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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대하 6: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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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대하 6:18-42)

  'Regarding Henry'(헨리의 이야기)라는 영화에 보면, 유명한 변호사인 남자 주인공 헨리가 강도의 총에 머리와 가슴을 맞아 중상을 입게 됩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기억 상실증에 걸린 그는 걸음마부터 시작하여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재활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말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이었는데, 언어구사에 대하여 일종의 공포증에 사로잡힌 그는 상대방의 말하는 것을 이해는 잘 하면서도 자기 입으로는 한 마디, 아니 한 음절의 발음조차도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고 답답해하던 그의 남자 간호사는 한 가지 방책을 생각해 내는데, 헨리에게 아침밥을 받아 주면서 거기에다가 아주 매운 소스를 몰래 듬뿍 뿌렸던 것입니다.

  헨리가 한 숟갈 입에 넣고서 우물우물하다가 너무 매우니까 당장 다 뱉어내고서는 그 화끈거리는 입속을 어찌하지 못하고 당황해합니다.
  그러자 그 간호사는 헨리에게 "너 답답하면 무슨 말을 해 봐. 이런 매운 것 말고 네가 정말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게 말만 하면 뭐든지 갖다 줄 수 있단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그를 자극시킵니다.
  갑작스럽게 일종의 충격요법을 받은 헨리는 입술을 우물우물 달싹달싹 하다가 드디어 "Ritz"(리츠)라는 말 한 마디를 아주 어렵게 내뱉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 말 한 마디가 입에서 터져 나온 후 헨리는 급속도로 언어구사력을 회복하고 기억력 역시 조금씩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한 마디만 터져 나오면 나머지는 지극히 쉬운 것인데 그 첫 한 마디를 시작하지 못하는 답답한 환자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입술이 열리지 못하는 교인들입니다.
  다른 말은 잘 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포증을 가지고 그 첫 한 마디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새 성전 봉헌식을 하면서 솔로몬이 첫 공식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지은 성전이 그런 영적 벙어리들만 모여서 무슨 순서에 따른 의식만 치르는 곳이 될 것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18절부터 21절의 말씀에서 "18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전이오리이까 19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0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1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기 "용납지 못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담지 못한다'는 뜻으로서, 성전이란 곳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한정적으로 수용하는 장소가 결코 아님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솔로몬은 성전이 사람이 하나님께 입을 벌려 간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 영적 교통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곳으로 확신하면서 이 봉헌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응답해 주시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현주소가 있는 곳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성전을 찾아와서, 혹은 그 성전을 "향하여" 기도드리니까 그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도달하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통한 기도를 "하늘에서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해 주시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성전에서 간구함으로써 응답받게 되는 기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1. 성전은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곳입니다.

  22절과 23절에 기록하기를 "22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23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이란 말은, 어떤 사람이 이웃 사회로부터 무슨 혐의를 받은 경우를 말합니다.
  그때 그 혐의 받은 사람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죄함을 맹세하면서 기도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종들을 국문하신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그 맹세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 그 뻔뻔스러운 악인의 죄를 하나님께서 친히 정죄하시고 그 죄를 그 사람의 머리에 돌리시게 됩니다.
  하지만 "의로운 자는 의롭다"고, 즉 무고하게 혐의를 받은 사람은 그 억울한 처지를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가장 공의롭게 판단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람 앞에서 억울한 소리 들을 때, 세상에서 부당한 판단 받을 때, 우리가 그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기도하면 그 언제나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도하는 신자는 어떤 한(恨)이란 것이 그 마음에 맺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말하는, 소위 '죽어 귀신이 되어도 잊을 수 없는 한'이란 것은 적어도 참된 신자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란 항상 오해와 의심이 따라올 수밖에 없지만, 그럴 때마다 바로 이 전에 나아와서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 자기 처지를 탄원함으로써 그 의로우신 재판장의 위로와 선처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성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벌 받았을 때 그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곳입니다.

