하게 의식한 요셉은 여주인과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10). 여인이 옷을 꽉 잡고 매달릴 때도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했습니다(12).

요셉의 단호한 거절 때문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는지 여인은 요셉에게 성희롱과 겁탈의 누명을 씌워서 고발합니다(13-18). 요셉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바르게 살았으나 억울한 옥살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21). 요셉은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간수의 사무를 담당했습니다. 요셉의 종살이와 옥살이 사건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23b).

본문은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성공이나 출세와 연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도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을 형통이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형통’의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게끔 합니다. 또 한편 본문은 성도의 도덕적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말해줍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상황에서 요셉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예민하게 의식했습니다. 항상 그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입장과 태도를 표명했습니다. 요셉이 심각한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선명하게 의식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 성도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의식하고 사는 태도가 도덕성의 근원입니다.

오늘 말씀은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한 단편 속에서, 당신님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백성된 자의 올바른 반응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참으로 형통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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