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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습니다(예배) (마 22:36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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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습니다(예배).
+ 설교본문 : 마태복음 22:36 - 40

우리는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캠페인] 중에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 다섯 가지를 공부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목적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사랑함으로 반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인간이 절대자에 대해 경외심을 표현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히브리어의 경우 일반적으로 예배라는 말은 ‘아보다’(출 12:25,26), ‘아바드’(삼하 15:8)인데 ‘일한다’, ‘섬긴다’는 뜻이다. 헬라어로는 ‘라트레이아’(롬 12:1)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임금을 받는 고용’, 혹은 ‘매매되는 노예’를 의미했는데, 후에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섬김의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또 ‘프로스큐네오’(요 4:20 이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부복하다’ 혹은 ‘경배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한 율법사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예배드리는 자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해야 하느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되는지를 말씀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사려 깊게 사랑하고, 실제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배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가 중요한 이유

첫째, 하나님께서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예배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요 4:23). 히 11장에 보면 믿음의 거장들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일들이 열거됩니다. 그들은 인생을 방법이나, 철학이나, 신념이 아닌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첫 번째 자리에 아벨을 세웠습니다(히 11:4). 아벨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가 주님을 위하여 엄청난 헌신을 했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입이 벌어질 만큼 큰 역사를 이루었거나 아니면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이룬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오직 한번 하나님 앞에 참된 제사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가장 앞에 나온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그만큼 예배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다른 어떤 큰 역사보다, 다른 어떤 기적보다, 엄청난 헌신보다 예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기에 사단은 예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를 드린 아벨을 가인을 통해서 죽인 것입니다. 사단은 마지막 때에 더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예배를 폐하도록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후에 그들에게 레위기를 주셨고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만큼 에배에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둘째, 인생의 행복이 예배를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은 예배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들은 예배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욜 1:8이하를 보면 유다에 임할 재앙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성민이라는 칭호를 주신 유다가 멸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실패 때문입니다.

욜 1:9에 보면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라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는 비참한 현실로 다가옵니다. 유다를 침공한 적들 때문에 약혼자를 잃은 처녀가 슬퍼합니다. 환경적인 저주 때문에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고 곡식이 떨어지고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했습니다. 모든 과일나무들이 시들어버리게 되어 사람들의 즐거움도 말라버립니다. 성전에서 제사가 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금식하고 성전으로 모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우리의 예배가 무너지고 있다면 지금은 평안할지 모르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엄청난 재앙을 격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둑이 무너지면 강물이 마을을 덮치듯이 예배가 무너지면 재앙이 우리의 인생을 덮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배의 종류

첫째, 공예배가 있습니다.
공예배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민 28:2 정한시기에 드리는 제사가를 드렸습니다. 민 28:7에서는 거룩한 장소 즉 구별된 장소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공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시간에 맞게 예배당을 찾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성탄절이 되면 동방박사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들은 동방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직접 찾아와서 주님에게 선물을 드리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상한 별을 연구하다가 예수가 동방 베들레헴 마을에 나셨다는 사실을 알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택배로 보냈다든지 속달로 보냈다든지 인편에 보냈다면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 박사는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직접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정한 시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수고는 믿는 자들의 기본인 것입니다.

둘째, 생활의 예배가 있습니다.
생활의 예배는 뒷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3. 공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

