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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가 더한 곳에 넘치는 은혜 (창 3:1-15; 롬 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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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가 더한 곳에 넘치는 은혜 (창 3:1-15; 롬 5:12-21)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할 때 사람들이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는 말이 바로 당신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후 태어나는 모든 자들은 원죄를 가지고 난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립니다.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다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를 하든지 하지 못하든지 이 사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고 이렇게 비참한 상황 속에 살아가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매일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불신자와 우리 성도 간에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요? 이 차이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이런 비참한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친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에서 허덕이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신분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게 된 사람, 자신의 변화된 신분을 아는 사람은 이전 자기 모습이 얼마나 죄악 되고 비참한 상황에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자기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비참했는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간증의 거리, 자랑의 거리, 감사의 거리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처해 있던 죄의 상태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구원의 은혜는 더욱 값지고 돋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지 : 나는 나의 죄를 깊이 깨닫고 예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더욱 감사해야할 예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창조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 형상으로 살게 해 주신 은혜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계속해서 우리는 교리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인간의 죄로 인한 비참함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율법에 비추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율법은 십계명으로 다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모아지는데 범죄한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이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는 성취하신 예수님의 법 안에서 율법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성상 인간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킬 수 없다. 인간은 죄의 비참함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들 속에서 불쑥 올라오는 질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지 않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범죄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비참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범죄한 후 아담에게서도 잘 나타납니다. 아담은 하와가 준 선악과를 먹고 함께 범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벗은 것을 깨닫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런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물으셨습니다.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실과를 먹었느냐? 그러자 아담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된 여자가 나에게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저지른 불순종의 죄를 하와를 주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혹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는 이런 조건들 밖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조건을 주시면 저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저지르는 실수와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 왜 저를 이정도로 밖에 만들어주지 않으셨나요? 하나님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투덜거림은 심각한 불신앙이 됩니다.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께 책임전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6문은 인간의 범죄를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악한 질문에 대하여 정확하고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죄의 비참 속에 살아갈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31절에서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심히 좋았더라. Very good”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은 물론이요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심히 보기에 좋으셨습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 바로 창세기 1장26-2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이 있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 우리의 영혼과 같은 특정한 부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과 육을 가진 우리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정의, 진리와 의로움 그리고 거룩을 추구함, 희노애락 등이 하나님의 형상에 다 포함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임무를 단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통치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도록 인간을 세우셨습니다. 인간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이런 감격을 시편 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어에서 나오는 천사라는 단어는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으로 번역되는 것이 맞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이델베르그 6문이 답하고 있듯이 인간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옳게 알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살면서 그를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의 범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심하게 파괴되고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인간은 이 영광스런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원래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고자 조각한 것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죄악을 반영하는 우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신 분이 바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 땅 가운데 드러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는 아담에 의해 부서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수리한 정도가 아닙니다. 아담의 형상보다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께 “왜 우리를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하게 만드셨나요”라고 불평하며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이 땅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는 하나님의 대사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영광스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 우리는 더욱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과 심각성을 깊이 느낄 때 우리는 더욱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대답에 불신자들은 또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어디서 온 것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해 가신다고 하니 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닌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더라도 아담이 죄를 짓도록 허락하신 분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가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일도 없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7문은 여기에 대해 답해 줍니다. 인간의 타락된 본성은 우리의 시조인 아담의 불순종과 타락으로부터 왔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상태에서 잉태되고 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룰 만한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고 악을 행할 만큼 심하게 부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거나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에덴에 데려오십니다. 그리고 그곳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짓는 이름이 동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그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명심하여야 할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산의 모든 실과는 임의로 먹되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만들지 않았어도 아담의 범죄는 없었을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반드시 있어야 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아담이 특별한 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의 모든 것을 아담에게 허락하시고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아담은 에덴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은 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요, 참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에덴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땅을 다스리는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이 하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뱀은 아담의 아내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과 아담이 세운 약속을 어기도록 만듭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게 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약속의 파기가 아닙니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창조주, 주인,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저버린 행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 보겠다는 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대리인, 청지기였던 아담은 이제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뱀의 말대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호흡만 붙어있을 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삶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요17:3). 아담과 하와는 뱀이 말한 대로 하나님처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악과 죄만을 선택하고 결정하게 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심각한 불순종과 범죄의 결과로 그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항상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롬 5:19). 어려서부터 사람이 계획하는 바가 악하게 되었습니다(창8:21).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게 되었습니다(창6:5). 그러므로 모든 책임은 우리 선조 아담에게 있으며 범죄한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범죄로 인하여 더 이상 선한 일을 행할 수 없고 악한 일을 행할 정도로 심하게 부패하게 되었다(9문).

  어떻습니까? 참으로 비참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의 상태가 그와 같았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해낼 것입니다. “말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죄를 묵인하신 것이 아니냐? 아담을 사랑하신다면 아담이 그렇게 하려 할 때 막아주셔야 되는 것 아니냐? 하나님께서 이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불만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대해서는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설명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수긍이 가십니까? 이것에 대해 수긍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수긍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우리 인생의 구주되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모든 의문과 불평을 잠재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아담의 범죄를 막아주시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일절 결함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아들을 주신 사랑에 우리는 감격합니다(롬 5:6-8).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들어왔으나 한 사람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출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 죄가 우리 안에 왕 노릇 하였으나 이제 예수님으로 출사탄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으나 이제 만왕의 왕,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 우리는 범죄자로 정죄되었으나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오늘 살펴본 죄의 기원과 책임, 죄로 인한 우리의 비참함이 모두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더 이상 우리 죄의 비참함이 불평과 투정의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비참함을 더욱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매주 모여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감사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바로 억만 죄악 가운데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지식은 세상의 그 어떤 똑똑한 사람도 자기 힘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얻을 수 없는 지식입니다. 죄의 비참 속에 허덕이는 우리 인생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아낌없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 백성, 자녀, 천국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고는 불가능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감사하게 합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대사의 신분으로 살게 하심에 감사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로 인한 우리의 비참한 삶을 찬송과 감사의 삶으로 바꾸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갑시다. 그 은혜를 묵상하고 전하고 사는 성도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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