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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이성의 실패와 성공 (수 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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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의 실패와 성공 (수 7:1-11)

내일부터 1년에 한 번씩 있어지는 제 16차 영적 전쟁이 시작이 됩니다. 전쟁이라 하여 놀라지는 않으셨습니까? 지난 18년을 달려오면서 교회가 부흥회를 대신하여 있어지는 기도 성회입니다. 함께 모여 부르짖고 함께 모여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목소리로 같은 모습으로 같은 제목을 가지고 말입니다. 아마도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처음 오시는 분들은 정말 놀라실 것입니다. 실례로 새 가족 중에 한분이 영적전쟁에 참여했다가 놀래서 내가 이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다른 교회로 가신 분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모여야 하고 왜 이렇게 부르짖어야만 하는 것인가?

영적 전쟁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에게서 해답을 찾자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문제와 씨름하지 않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사람과 얽혔을 때 사람에게 매여 허우적대기보다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에게서 해답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이 영적전쟁의 논리가 형성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해도 위로는 하나님께 받자, 누가 내게 손해를 입혀도 보상은 하나님께 받자고 말입니다. 금번 영적 전쟁의 주제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드리워져 있는 모든 문제를 환경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극복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전쟁을 앞두고 오늘 말씀가운데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아이성의 처절한 실패 앞에 너무도 놀라고 놀라 있는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를 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자신들 앞에 다가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의 실패가 다가 온 것입니다. 누구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실패요, 자신의 현실인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대로는 안되지 않니?”하고 들려주지는 않습니까? 너 더 기도해야 하는 사람 아니니? 들려주지는 않습니까? 너 이대로는 안돼 회복되어야 하는 것 아니니? 성령의 음성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들려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단을 건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여리고성을 정복한 이스라엘 군대, 저들은 곧바로 서쪽에 위치한 아이성 공략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에서 북서쪽으로 약16Km 떨어져 있고 해발 518m 가량의 산지에 위치한 인구 약 만 이천 정도의 작은 성읍입니다. 가나안의 견고한 요새 여리고성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약한 도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아이성 싸움에서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자신만만하게 여겼던 아이성을 공격하러간 삼천 명의 군대는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아이성 군사들에게 공격당하여 순식간에 서른여섯명 정도가 죽게 되고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우 도망쳐 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패배의 충격은 너무도 컷습니다. 저들의 마음이 녹아버렸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무리 이해를 해 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땅히 잘 될 줄 알았는데, 마땅히 이길 줄 알았는데,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서 여리고를 이긴 후에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있지?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여리고성을 이겼으니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처절한 패배를 맛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성 패배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성 실패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놀랍게도 아이성 패배의 원인은 천사람 만 사람이 아니라 단 한사람, 한사람의 허물이면 족했습니다. 아간 한사람의 욕심 말입니다. 여리고 성공의 한 복판에서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이미 실패는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여리고성 정복,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리라 내가 이기게 하리라 말씀하시매 여리고 정복에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은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살아있어 여리고성의 죄악의 기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밀려오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또 하나 여리고성과의 전쟁 중에 전리품을 노획하지 말라 여리고성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욕심을 내지 말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유다지파 아간, 여리고와의 전쟁 중에 눈앞에 있는 외투 한 벌과 금덩이 은덩이로 인하여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습니다. 