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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요 속의 빈곤 (암 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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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의 빈곤 (암 8:11~14)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생애 가운데 행복했던 날은 엿새도 되지 않는다.” 여러분, 이 말을 누가 한 것 같습니까? 빈곤 가운데 살았던 어떤 사람의 말처럼 들릴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폴레옹이 한 말입니다. 그는 천하를 호령하던 프랑스의 황제가 아닙니까?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사람은 소유나 권세에 비례해서 행복한 게 아니다. 나도 황제보다 평민으로 사는 게 더 행복할지 모른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도 나름대로 행복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진수성찬을 먹다 보니까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흥미가 없다. 가난한 사람은 나만큼 자주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지만, 음식 맛을 느끼는 면에서 나보다 더 행복할 것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빈곤을 물질적, 육신적 차원에 국한시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고백을 들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빈곤 문제를 다 해결하고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빈곤 문제는 그 이상입니다. 그 실상을 알아야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시간 말씀을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괴롭히고 행복을 앗아가는 빈곤은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함께 살펴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 인생의 모든 빈곤에서 벗어나 진정한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1] 인생의 빈곤 문제 : 육적 빈곤보다 심각한 영적 빈곤

① 빈곤의 원인 :

빈곤의 원인은 한 마디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신의 죄, 그 언행심사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악으로 인해 다 죄인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인생은 하나님의 풍요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지만, ‘하나님의 풍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롬6:23 보면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여기서 ‘사망’이란 죄의 결과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육적인 사망’과 구별해서 ‘영적인 사망’이라 부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풍요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모든 빈곤의 근본 원인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잘려나간 나뭇가지는 아직 푸른 이파리가 달려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아름다운 꽃이 달려 있다 할지라도 ‘이미 죽은 것’입니다. 점차 메말라가고, 결국은 완전히 죽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풍요의 근본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니까 당연히 빈곤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빈곤 문제는 인간의 전 존재에 걸쳐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은 육체뿐이 아니라 영혼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2:7 보면 인간 창조의 기록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구절에 의하면 인간 창조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흙(dust)+생기(breath of life) → 육체(flesh)+영혼(spirit) → 생령, 사람(living being)” 따라서 빈곤의 문제도 육적인 빈곤(Physical Poverty)과 영적인 빈곤(Spiritual Poverty)에서 발생됩니다.

② 육적 빈곤 :

창3:17 이하를 보면 인간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육체적으로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나옵니다. 창3:17~19 “17 네가 ...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평생 고된 노동을 하고 고생하면서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범죄하지 않았다면 가벼운 노동으로 충분히 의식주를 구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고생 고생하면서 의식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육적 빈곤이고, 그 마지막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빈곤을 겪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먹거리 문제만 해도 얼마나 빈곤이 심각한지 모릅니다. 세계식량기구(FAO)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8억 5천만 명 이상이 기아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또 유엔아동기금(UNICEF)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5백만 명 이상의 아동이 매년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빈곤 문제는 저 멀리 아프리카나 북한 등 먼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전 국민의 15%인 7백만 명이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고 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도 10% 정도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빈곤의 문제는 전 세계적 문제요 전 인류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엔도 빈곤 퇴치의 날을 제정하고 전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국의 정부와 많은 단체들, 특히 기독교 단체들이 빈곤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은 주님 오시는 종말의 날까지 계속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절대적 빈곤’도 문제지만 ‘상대적 빈곤’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경제적으로 성장해서 먹고 살만해져도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부족하다 싶으면 스스로 빈곤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상대적 빈곤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눈깔사탕 하나만 있어도, 검정색 고무신 한 켤레만 있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좋은 것을 갖고도 자기가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요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용하는데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옛날에는 동네에 전화기 한 대 갖고 썼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집에도 전화기가 있고, 손에 휴대폰을 갖고 다니니 얼마나 풍요로워진 겁니까? 그래도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모양이 구식이라고 싫증내고 바꾸잖습니까? 그러니까 육적 빈곤 문제는 해결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속성 상 한이 없습니다. 갈수록 인간의 욕망이 커지므로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③ 영적 빈곤 :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육적 빈곤 외에 영적 빈곤이 있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영적 빈곤 문제를 간과하고 육적 빈곤 문제만 자꾸 해결하려고 드니까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육적 빈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적 빈곤입니다. 육적 빈곤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죠.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솔로몬입니다. 그는 왕 중에서도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가장 호화롭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전1:8 “ ...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 하도다” 육신의 욕망을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영적인 만족이 없으면 결코 진정한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영적 만족이 있어야 육적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어도 세상과 짝하며 육신의 욕망만을 채우려고 애쓰는 동안 오히려 영적으로는 더욱 곤고하고 공허했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들로 채우고 또 채워도 불만족스럽고 허무합니다. 아니, 밑 빠진 독이란 표현이 부족합니다. 마치 블랙홀(black hole)과 같습니다. 블랙홀은 우주 가운데 주변의 천체들을 무섭게 빨아들이는 공간을 말하죠. 마치 그것처럼 인간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구멍 뚫린 것처럼 허전합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명예로도 세상 향락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큰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그 구멍은 오직 하나님 한분으로 채울 수 있다.”