어떤 사람은 교회에 공예배가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연애하는 처녀총각이 뜨겁게 연애할 때는 자주 만납니다. 일주일에 한번씩만 만나면 병이 들 정도입니다. 날마다 만나도 부족합니다. 만나고 헤어지면 헤어지자마자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예배가 너무 많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너무 예배와 예배 사이의 간격이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첫째,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을 위하여 공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모여서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는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공예배시간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는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공예배는 나와 다른 지체들이 머리되시는 주님과 연합한 한 몸임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공예배는 우리들이 주님을 대장으로 모신 하나님 나라의 군대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공예배를 부인하는 신앙은 공동체를 깨는 행위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주님의 몸에서 이탈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그리스도의 군대에서 탈영하는 위험한 행위인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힘을 공급 받기 위하여 공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영적인 충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누구든지 예배가 무너지면 그의 신앙이 무너집니다. 또 누구든지 예배가 회복되면 그의 신앙이 회복됩니다. 이것은 신앙경력과도 상관없으며 직분과도 상관없습니다.
공예배시간은 운행하던 자동차가 주유소에 들어가서 기름을 채우는 시간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어떤 자동차든지 정상적으로 운행을 하려면 예외 없이 운행을 하다가 중간 중간에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채워야 하는 것처럼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인 힘은 개인적으로도 공급 받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예배를 통해서 받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4. 공예배의 3대 유혹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에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니 보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 때 바로가 보인 반응은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는 우리들에게 사단의 보이는 반응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첫 번째는 구별됨에 대한 유혹입니다.
출 8:25-27절을 보면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갈 수 없으니 애굽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모세는 애굽에서 나가서 광야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는 구별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과 등을 돌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간을 구별하고 날을 구별하고 재정을 구별하고 몸을 구별해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이 주일에 예배당은 안오고 골프장에만 갑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주일에 집사님이 예배당 안오고 골프장에 가시냐?”고 했더니 이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힙니다. “제가요.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골프장이 머릿속에서 왔다갔다합니다. 볼을 치는 것, 퍼팅하는 것이 머리 속에서 왔다갔다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있지만은 마음은 골프장에 가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골프장에 가니까 몸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지만은 이 마음은 계속 예배당에 예배드리는 모습이 자꾸 상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깨달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나는 골프장 가기로 했습니다” 말이 됩니까? 안됩니다. 얼마나 성경도 잘 들이 대는지...예배는 구별됨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만 예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렸던 장소가 어디입니까? 성막입니다. 그런데 그 성막에 울타리가 있습니다. 그 울타리 때문에 성막 안에서 성막 밖이 안 보입니다. 그리고 성막 밖에서도 성막 안이 안 보입니다. 구별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습니까? 세상과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요일을 일요일이라 하지 않고 주일이라고 하고 성일이라고 합니다. 성일이 뭡니까? 거룩한 날입니다. 거룩이 뭡니까? 구별된 날,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날은 공휴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구별된 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았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회학교 교사, 찬양단, 셀리더와 인턴 하나님의 교회가 주신 직분입니다. 우리는 이 직분을 성직이라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것이니까. 이거 귀하게 잘 감당해야합니다. 세상직분과 다른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구별이 없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예배도 세상에서 하는 일과 비슷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배나 골프나 성직이나 세상직분이나 구별없이 비슷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계승의 유혹입니다.
출 10:8-11을 보면 애굽을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모세에게 바로가 말합니다. “뭐 얘들까지 제사 하는데 데리고 가냐. 장정만, 어른들만 하나님한테 제사 드리게 하지” 그러면서 참 재밌는 얘기는 어린애들까지 같이 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가지 말고 어른들만 가라는 것이 바로의 유혹이고 그것이 신앙의 도전입니다. “자기나 신앙생활 잘하고 자기나 예배 잘 드리지 무슨 아이들까지 동원을 하느냐, 자기나 성령 받았으면 됐지 아이들한테까지 성령 받게 하려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신앙이 계승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산국가에서는 만 18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안 되도록 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 신앙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저도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그 아이들의 신앙상태입니다. 제 믿음이 좋다고 아이들 믿음도 좋으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믿음을 버린다면 우리 집안의 믿음은 당대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믿음이 좋다면 믿음이 후손들에게 계승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머리가 좋기 때문에 다음 세대를 흔들어 놓습니다. 지금 세대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면 교회는 곧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계승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만 생활한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 방황하는 것 같아도 곧 제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의 탈선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교회에 머물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테네시주에 네시빌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미성년자 범죄를 담당하는 태텀이라고 하는 판사가 있습니다. 그가 다루었던 청소년 범죄자 4,800명 가운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죄를 짓은 사람은 28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잘 다니는 아이들은 범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양부모가 다 교회에 다니는 가정, 신앙생활을 잘 하는 가정에는 그런 아이가 없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청소년을 탈선에서, 유혹에서, 범죄에서 건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교회 오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계승시키면 탈선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에 예배시간이면 자녀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낮예배만이 아니고 수요일, 금요일에도 데리고 오는 부모님들이 있는데 참 잘하시는 겁니다.