그 욕심이 작은 것을 숨기고 말았습니다. 60만 명 중에 한명입니다. 사실 경제 논리로 따지면 별것 아닙니다. 세상의 성장주의, 앞만을 향하여 달려가는 적극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60만 명 중에 한명은 어쩌면 외면해도 됩니다.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십니까? 주님은 언제나 하나가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도 중요했지만 한 마리 양은 더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엄청난 타이타닉호는 그 배가 침몰되기에는 큰 사고가 아니라 작은 구멍하나가 침몰시켜 버리고 맙니다. 공동체에서 가정공동체, 교회공동체에서 어느 한 사람이 “나 하나쯤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 때로는 공동체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나 한사람 불순종으로 인하여 드넓은 바다에는 풍랑이 밀려왔습니다. 많은 배들이 좌초되고 많은 어부들이 시달렸습니다. 놀랍게 그 드넓은 바다에 풍랑이 밀려온 것은 천사람 만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단 한사람 요나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나 하나 때문에 우리 가정 공동체가 무너지면, 나하나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면, 나하나 때문에 국가 공동체가 무너진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나는 아니야 그리하실 것입니다. 왜 입니까? 마귀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쓰는 원리 중에 하나는 나 하나를 가볍게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 교회 안에서 나하나 열심내지 않는다고 무슨 일 나겠어? 가정에서 나 하나 몰래 살짝 죄짓는다고 무슨 일 나겠어? 내가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무슨 일 나겠어? 나 한사람쯤이야. 영적전쟁에 나 한사람쯤 참석하지 않는다고 무슨 일 나겠어? 나 한사람을 가볍게 알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오천 명이 모이든 60만 명이 모이든 언제나 무리 지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잠겨보면 나 한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됩니다. 나 한사람의 수고, 나 한사람의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가 영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나 하나쯤이야 가볍게 여기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에 전리품들을 노획하지 마라 여리고성의 것은 욕심내지 마라 경고하셨지만 나 하나쯤이야 이까짓 것 욕심낸다고 무슨 일 나겠어 아무도 모르잖아 했지만 그로인하여 이스라엘은 처절한 패배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실패의 원인 또 하나는 아이성 정복에 있어 작전이 문제였거나 인원이 문제였다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과 여호수아가 함께 어우러진 방심에서 왔으니 성경은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정탐꾼들, 사람들의 말만 듣고 인간의 상식 인간의 계산에 의한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저들은 여리고성 정복에 대하여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여리고성 이길 때는 하나님의 은혜야, 하나님이 역사 하셨어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셔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느덧 하나님은 밀려나고 자신들의 수고와 자신들의 노력 자신들의 능력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에 있어 엄청난 함정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교회가 4월이면 창립19주년을 맞습니다. 지난 19년 달려오면서 여기까지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산 빛나 교회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목사의 똑똑함도 목사의 수고도 아닙니다. 어느 한 사람만의 수고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 교회를 누구에겐가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어설픈 목사의 이야기 장로님의 이야기 권사의 이야기 이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 가정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가 인정하면서도 때로는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는 잊은 채 내가 열심히 공부했으니 내가 남보다 열심히 했으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할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적 준비에 바빠 하나님에게 물을 여유도,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때로 인간의 계산, 인간의 상식, 인간의 느낌이 우선하여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멘 합시다. 그리스도인은 계산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기보다 그냥 합니다.