④ 풍요 속의 빈곤 :

그러므로 영적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육적 빈곤 문제를 해결해도, 해결하지 못해도 항상 불만족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무슨 일이 생깁니까? 육신적으로는 풍요로운데 이상하게 영적으로 곤고합니다. 이를 가리켜 ‘풍요 속의 빈곤’이라 표현해 봅니다.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빈곤한 것도 문제지만, 영적 빈곤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육적 빈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는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빈곤은 인간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노력해봤자 오히려 더 곤고해집니다.

오늘 본문 성경이 이를 증거합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이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아모스서는 북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 시대는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것입니다.(주전 767~750)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고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지만 만족하지 못한 채 더 큰 욕망을 채우려고 애를 쓰며 악한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채 우상 신을 섬기고 타락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내립니다. 곧 앗수르 제국의 침략입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무서운 심판이 있었는데, 곧 영적 빈곤이었습니다. 본문 11절 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육적 기근보다 심각한 영적 기근, 그리고 육적 기갈보다 심각한 영적 기갈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혼이 곤고하고 참 만족이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곤고함이 얼마나 큰지 그들이 채우려고 애를 써보지만, 이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12절~13절을 보시죠.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젊은 남녀도 영적 만족을 얻으려 기를 써보지만 실패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연로한 사람이나 연소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만족을 얻겠다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 신을 섬길 때 오히려 완전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14절.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사마리아의 우상은 ‘금송아지’입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국토의 북단에 위치한 단, 남단에 위치한 브엘세바 모두 우상 신 앞에 맹세하고 우상숭배를 자행함으로 그들은 영영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회복되지 못합니다.

인간이 참 이상합니다. 분명히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풍요로워졌는데 만족하지 못합니다. 심한 경우 더욱 불만족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항상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혼에 있는 큰 구멍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 소유하고 많이 누리면 행복할 것 같은데 오히려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 들어보셨죠? 한계효용체감의 법칙!(限界效用遞減 法則 Law of Diminishing Marginal Utilities)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물질이 늘어나면 오히려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파서 빵을 먹습니다. 한 개 먹고, 두 개 먹고 ... 처음에는 너무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 개 먹고, 네 개 먹고 ... 나중에는 물려버립니다. 그렇게 맛있었던 게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네로 황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하를 지배하던 로마 황제인 그에게 육신적으로 뭐가 부족했겠습니까? 그가 살던 궁정은 복도의 길이만 1마일(1.6 km)이었고, 그가 사용하던 노새와 말은 은장식 신발을 신겼다고 합니다. 낚시질할 때는 금으로 된 낚시 바늘을 사용했고, 옷은 한번 입으면 두 번 다시 입지 않고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영적으로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풍요롭기 때문에 그 한계를 절실히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는 다른 방면으로도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세네카에게 시와 노래를 배우고 온갖 풍류를 일삼았지만 채울 수 없는 영혼의 갈증 때문에 몸부림치며 살았습니다. 로마 시내 방화한 후 사태가 심각해지니까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학살을 감행하고, 나중에는 자기 어머니까지 살해하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아무리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를 추구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풍요 속의 빈곤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2] 영적 풍요의 축복 : 영생의 기쁨

