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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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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10)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과 한국교회

오늘부터 저는 산상수훈 말씀 중 팔복을 강해하려 합니다. 저는 이 팔복의 말씀이 우리 한국교회를 향해 꼭 필요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부유해졌습니다. 강자가 되었습니다. 교회 건물이나 재산도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사업가들, 유력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예, 국회의원중 신자 50%가까이 됨). 대한민국 사회에서 신앙적으로도 이만큼 헌신적이며 열심 있는 종교 세력도 없습니다. 스포츠계나 문화계에서도 그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우승 소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심심치 않음). 사회복지 사업에서는 기독교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7-80%가 기독교 계통으로 추정),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사학법이나 정치 집회). 더욱이 이번에는 이명박 당선자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장로입니다. 이제 한국기독교는 결코 약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작년 아프간 사태를 기점으로 터지기 시작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올 년초에는 MBC ‘뉴스후’에서 세금 납부와 재산 증식, 교회세습 등에 대한 고발로 다시금 불이 붙고 있습니다. 급기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모든 신문에 MBC에 경고하는 광고를 싣기도 하였지만 일반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물론 ‘뉴스후’의 고발이 일부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에 많은 부부 치우친다는 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여전히 미자립 교회가 50%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생계에 곤란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교회 크기만 작았지 실상은 대형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미자립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모두 강자가 되길 원하고 수적인 성장을 꾀합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기독교는 강자의 기독교, 부자의 기독교가 될수록 위험합니다. 기독교의 진리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 나라를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종말의 윤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십자가는 자기부정, 희생, 낮아짐을 떠나서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가난한 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그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는 로마사회에서 공인 종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사가들은 공통적으로 이 기독교 공인 이후로 기독교는 타락의 길을 걸었다고 분석을 합니다. 그전까지 기독교는 박해받는 종교였고, 약자와 가난한 자의 종교였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순수했고 말씀에 근거한 삶과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속에서 순교하고 희생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재산이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신도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옛 이교 풍습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출세와 권력 진출을 위한 도구로 기독교를 선택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교회도 특권을 누리고 권력의 비호를 받기 시작하면서 세상이나 세상 권력자들의 논리나 욕심과 유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세의 신학자 아퀴나스와 교황 이노센트 4세간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유명합니다. 교황 이노센트 4세가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을 가득 담은 자루들이 옮겨지는 모습을 보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나, 이젠 교회가 ‘은과 금은 없어도’란 말을 하던 시대도 지나갔네. 저 보물들을 보게” 교황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말했던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이여 오늘날의 교회는 은과 금은 있지만 대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기독교를 향하여 이렇게 냉소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물로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더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나는 가롯 유다가 부럽다. 그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고 탄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팔복을 강해하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보다 팔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팔복에서 말하는 복 있는 자의 모습은 실상 예수님의 삶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애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의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난함보다는 부유함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애통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며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하기보다는 쉽게 화를 냅니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보다는 성공과 축복에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청결하지 않고 온갖 욕심과 거짓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화평의 사람이기보다는 어디가든 분란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의를 위한 핍박과 고난의 길은 피하고 편하고 쉽고 인정받는 길로만 갑니다. 팔복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 인생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중 팔복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였고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판단하기에 어떤 말씀이 더 쉽습니까? 달리 말하면 어떤 말씀이 더 받아들이기에 불편하지 않습니까?