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액션을 취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더 서둘러 가는 것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다윗의 특징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꼭 기도로 묻는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밀려오면 그 조급함 속에 마땅히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나가서 전쟁부터 할 것 같은데 코앞에 밀려와도 하나님의 싸인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저들이 왔는데 올라가 칠까요?” “기다려라”. “네”. “올라가 칠까요?” “그래 일어나 쳐라 그들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아멘” 하고 가서 물리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은 너무 당연한 것도 기도하고 결정해 버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일을 벌려놓고 하나님 수습해주세요 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께 묻자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 말입니다. 아이들 키울 때 그들에게 신앙을 훈련시킵니다. “얘야 좋은 것 받았을 때 언제나 감사기도 하여라, 얘야 이렇게 맛있는 것 먹을 때는 언제나 감사 기도해야 한단다, 얘야 오늘도 하나님이 좋은 것 주셨지 우리 기도하자” 늘상 이렇게 기도를 가르치는데 막내 6살 때 어느 날 물 한 그릇을 주면서 얘야 물마시자 했더니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아빠’ ‘왜’ ‘근데 왜 아빠는 물 마실 때는 기도하라고 안하세요?’ ‘물 마실 때?’ 참 사람이 신기해요. 편의점에 가서 색깔이 조금 들어가 있는 음료수는 반드시 기도하고 마시고 생수는 그냥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마는 아이의 물음 앞에 ‘얘야 맞아 물도 기도해야 돼 그치?’ 그리 했지만 또 잊더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못 삽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묻는다는 이야기는 하나님 나와 함께 해 주셔야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가장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기도로 묻는다는 이야기는 내 삶에 하나님의 간섭을 원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혼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실패의 원인 또 하나는 어리석은 자만이 아이성을 우습게 본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이기고 보니 아이성이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이야기합니다. 2-3천명만 올라가면 됩니다. 그들은 소수이니 별것 없습니다. 가기만 하면 이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미 마음에서 무너져 있는 저들이 정탐이나 제대로 했겠습니까? 문제는 여리고성을 자기들이 이긴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이성을 우습게보니 정탐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도 없더라는 말입니다. 부모세대들이 정탐꾼으로 인하여 실수하여 40년 광야에서 방황했음에도 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우습게 보입니까?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혹시 여러분의 부모세대를 보면서 결혼쯤이야, 내가 저 남자 정도야 하나 못 다루겠나, 사업쯤이야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간섭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지 않아도 나의 나 된 것은 내 능력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인가 인간은 내 힘이 별것 아님을 처절하게 느끼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권력, 내가 가진 힘, 여러분 지금 한때 잘 나가니 대단한 것 같아도 진짜 별것 없습니다. 우선은 내 손에 힘 있고, 내 손에 능력 있으니 하나님 없어도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 이것을 싹 정리해 버립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고등학교만 평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생자체를 평준화 시켜 버린다구요. 지금은 저 사람이 부자고 많이 배웠고 건강하고 나하고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시간이 지나면서 평준화 시켜버립니다. 50대가 되면 제일먼저 평준화 시키는 것이 인물 평준화를 시킵니다. 이쁘니 고우니 이것은 50넘으면 의미 없습니다. 여러분 50넘어서도 이쁘냐 고우냐 하는 것은 진짜 철없는 것입니다. 진짜 옆에 한사람 있어서 밥이나 안 굶으면 되는 것입니다. 50넘어서 아무리 꾸며 보십시오. 50넘으면 인생 별것 없습니다. 그래서 50넘으면 아무리 이쁜 사람을 보고도 와~ 이쁘시네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이뻤겠네요” 이렇게 말하지요. 별것 없습니다.

60넘으면 하나님께서 지식 평준화를 시킵니다. 각자 분주할 때는 60전에 정년퇴직하기 전에는 저 사람 저거 하는 것 보면 똑똑해, 이 사람 이거 하는 것 보면 부족해 이런 것 같아도 60넘어서 정년퇴직하는 것 보면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여러분 돈만 잘 세면 삽니다. 60넘어 보십시오. 다 똑똑합니다. 한때는 학교 선생님이 제일 똑똑한 것 같아도 죄송합니다 여러분 정년퇴직하고 나면 학교 선생님, 사회 나와서 제일 답답하게 보이는 분들이 학교 선생님하고 군인입니다. 자기 울타리에서는 무엇을 이룬 것 같지만 나와 보면 인생을 다 평준화시킵니다. 60넘으면 지식 평준화입니다. 돈만 잘 세면 삽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60넘은 할머니는 절대 돈에 대하여 실수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60넘은 할머니는 절대로 돈 안 잊어버립니다. 30대 40대에는 남편 몰래 숨겨놓고 너무 잘 숨겨놓고 어디 있는지 몰라서 헤매지 60넘은 사람은 적지 않아도 누구 줄 것, 누구에게 받을 거 이것이 정확합니다.

70넘으면 건강평준화를 시킵니다. 70넘으면 아무리 대단하고 건강해도 한 순간 딱 꺽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사람이 오래 살아요? 비실거리는 사람이 오래 살아요? 오래 사는 사람이 오래 삽니다. 여러분 70넘으면 건강 평준화입니다. 건강해도 죽 먹고 약해도 죽 먹습니다. 많이도 못 먹습니다. 요만큼 먹습니다.