세 번째는 헌신에 대한 유혹입니다.
제물 없이 제사하라는 겁니다. 출 10:24을 보면 바로가 모세에게 애굽에서 나가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자녀들과 함께 가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자기들과 자녀들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여러분 바로가 요구하는 것은 제물 없는 제사입니다. 헌신 없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드리는데 헌금은 하지 말고, 예배는 드리는데 봉사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머하나 소개합니다. 기차 여행 중에 같이 앉은 사람들끼리 얘기를 하다보니까 서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상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잖아요. 그래서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도시락을 준비해가지고 와서 먹고 있고 다른 한사람은 도시락을 준비를 못했습니다. 도시락 갖은 사람이 도시락뚜껑을 여니까 그 안에 샌드위치가 있었습니다. 진짜 맛있게 보였습니다. 도시락을 정말 맛있게 먹는 겁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그리스도인이 혹시 샌드위치하나 안주나 기다리고 있는데 안주는 겁니다. 그래서 머리를 썼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 보니까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샌드위치 좀 나눠먹으면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 되면 하나 줘야 할텐데 상대가 정색을 하면서 “선생님! 성경에 보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나머지를 낼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잘 알고 편리에 따라서 이용도 하지만 희생은 없는 모습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에는 제물이 있었습니다. 제물 없는 제사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드리는 공예배에는 예배에 합당한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모범이 된 사람이 다윗입니다. 삼하 24장에 보면 다윗의 범죄로 재앙이 이스라엘 가운데 내리게 됩니다. 다윗은 선지자 갓을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다윗이 그 나라의 왕이었으니 그 타작마당을 그냥 쓸 수도 있었습니다. 또 아라우나도 그 땅과 소와 땔감을 다윗이 제사하는데 내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삼하 24:24에 보면 다윗이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서는 은 오십을 드려서 타작마당과 소를 사게 됩니다. 희생이 없는 제사는 드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헌신이 있는 예배,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교만에 빠져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영적인 교만입니다. 예화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봅시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이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에 나오는 소녀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이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리던 중,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돼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소녀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한국교회 신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배대신 소를 선택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영적 교만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5. 생활의 예배

어느 교회에서 여 집사님 한 명이 이삿짐을 챙겨서 교회로 왔습니다. 이 일로 교회가 떠들썩했습니다. 이유를 알고 봤더니 남편 집사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데 집에만 가면 악마 같으니 집에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교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집사는 공예배는 잘 드리는 것 같았는데 생활의 예배는 실패한 것입니다.

생활의 예배란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롬 12:1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예배란 몸으로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을 해보면 생활의 예배란 내가 죽어지고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구약식의 표현은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레위기에는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옵니다. 제물을 죽이고 죽인 제물을 불살라드릴 때 나는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합니다. 레위기는 구약 예배의 교본입니다. 레위기에서는 5대제사와 7대 절기를 다룹니다.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의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다양한 제사의 방법이 나오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의 방법을 알려주면서 그 제물에 대해서 ① 피를 쏟고 ② 가죽을 벗기고 ③ 각을 뜨고 ④ 불 위에 다 태우라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제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만든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제물을 죽이고 죽어서 바쳐진 제물을 단 위에서 불사르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또 다 불태우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완전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롬 12:1에서는 구약시대에 짐승의 몸을 제물로 삼았던 것처럼 우리의 몸을 제물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구약 제사와 롬 12장의 제사의 차이점은 구약 제사는 완전한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는데 롬 12장에서는 거룩한 산제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몸은 살아있지만 자아를 죽여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고후 2:15에 보면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죽이고 불살라서 향기로운 냄새를 나게 했는데 신약시대에는 몸은 살아있지만 내 뜻, 내 고집, 내 방식 등을 죽임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자 세상에서는 불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공예배는 있지만 생활의 예배는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산부인과 의사인 집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산모가 자연 분만을 하지 못하면 수술을 받아야하는데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에게 마취를 해야 합니다. 어느 날 의사가 수술을 받아야하는 산모에게 마취를 하기 위하여 “심호흡 하세요”라고 말했더니 그 산모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심호흡을 하지 않고 말로 “심호흡” “심호흡” 하더랍니다. 산모가 긴장하여 말로 심호흡 심호흡을 외치는 산모를 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심호흡을 하라 하시면 행동으로 심호흡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마치 말로만 심호흡을 외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말은 늘었는데 생활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우가 생활의 예배가 부족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계획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람의 반응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배입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공예배로, 그리고 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생활의 예배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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