아마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더 부담 없어 보일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처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면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위치 때문에 힘들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자기 부를 유지하면서도 마음만 비우면 된다고 받아들이면 되니까요? 그래서 학자들은 마태는 물질적 가난을 정신적 가난으로 바꾸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저도 이렇게 설교하기가 편합니다. 우리 안에는 가난한자도 있고 부한 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또한 가난이 싫기 때문입니다. 누가 가난해지고 싶겠어요. 이왕이면 부자이면서 마음만 가난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런 점에서 우리를 완전히 코너로 몰고 갑니다. 누가는 이 말씀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구석구석에서 물질과 관련된 말씀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던 것은 그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갔던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호와로이 연락하며 살던 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어리석은 부자였습니다. 반면에 삭개오는 스스로 가난해진 부자였습니다. 그는 전 재산의 절반과 자기가 잘못한 것은 4배로 갚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식으로 따지면 부유한 사람들은 구원받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지만 이 말씀 앞에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좀 불편해져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책망하고 우리는 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을 좀 더 유익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무 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편애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이 무슨 특권이라도 되어서 인가요? 아닙니다. 그가 못났고 힘들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가장 연약한 자를 향하여 시선이 가기 마련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 못사는 자식을 가장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가장 연약한 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하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고마워하십니다. 그러니 가난이 무슨 특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무슨 의인이 되거나 혁명의 주력이 된다는 식의 정치 논리는 거기서 나올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6장 24절에서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고 말씀하시며 부자를 책망하신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재물로 주변의 가난한 자를 돕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동생을 돕지 않는 부자 형에 대한 원망과 책망이라 할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였으니 우리가 일단은 마음이 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읽은 바로는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실상 더 어렵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때는 바리새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부유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성전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은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난한 사람은 곧 경건한 사람과 일치합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은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비참한 자들의 탄식입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40편 17절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이스라엘 인들은 오랜 동안 이방제국들의 식민통치 하에 살았습니다. 그들의 통치 자체는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이스라엘에게는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통치 방식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경건한 유대인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지키다 가난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가난했기 때문에 하나님만 전심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곧 경건한 자라는 등식이 성립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전통을 이어받았기에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마음은 교만하고 부유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산상수훈 말씀 안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절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비판했던 것은 그들이 부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그 마음은 사람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욕구, 아니면 명예심, 민족주의 등 여러 사상과 이념으로 그 마음은 전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실상 하나님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래요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할지라도 그 마음은 부자 못지않게 부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지 물질을 가지지 못했을 뿐이지 실제 마음은 물질에 대하 사모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우리나라도 두 종류의 사람만 있을 것입니다. 부자와 부자가 되고픈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심령까지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물질적 가난과 나눔은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그 근본 마음 자세도 그 물질적 가난을 자랑하는 마음도 없어야 한다는 정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철저한 가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오해를 살 염려가 있지만 실상은 더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난한 자가 되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건 그 목표는 하나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가난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가난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심령이 가난하다는 데서 절제의 미덕을 찾으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데서 청빈의 도를 가르치려 합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는 마음을 비우는 수양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채우려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로 채우려 합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내 안에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가 빠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세시대 수도사들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광야나 산속으로 나아갔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헌신이나 구제가 또 하나의 자기 의가 되어버립니다. 나는 이 만큼 비웠고, 나는 이 만큼 청빈하다는 자랑입니다. 그래서는 복이 되지 않습니다. 가난이 복이 되는 까닭은 내가 비운만큼 그 안에 예수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성자 성 프란치스꼬는 가난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난은 ‘모든 덕의 여왕’이다. 가난은 구원의 특별한 방법이다. 그것은 겸손의 근원이며 모든 완덕의 뿌리이며 그것의 결실은 보이지 않으나 풍성하다. 가난은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서 사야 할 밭에 감추어진 보화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가난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 하며 가난을 자기의 신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꼬와 관련된 책 중에는 『가난 부인과 성 프란치스꼬와의 거룩한 교제』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 책에서 성 프란치스꼬는 “제발 부탁하옵니다.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가난 부인은 어디에서 숙식을 하며, 한낮에는 어디에서 쉬고 있습니까? 저는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기력이 다했습니다.” 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걸으며 탁발승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왜 이렇게 가난을 사모했을까요? 그것은 청빈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가장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물질이 가난할 지라도 마음은 부요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본 훼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것이라고 할 만한 어떤 안전성이나 한 치의 땅이나 세상의 친지도 없다. 그들의 근거로 삼을 정신적 능력이나 경험이나 지식도 없다. 예수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은 철두철미 가난하다. 그들은 어리석고 바보인지라 그들을 부른 분외에는 아무것도 바랄 줄을 모른다. 예수 때문에 철두철미 결핍과 절제를 행하는 제자들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시작된다.” 철두철미 가난하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어떤 사상과 신념에 대해서도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기 신념에 강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가 기대하는 바람직한 제자가 아닙니다. 신념의 사람 또한 나름대로 행복하지만 최상의 행복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자기 신념이란 것이 얼마나 빈약하고 흔들리기 쉬습니까? 신념이란 것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바리새인의 의로 바뀌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복이 있나니