마지막으로 80넘으면 하나님이 재물 평준화를 시킵니다. 저 사람은 부자야, 저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 해봐도 별거 없습니다. 80넘으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 죽 먹고 삽니다. 그리고 80이 넘으면 아무리 갑부라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것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80이 넘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이에나 같은 자식들이 인감도장을 훔쳐가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안된다” 안된다고만 하지 모두 다 빼앗깁니다. 내가 나를 지킬 능력이 있습니까? 우선은 힘 있고 능력 있어 내가 살 수 있다고 착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에게 우습게 보입니까? 세상이 우습게 보인다, 아직 철이 없는 것입니다. 저도 이제 50이 넘었습니다. 존경하는 장로님들, 우리 집사님들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와도 50넘으면 딱 하나 모든 50넘은 인생들이 한 가지 고백을 합니다. “세상 내 맘대로 안돼, 세상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누라가 내 맘대로 됩니까, 자식이 내 맘대로 됩니까, 사업이 내 맘대로 됩니까, 나중에 보면 나도 내 맘대로 안 됩니다. 근데 하나님의 도움 없이 가능합니까, 우선 아무 일 없다구요 문제는 세상이 우습게 보이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이성의 실패의 원인은 누구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한사람 아간입니까? 기도로 묻지 않은 지도자 여호수아의 실수 때문입니까? 백성들의 자만입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문제는 언제나 인생들은 실패 앞에 문제 앞에 이렇게 다툰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청문회를 하며 원인 제공자를 찾아봅니다. 누구를 향하여 돌을 던질 것인가? 만여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금번에 숭례문에 불이 났습니다. 우리 모두 놀라고 놀랐습니다.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숭례문 불난 것은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다. 또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숭례문 불난 것은 이명박 당선자 때문이다.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습관적으로 누군가를 공격대상을 정하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터지면 누구 때문이야 목소리를 높여 봅니다. 죄송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가정 공동체에서 어떤 문제 앞에서도 누구 때문이야 하고 탓하고 핑계하면 지도자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아이성의 실패 앞에 누구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성의 실패 앞에 여호수아는 인간적으로 풀지 않았습니다. 아이성의 실패 앞에 여호수아는 좌절만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실패를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패 속에 젖어 자기 연민에 빠져 좌절하고 있는 것을 싫어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실패 앞에 먼저 의논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회개부터 시작했습니다. 옷을 찢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 죄가 발견되기 전입니다. 이것이 아간의 죄 때문이야 발견되기 전인데 문제 앞에 먼저 기도로 무릎을 꿇어 하나님이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내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누구 때문, 무엇 때문 매여 있는 것은 절대로 지도자가 아닙니다.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리를 하나님께서 풀어야 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실패 앞에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이성의 실패 앞에 상황을 탓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산지잖아, 운이 안 좋았어, 부하들이 잘못해서 그래, 정탐꾼들 문제야 저들이 제대로 살피지 않았어, 여러 가지 상황을 핑계 할 수 있습니다. 문제 있는 교회를 가보면 문제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문제 삼아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떤 교회도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문제없는 가정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의 문제를 문제로 삼으면 문제 있는 가정이 되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삼지 않으면 그 삶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문제를 문제로 삼으면 문제 있는 교회가 되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으면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누구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상황 탓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은 장로님 때문이야, 권사님 때문이야, 사람을 잘못만나서 그래, 부교역자 때문이야 목소리 높여 보지만 절대로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이성의 실패 앞에 여호수아는 일단은 회개를 했습니다.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무릎을 꿇어 기도하니 한 사람 한 사람 기도의 자리에 회개의 자리에 동참했으니 장로님들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 교회의 지도자 된 여러분들이여! 교회는 회의를 길게 해서 되는 교회는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살아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구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의논을 잘해서 교회가 됩니까? 아닙니다. 