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 (슥 8:1-8)

  • 잡초 잡초
  • 833
  • 0

첨부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 (슥 8:1-8)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과 파괴적인 문제의식을 제거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정의 포로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십시오.  마음의 평화를 탐내십시오.  산과 같은 평정, 호수 같은 안정을 가지십시오.  늘 자신을 새로움으로 채우십시오.  타인의 섣부른 판단이나 어처구니없는 평가에 결코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주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는 기백을 가지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부족하지만, 연약하고 무능하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해 보리라는 자기 의지와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한없는 기대와 포부를 줍니다.  때문에 믿음은 삶에 열정과 희망을 줍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하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음을 믿으십시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대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주 안에서 계속 더 큰 기대와 포부를 가져야 됩니다.  주 안에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의식을 개발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왜소화시키지 마십시오.  나는 못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고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은 소위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생산적인 것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학대하고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환경을 탓하고 저주합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자주 드리는 말이지만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은 그 사람의 환경을 고치기 전에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나쁜 태도가 불행을 만들고 좋은 태도가 행복을 낳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늘 건강한 인격으로 일해야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일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부정적인 생각과 자기 연민에 빠지면 안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피곤하지만 주변의 가족들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기질화, 성령의 체질화를 옷 입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인 스가랴 8장은 예루살렘의 회복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본문 8장을 보면 무려 열 번에 걸쳐서 똑같이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니까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 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져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책임을 감당해 가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복이라는 것은 먼저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과 예루살렘 도성의 회복에 그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된다.  그리고 황폐화된 예루살렘 도성이 회복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이나 도시의 회복만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비단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 회복뿐만이 아니라, 신약까지 연장되어서 모든 시대를 통한 신앙 공동체의 궁극적인 회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에 있어서의 신앙 공동체의 회복인 교회의 회복까지도 바라보고 있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의 스가랴 8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드는 이 공동체에 대한 공동체의 꿈과 비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꿈, 믿음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꿈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꿈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공동체가 되게 하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공동체를 향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시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 삶의 자리에 흩어져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이 재단으로 불러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 믿음의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은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시는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꿈을 가지고, 믿음의 공동체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메시지를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도, 어느 누구도 자기의 꿈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이 다하는 그 마지막 숨결 앞에서 내 꿈을 온전히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공동체도 그 공동체에 위탁된 꿈을 100% 완전히 실현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도 사실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완성 교향곡과 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꿈이 없다면 개인은 절대로 발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 꿈과 이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좀더 나은 삶에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결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이 없는 공동체는 결코 성숙해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우리가 그 꿈과 이상을 100% 완전하게 성취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꿈이 없는 인생은 앞을 향해서 도무지 전진해 갈 수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인생에 활력을 주고, 인생을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있다면 저는 그것을 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에 희열을 주고, 인생에 의미를 줄뿐만 아니라 인생을 성숙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비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개인이나 공동체나 꿈과 비전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꿈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 동양 사회는 상당히 소극적인 정의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동양권에서는 꿈이라는 것이 별로 좋은 의미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몽상, 내지는 개꿈 같은 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것들, 헛된 어떤 것들을 상징하는 언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구 사회에서는 꿈이라는 것은 매우 진취적이고 미래를 향한 의지로 작용하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서양 사회가 동양 사회를 앞지르고 많은 가치를 창조해 놓은 중요한 배경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실까요?  우리의 교회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런 꿈과 비전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것은 비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 속에서도 더 분명한 꿈을 다시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꿈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사탄은 믿음의 사람에게 자꾸만 꿈을 버리라고 속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을 꾸십시오.  주님 안에서 비전을 품으십시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공동체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한 개인과 공동체에 성령님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꿈과 비전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면 환상을 보게 됩니다.  꿈을 꾸게 됩니다.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무엇보다도 꿈을 가져야 됩니다.  다시 꿈을 붙들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은 저수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꿈이라고 하는 저수지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힘든 가뭄이 와도 어렵지 않습니다.  꿈은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하는 북극성과 같습니다.  꿈은 칠흑같이 어두운 망망한 바다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시계가 아무리 좋아도 배터리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꿈이 없는 인생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꿈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꿈을 가져야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런 비전을 품어야 됩니다.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20대 초반의 어린 신학생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빌스킬이라는 신학교 교수가 가르치는 사도행전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교수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 살아 움직이는 교회, 모든 교인들이 전도하던 교회, 나가서 불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수가 학생들에게 도전하기를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직 초대 교회 이후에 이 초대 교회를 닮은, 아니 초대교회를 능가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인 가장 위대한 교회는 아직 이 땅에 탄생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바로 그런 교회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린 신학생 빌 하이벨스는 마음속에서 외쳤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도와주시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사도행전을 닮은 위대한 교회의 꿈이 탄생하고 있었던 순간입니다.  만약 그가 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윌로우 크릭 같은 아름다운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꿈과 비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고 도시가 회복되면서 시온의 땅에 세워질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이 땅의 믿음의 공동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이 기대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어떤 꿈을 가져야 합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불러모으시고 세우신 이 믿음의 공동체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실까요?