그러면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만족, 참 행복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영적 풍요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기쁨을 풍성히 맛봐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큰 구멍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영혼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시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마치 전깃줄이 끊어진 것처럼,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접속되도록 그 선을 이어 주어야 합니다. 다리를 이어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입니다. 그래서 요일5:11~12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5:11~12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과 영생은 동의어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요, 하나님을 만난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우물가에 물 길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요4:13~14 “13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생수(생명의 물)입니다. 그것도 계속 솟아나는 영생의 샘물입니다. 예수님을 그 영혼 가운데 모시고 살면 그 샘물을 설치하는 겁니다. 날마다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또 요6:35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떡을 계속 먹어도 여전히 배고프지만, 다시 말하면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결국 물려버리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맛보는 영생의 기쁨은 영원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는 게 우리 생애 최고의 기쁨입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중에 「우.생.순」이란 게 있죠. 아테네 올림픽 당시 명승부를 펼친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으로 ‘우생순’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약자입니다. 정말 감격적이죠. 그런데 진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진짜 우생순’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영생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그 클라이맥스는 장차 천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계7:17 말씀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며 영생을 기쁨을 누리고, 한편으로는 천국을 소망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좀 못 가졌어도 부족해도 가장 부요한 자입니다. 고후6:10에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박진수라는 뇌성마비 장애 시인이 있습니다. 그분은 본인도 장애 가운데 불편하지만, ‘해뜨는 집’이란 장애어린이 재활교육원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그의 시 중에 「나는 부자예요」란 시가 있습니다. 한번 음미해 보십시오! “나는 부자예요. 내 말이 자유롭지 못하여도 주님과 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부자예요. 내 손이 자유롭지 못하여도 주님이 전하는 글 쓸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부자예요. 내 발이 자유롭지 못하여도 주님 복음 가지고 전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부자예요. 내 집이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주님 말씀 먹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부자예요. 천하보다 더 귀중한 생명을 가졌으니까요. 나는 부자예요. 나는 행복해요.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니까요.”

여러분, 이런 기쁨을 아시겠습니까? 예수 믿으면서 이런 기쁨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해도, 세상의 이런 저런 좋다는 것을 다 경험해 봐도 참 만족과 참 행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육적인 풍요를 너무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고 방향을 틀어서 이제는 영적 풍요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3] 영적 풍요를 누리는 방법 : 영적 갈망, 말씀 충만, 성령 충만

① 영적인 갈망 :

영적 풍요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영적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음식 이전에 식욕이 있어야 하듯이 영적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시42:1 보면 고라 자손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여기서 갈급하다는 것은 헐떡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슴이 목말라 헐떡이며 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갈망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신령한 기쁨으로 충족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말씀충만과 성령충만 :

그리고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항상 붙어 다니는 겁니다. 말씀 충만하면 성령 충만하고, 성령 충만하면 말씀 충만합니다. 마4:4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인간의 영혼은 말씀을 먹어야 만족한다는 겁니다. 렘15:16 “ ...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이 연결되어 있음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쌍둥이 서신의 병행 구절을 통해 확인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엡5:18~19 보면 ... 엡5:18~19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 영혼이 기쁨으로 노래하며 찬송하는데, 그것은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으로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묵상하시고, 늘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가 너무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크리스천들도 그런 세류에 휩쓸려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살아갈까 염려가 됩니다. 그러면 육신적으로 빈곤해도 문제, 육신적으로 풍요로워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풍요로워도 ‘풍요 속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영혼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빈곤할지라도 영적인 풍요를 누리고, 육신적으로 풍요로워도 여전히 영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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