  이어지는 몇 문단의 솔로몬의 기도는 모두가 다 자기에게 벌어지는 어떤 현실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드리는 기도들입니다.
  우선 24절과 25절에 "24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25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의 패전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경우에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되었습니다.
  무언가 자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일수록 사람은 더욱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호를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이 주께 "빌며 간구하는" 간절한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의 경우는 가뭄을 당할 때인데, 26절과 27절에 기록하기를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게" 되는 천재(天災) 역시 사람에게는 회개의 기회라고 했습니다.
  즉 "주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을 깨닫고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면서" 회개기도하게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회개 기도의 결과 사람은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제대로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의 재난들 역시 마찬가지로 회개기도 드릴 기회입니다.
  28절부터 31절에 기록하기를 "2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당하게 될 때에도 사람은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람이 벌을 받게 될 때, 사람이 회개하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회개의 기도와 간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사유해 주시는" 응답을 내려 주실 것을 솔로몬은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체험들을 계속하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은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행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자에게 벌을 내리시고 사람은 그로 인하여 회개기도를 드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고 마땅히 가야할 선한 길에 더욱 바로 서게 될 때, 그 결과 성도는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과 주의 길에 바로 행하는 행실에 더욱 성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꾸중을 했을 때 자식이 끝까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고 오히려 화난 표정만 짓고 있으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 그 순간만큼 자식의 얼굴이 못나 보일 때가 없을 것입니다.
  벌 받고 있으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 바로 그런 기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우리의 통회와 자복의 기도가 드려지는 곳으로 사용되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지 이 성전에 찾아와서 회개의 눈물을 '주님의 발'에 흘려 부음으로써,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 평안히 가라'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주님의 응답을 꼭 듣게 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성전은 불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 첫 신앙고백의 기도를 드리는 곳입니다.

  32절과 33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32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저희가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33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여기서 참으로 놀랍게도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 대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들은 성전에 들어올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택자들이 있으며 그들이 성전을 찾아오게 될 날까지도 미리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어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 드리는 기도이니 서툰 기도일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기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첫 기도인 까닭에 매우 귀중한 기도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 역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부르짖는 대로 이루어 주시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게 될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께 기도드릴 줄 아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첫 단계, 신자로서 반드시 내디뎌야 할 첫 걸음마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기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이 땅의 '만민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되고 이스라엘처럼 주를 경외하게 되며' '교회는 주의 이름이 있는 곳 즉 하나님과 교통하는 현세의 주소'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첫 울음소리를 내어야만 비로소 살아 있는 아이가 됩니다.
  그 울음소리 끝내 못내는 아이는 이미 죽어 있든지 아니면 호흡이 안 되어서 결국 죽게 됩니다.
  아무 말도 되지 않는, 그냥 목으로 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소리에 불과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그 아이의 바깥세상 생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확인해 주는 필수적인 소리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될 때도, 바로 그런 첫 소리를 반드시 내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서툴고 말도 잘 안 되는 기도라 할지라도, 자기 영혼이 중생 받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되면 그 입술에서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는 이 새 생명의 언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첫 기도를 꼭 터뜨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4. 성전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면서 그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곳입니다.

  34절과 35절에 기록하기를 "34주의 백성이 그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저희가 주의 빼신 이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35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 보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쟁하러 떠나는 경우인데 그것을 두고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라고 했습니다.
  즉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바를 따라 나가는 사명적인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전쟁이며 이기도록 미리 약속해 주시는 전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출전 중에 "이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아 주시는" 응답을 내려 주실 것을 솔로몬이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이 잘 안될 때만 기도하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 될지 미래를 모를 때에만 기도하는 것도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려 할 때에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잘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일을 하려 할 때에도, 성도가 일단 기도부터 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은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일의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기도는 생략해도 자동적으로 잘 되도록 해 놓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조차도 꼭 기도부터 하게 하시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그 일을 도와주심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기도의 능력을 항상 가까이 체험하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흔히 미국의 대학교 운동선수들은 경기장으로 나가면서 라커룸 벽에 그려진 자기 학교의 문장 따위를 한 사람씩 점프해서 만지면서 나갑니다.
  또 어떤 팀의 선수들이든지 간에 경기를 시작하기 직전에는 의례히 다 함께 둘러서서 머리를 맞대고 손을 모아 '허들(huddle)'을 하면서 파이팅을 외칩니다.
  이 모두가 꼭 그 경기에서 이기고자 하는 집념과 각오를 다지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 그런 행동이 그 시합을 이기게 해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그 일에 반드시 승리하도록 보장이 되어 있는 파이팅 함께 외치는 멋진 영적 허들인 것입니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크고 작은 영전을 치를 때마다 먼저 이 전에서 함께 기도드림으로써 '그 일을 돌아보시고' 반드시 이기게 해 주시는 축복을 늘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5. 성전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다시 하늘 아버지를 찾아오는 기도를 드리는 곳입니다.