또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를 기대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모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고 너무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공동체를 말입니다.  그것이 본문 1절과 2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1절과 2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여기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기대를 읽어낼 수가 있습니까?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단어가 있다면 어떤 단어가 있겠습니까?  질투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같은 단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질투가 일어날까요?  만약에 어떤 여자가 남편이 바람이 들었는데, 전혀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성화가 완성된 성녀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주 돌아이던가?  머리가 어떻게 된 이상한 사람이던가, 아니면 인간이 아니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질투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질투 안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해서 그들의 시선을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질투하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런 부분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나님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인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닮아서 하나님이 인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왜 질투하는가?  하나님을 닮아서 질투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닮은 특성 중에 하나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여기에서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불러모으신 믿음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 시온을 위해서 조금 질투한다가 아니라, 크게 질투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를 위하여 분노까지 하신다고 했습니다.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시는 하나님.  아주 인간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질투 속에 움직이고 있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바람이 나던지, 집에 나가던지, 나는 관심 없다.  이것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주님 이외의 다른 것을 향해서 시선을 돌릴 때,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하나님.  크게 질투하시고, 화내시면서 돌아오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  그렇게 저와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땅히 개인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신부입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 너무나 사랑스러운 신부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심령이 정말 주님을 향하여 드려질 때, 우리의 그 순전한 시선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무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해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너무 보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사랑 받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본문 3절의 말씀입니다.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돌아올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만 돌아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 3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리고 누가 시온에 돌아온다고 했습니까?  내가 돌아왔은즉 주님이 돌아왔은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그리하여 그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고지대의 언덕에 세워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 있습니다.  감람산, 시온산, 이 산들이 쭉 에워싸고 있습니다.  지금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환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진리의 성읍이 되고,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을 보면서 이 산은 성산, 거룩한 산이 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이 진리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세속적인 공동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 교회는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서 비로소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의 최대의 자산은 건물이 아닙니다.  터전도 아니예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진 교회, 하나님이 말씀이 부요하지 못한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지 못한 교회, 그것은 비워있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메시지가 선포될 때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빛을 볼 것입니다.  새로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꿈과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공동체, 그리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아름다운 시온산, 감람산이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거룩의 삶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또 하나,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거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리와 거룩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이 진리를 받고 나아가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의 삶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삶으로 진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삶이 없을 때 교회에서 선포되는 진리는 하나의 추상적인 강론으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은 우리의 삶 속에 거룩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정말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이 바로 진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기도의 장면 가운데 이런 유명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이렇게 바꾸어서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 기대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교회는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가 되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공동체는 기적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본문 6절의 말씀입니다.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무너진 나라,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과 공동체가 회복된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예루살렘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을 읽어보면 예루살렘의 참담한 사정에 대한 보고를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느헤미야는 통곡을 하고 금식을 하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회복된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사실입니다.  기적이 없으면 그들의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는 어찌 기이한 일이겠느냐?"
다시 말하면 '나, 하나님에게는 그건 문제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면 못 이루실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자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간적으로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생리적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천사를 통해서 자녀를 주신다는 메시지를 주셨더니 아브라함과 사라가 최초로 보였던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웃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 여호와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내가 하고자 한다면 내 눈에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나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놀라운 섭리하심과 역사는 성경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예레미야 32장에도 예레미야가 유다의 결정적인 멸망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멸망을 예언하는 동시에 회복을 예언합니다.  이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뻔합니다.  그런데 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데 회복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 32장 27절에 보면 또 그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기울어져 가는 가정, 기울어져 가는 사업, 기울어져 가는 내 인생의 운명 앞에서 사람들은 멸망을 볼 뿐 회복을 보지 못합니다.  침륜과 좌절과 낙심과 황폐를 볼 뿐 그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복을 보지 못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내가 하고자 하면 그것이 문제겠느냐?  네 눈에는 그것이 기이함일 것이다.  놀라움일 것이다.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죽은 것을 살리시는 하나님, 헐어진 것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바로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치유와 회복을 가능하게 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질병이 나음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무너졌던 가정이 믿음으로 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도 기적입니다.  인생에서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다시 소망을 붙잡고 일어나는 것이 기적 중에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서 영원한 지옥에 가야할 영혼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이것이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의 공동체를 통하여 바로 이런 기적의 공동체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속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은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가진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에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유일한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대하십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안달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동일한 기대를 안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숙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공동체를 만들어 이 세상 앞에 하나님의 꿈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 그래서 여기서 목마른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해갈하고, 그들의 인생이 바뀌고, 삶이 변하는 위대한 비전이 나타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꿈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더욱더 힘쓰고 기도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