‘복이 있다’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입니다. 행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아쉬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고 시작하는 시편 1편이 바로 이 ‘아쉬레’로 시작하는데 이 시편을 헬라어 번역한 70인역은 팔복에서처럼 ‘마카리오스’ 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편이나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복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할 때는 어떻습니까? 주로 어떤 외부적 조건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보통 건강한 사람, 마음이 평안한 사람, 물질이 많은 사람, 장수하는 복을 누리는 사람, 자녀의 복이 있는 사람, 그 이름이 유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다릅니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말하는 누구입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이것은 전혀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오직 죄를 저지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인생이 복 있는 인생이라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마음을 비운 자가 더 행복하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을 더 가지고 무엇을 더 누려야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마음을 비우고 예수로 만족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행복을 선물로 주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이 선물을 천사들의 손을 통해 전달해주도록 했습니다. 천사들은 행복이라는 너무 값진 것을 인간들에게 거저 주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바닷밑에 감추려 하였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인간은 영악에서 곧 발견해 낼 거라 하였습니다. 이번엔 산 높은 곳에 놓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한 천사가 인간은 모험심이 대단해 그것도 곧 찾아낼 거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다 천사들은 최종적으로 행복을 인간의 가슴속에다 숨겨두기로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가진 것에 만족을 못하고 밖을 향해서만 나아가기 때문에 결코 자기 속에 감추어진 행복을 찾지 못할 거라 자신하면서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심령속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인간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우리 욕심을 채우려하면 한이 없습니다. 욕심을 멈춰야 합니다. 자기 수준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여기까지만이다. 비단 물질욕만이 아니라, 명예욕이나, 일에 대한 욕심, 배움에 대한 욕심, 자녀에 대한 욕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욕심을 비우는 순간 모든 것이 평안해집니다. 행복해집니다. 이때가 바로 천국입니다. 행복을 외부에서 찾지 마십시오.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좀 위험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지 않고 외형적 성장이나 숫자, 물질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서 행복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처럼 물질과 성공을 탐하니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오직 물질, 오직 성공, 오직 경쟁, 오직 성과에만 집착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생각에는 이런 생각과 욕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세상은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만 소중하고 이 땅의 삶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인들도 이런 방향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행히도 장로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이 방향의 핵심에 서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대통령이 되었기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마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보이는 것 물질에 대한 가치를 추구한다면 교회는 보이지 않는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는 정신적 가치가 소중하고 비울 때 행복하다는 것을 그들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비움, 나눔, 사랑, 작은 것의 소중함을 중요시 여겨야 하고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밝아지고 세상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보다는 그 과정이 중요하고, 도덕과 정직이 중요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숭례문이 전소된 사건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숭례문을 잃으면서 우리는 정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경제 경제 물질 물질 하다가 정신과 윤리를 잃어버린 우리 민족을 향한 경고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다른 사람에게 탓만 하는 문화가 한 사람을 방화로 이끌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과만 중요시 하는 우리 태도가 항상 문제가 발생하면 더 큰 것을 잃은 것을 그때서야 발견하고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

팔복의 구조는 각각의 복의 마지막 구절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대부분 이 약속들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진 순간 단 0.1초의 차이도 없이 천국의 복이 임한다는 약속입니다. 이는 어떤 미래적인 축복에 대한 희미한 예언이 아닙니다. 현재 찬란하게 타오르는 말씀입니다. 미래로 보류된 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해 있는 복입니다.

우리 심령을 비우는 순간 그 빈 공간으로 조금의 시간차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문을 여는 순간 들어오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우리 마음이 세상 생각과 여러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은 그릇과 같습니다. 다른 것이 가득 차 있으면 그리스도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세상의 출신, 학식, 욕망을 버려야 그 안에 그리스도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즐거움은 즉각적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기쁨을 소유하며 살아갑니다. 그가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었습니까? 갑자기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건강이 회복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외적인 조건은 변한 것이 없는데 그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마음으로부터 임합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무언가 하고자 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불만입니다. 또 그 때문에 좌절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합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욕심은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행복이 즉각적으로 임합니다. 새벽에 오줌이 가득차 있으면 얼만 불편합니까? 욕심이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오줌을 다 비우고 나면 또 얼마나 시원합니까? 천국은 그래서 마음을 비우는 자에게 임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와 집착, 분노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이런 집착을 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집착과 분노를 버릴 때 그 심령에 천국이 임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음과 무지 때문에 혼란을 스스로 자초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지혜를 품고 있으니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지금 바로 그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함으로 모두 다 이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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