  36절부터 39절에 "36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물론하고 끌어간 후에 37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38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과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39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 보옵시며 주께 득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를 가상해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에" 비록 선민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 진노가 대단히 커서, 그냥 전쟁에서 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희를 적국에 붙이시고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물론하고 끌어가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지금 솔로몬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정말 벌어지게 됩니다.
  용서받은 후에도 또 범죄하는 패턴이 몇 번 반복된 후, 이스라엘은 아예 나라 전체가 완전히 망하고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날을 실제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뵐 낯이 없으며, 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염치조차 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결딴나고 백성이 뿔뿔이 흩어진 그 상황이란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고, 그러니 또 회개하고 기도한다 해 보았자 응답될 것이라고는 감히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하늘에서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그런 경우에도 발동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로잡혀 간 땅에서, 그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다가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게 된 그 땅에서도 "돌이키고"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다"고 고백하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회개하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그 기도조차 또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득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 어느 구석에서 그 어떤 처지를 당해 있어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기도드리는 것 자체조차 염치가 없을 만큼 부끄러운 처지에 있어도 기도의 통로는 아직도 하늘 보좌를 향해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뻔뻔스럽게만 여겨지는 그 순간에도 하늘에 계신 분의 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쳐 있고, 아니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를 가장 먼 곳으로 쫓아 보내셨다고 여겨지는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는 기도의 전화선은 바로 이 성전을 통하여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뇌사 상태에 빠졌던 환자가 회복되기 시작하면 먼저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곁에 있던 의사나 가족들은 그 환자가 입을 열고 무슨 말 한 마디 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그 말 한 마디는 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알려 주는, 더 이상 식물인간이 아니라 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실로 천금과도 같은 한 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최악의 절망 중에 있다 해도 내 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한 마디의 기도가 나올 수 있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아직 소망이 있는 자녀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이런 구사일생의 소망의 줄을 끝까지 하나님과 이어주는 이 '기도의 집' 성전을 통하여,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는' 우리 주님의 택자 보전의 은총을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솔로몬은 그의 성전이 바로 이와 같은 '기도의 집'이 되도록 해 달라고 40절 이하 42절에서 "40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41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 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의 제사장으로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로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42여호와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이키지 마옵시고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라고 기원했습니다.
  "사람이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심"으로써, 성전은 비로소 성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야 성전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처소라 불릴 수 있으며, 그런 기도가 통해야 성전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속죄제사가 제대로 드려질 수 있으며, 그런 기도의 체험이 있어야 각 성도는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고 기뻐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당대 최고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지어 바친 그 성전이 어떤 건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관광 명소로 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가를 과시하려고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는 그 성전이 하나님이란 분을 무슨 좋은 곳에 사시게 하려고, 잘 모시기 위해 지어 놓은 처소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성전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영적으로 체험하며 기도를 통하여 그분과 교통할 수 있어야만 제대로 된 성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리가 올라가지 않고, 그 성전을 통하여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듣고 응답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 화려하고 장엄한 성전 건물 자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가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신자의 공동체'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집'이라는 장소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해야 할' 장소가 교회에는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고 선언하셨으며, 성자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시면서 바로 이 말씀을 재차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 곳을 '내 집'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의 강서성전은 여러분이 주일 아침 한 시간 동안 그 예배순서에 따라 의식만 치르는 곳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었으면 이제 입을 벌려서 그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써 정상적인 영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런 기도 없는 교회는 건물만 남게 될 것이고, 기도 없는 예배는 순서만 남게 될 것이고, 기도 없는 제사는 물질만 남게 될 뿐인 것입니다.
  부지런히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몸이 떠나 있을 때에도 교회를 중심으로 늘 기도드림으로써, 그 하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이 성전을 하나님께서 '내 집'이라 불러 주시는 성산으로 함께 세워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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