의논이 아니라 무릎을 꿇었고 무릎 꿇는 옆에 장로님들이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때 아이성의 실패는 극복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사 혼자 영적 전쟁을 하고 목사혼자 아무리 달려가 봐도 혼자 교회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 목사님에게 맡겼어요? 장로님에게 맡겼어요? 우리 모두에게 맡겼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마귀가 가볍게 알아 “나 하나 정도 안 해도 돼, 나 하나 정도 열심히 안 해도 돼” 그만큼 무너지는 것입니다. “나는 별것 아니야” 여러분 스스로 별것 아니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별것 아닌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목동 다윗을 보면서 “나 너하고 해야겠다”, 미디안 군대가 무서워서 타작마당에서 숨어있는 기드온을 보면서 “나 너하고 해야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내 스스로 작은 사람이고 내 자신을 별것 없어 이런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 놀랍지 않습니까? 돌이켜보면 제가 유준승 집사에게 잘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에 목사된다고 했더니 우리 형님 장로님이 “왜 너까지 목사 될려고 하냐” 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목사하고 싶다고 했어요” 했더니 형님 장로님이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건데 그때 유준승 소년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꿈에 보니까 삼촌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설교를 하더라고”. 그때는 저놈이 헛것 보았나 했습니다. 나 스스로 별것 아니야 네가 봐도 별거 아니고 내가 봐도 별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래요 하나님은 “나 너하고 해야 겠대요 너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 대요 네가 해야 한 대요”. 하나님의 일 목사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를 하다가 너무 너무 어려워서 목회를 포기해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 너무 너무 힘들다 그래서 눈물로 눈물로 깊이 기도를 했대요. 결정을 하기 위해서. 그랬더니 환상이 보이는데 보니까 목사님이 수레를 끌고 가더랍니다. 그런데 수레가 너무너무 잘 가더래요 왜 잘 가나하고 봤더니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모두 다가 밀더래요. 야! 이래서 잘 가는구나 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레가 안 가더래요. 그래서 뒤를 돌아 봤더니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이 모두 수레에 올라타고 있더래요. 그리고는 모두 한마디씩 하더래요. 우리 목사님 요새 영발이 떨어졌어, 우리 목사님 요즘 힘이 없어, 목사님 바꿔야 되겠는데.... 라고 말했답니다. 목사님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합니까. 이 모양이 우리 교회입니다 하고 6개월을 열심히 기도했더니 장로님이 내려왔대요. 그리고 또 몇 달을 기도했더니 권사님이 내려오고 또 몇 달을 기도했더니 안수집사님이 내려와서 수레를 밀었답니다. 수레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목사님이 3년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다 내려왔을까요? 그러나 지금도 타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는 장로님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회개했습니다. 아간이 죄를 지었지만 누군가가 죄를 지었지만, 자신들은 죄가 없지만 누구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가 아니라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존경하는 장로님 권사님들! 무슨 문제 앞에서든지 늘상 하나님 앞에 먼저 머리를 조아릴 줄 아는 영적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 봉사하는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여러분의 봉사보다 먼저 언제나 은혜를 공급받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 이 부분이 밀려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이성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11절 말씀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깜짝 놀라지 않습니까? 한사람 아간이 죄를 지었는데 11절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아간 그는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아간 그는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나하나 몰래 죄짓는다고 무슨 일 있겠어? 그냥 혼자만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혼자만의 욕심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 하나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여러분 아멘 해보십시오. 우리 안산 빛나 교회는 너한테 달렸다. 안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언제나 하나님은 너 하나, 여러분이 중요하고 여러분 옆에 사람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옆 사람에게 얘기해 주십시오. “당신 눈빛이 우리 안산 빛나 교회 영성입니다”라고. 여러분 살아나야 될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은혜 안에서 회복되고 충만해야 될 이유가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는 이교회 온지 얼마 안됐어. 하나님의 교회가 언제 왔느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여러분 아십니까. 교회는 가족과 똑같습니다. 회사나 일반 사회단체는 일찍 왔냐 늦게 왔냐가 중요하지만 교회는 가정입니다. 가족에게는  큰아들이 중요합니까, 늦게 태어난 막내아들이 중요합니까. 다 중요합니다. 가족은 일찍 탔냐 늦게 탔냐가 아닙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아간 한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죄를 처리하기 위해 백성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습니다.

먼저 12지파 두령들을 모아 놓고 어떤 지파에서 죄가 왔는가 제비를 뽑으니 유다지파가 뽑힙니다. 유다 지파 족장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세라족속이 뽑힙니다. 세라족속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삽디 가문이 뽑혔습니다. 삽디 가문 남자들을 다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아간이 뽑혔습니다. 여러분 아간이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여호수아야 아간이다” 라고 말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시간 걸리는 투표를, 내가 볼 때는 이틀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그 시간 걸리는 제비를 뽑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싸인은 무엇입니까. 아간아 너 회개해라, 아간아 너 와서 무릎 꿇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하나님이 점점 범위를 좁혀갑니다. 그런데 아간은 이렇게 생각 했을 겁니다. “설마 나한테 저 표가 오겠어? 아이고 나를 어떻게 알어” 하고 한쪽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숨어도 배 밑창에 숨어도 하나님이 찾아낸다는 사실을 압니까. 열심 내야 할 사람이 열심내지 않으면 열심 내게 만들고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해야 할 이유를 차근차근 주십니다.

여러분 아세요? 좁혀오는데 싸인은 무엇입니까. 아간아 너 빨리 무릎 꿇어라, 너야 너야 하는데 아간은 말하지 않고 숨어 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나 같은 거야, 설마 나 때문에, 설마 나 때문에 이 나라가 이렇게 어렵겠어? 그런데 점점 좁혀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야, 너 때문이야” 아마도 아간도 기절했을 것입니다. 나 같은게 왜? 사랑하는 여러분 안타깝게도 고백하지 않았던 아간은 전 가족과 함께 처형이 됩니다. 가족과 함께 처형되는 장면 속에서 또 하나의 음성이 무엇으로 들립니까? 원래 율법은 한 사람이 죄를 지었어도 가족이라 해서 함께 그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단 하나 죄를 묻는 이유는 가족이 공범일 때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족 모두가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는 아간 가족 전체가 이 죄에 동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 중 하나만이라도 영적이었다면, 가족 중 한사람이라도 깨어 있었다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그 욕심 앞에 어리석음 앞에 가족 모두가 동참하였다가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라도 영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러분은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교회 공동체에 기도의 파수꾼이 아니런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아니라 오늘 예배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영적전쟁에 참여하여 나라에 드리워져 있는 불신의 세력을 다 몰아냅시다. 너무너무 가슴 아파 요새는 신문도 보기가 싫고 뉴스도 보기가 싫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불신의 골이 높아져만 가는지, 우리가 뽑은 대통령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핑계합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무너져도 단단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깨어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 교회는 한쪽 구석에 있는데 우리교회가 무슨 힘이 있겠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대하게 세워 가는데 있어서 목동 다윗을 주목하듯이, 오늘 이 안산 후미진 곳에 있는 이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만이라도 기도해라, 너희만이라도 이 영적전쟁에 동참 하여라 하는 하나님의 원하심이 있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러고 보면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 하나를 우습게보게 한다, 이것은 마귀의 장난입니다.

어떤 성도가 예배드리고 갑니다. 그래서 활짝 웃으면서 “아이구 세상에 이렇게 저녁예배도 오셨습니까” 했더니 “내가 안 오면 목사님이 기다리시잖아요”합니다. 그런데도 좋은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 여러분 안에서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닙니다. “네가, 너만이라도, 너만은 무너지면 안돼”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내일 새벽 4시 50분부터 낮에는 직장가고 각자 일하다가 그리고 저녁에 7시 30분부터 하루 두 번씩 금요일까지 10번의 집회를 합니다. 말씀을 드렸듯이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방주의 비전을 이루라 맡기신 사명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새 학기를 시작하는 아이들, 그 황무지 같은 벌판에 내어 보내는 부모들이여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신 기도제목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기도 제목을 주시며 은혜의 자리에 초대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바라기는 금번 영적 전쟁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기도제목에 놀라운 역사,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 앞에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간처럼 제비를 뽑아 좁혀오는데도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 하지 말고 “나는 일어나야 돼, 나는 살아나야 돼” 하고 내가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원하심입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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