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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족함이 없는 삶 (시 23:1~2, 눅 22: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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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삶 (시 23:1~2, 눅 22:35~38)

요즘에 암이라면 모두가 떱니다. 그런데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부족병’이란 병입니다. 부족은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그래서 경험부족, 수면부족, 산소부족, 메모리부족, 운동부족, 용량부족, 물 부족, 이해력부족 등 부족이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부족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한 양이나 기분에 미치지 못함’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채웁니다. 채우려는 인간의 욕심은 때로는 더 큰 부족을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생활에는 항상 만족하게 생각하고, 자신에는 항상 부족하게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지혜에서 옵니다. 만족할 때 행복이 있고, 행복을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욕심 없는 마음 자세는 행복을 낳게 됩니다. 욕심은 그 자체가 부족을 낳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자기도취가 필요한 것은 정치가와 프로 레슬러와 여배우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도취나 과시는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낄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당당함은 오히려 아름다워 보입니다.

  성경은 두 벌의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바울도 남의 옷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족이란 두 벌의 옷을 가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 가지고도 만족하게 사는 법입니다.

  “知足不辱(지족불욕)하고, 知止不殆(지지불태)하니, 可以長久(가이장구)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족함을 알면 욕보지 아니하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만족하면 욕을 보지 않습니다. 약간의 욕심이 큰 화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2%의 부족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주 근소한 부족을 의미합니다. 2%라도 부족하면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가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이 2%를 어떻게 채울까요? 사람에게는 완전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2%는 누구나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이 2%를 채우십니다. 사람에게 100%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은사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만능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삼손 신드롬’이란 책에 보면 강한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약점이나 허점이 있다고 합니다. 강자가 가진 약점이 있습니다.

  만족이란 ‘마음에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족이란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부족입니다. 아무리 없어도 마음에 차면 넘칩니다.

  고린도후서 3:5에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부족을 채우고 만족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 때문에 부족을 채우며 늘 넉넉하게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족함을 모르는 삶의 비결은 이렇습니다.

첫째, 여호와가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3:1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합니다. 시편 23편은 가장 아름다운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주기도문 다음으로 많이 노래된 시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설정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며 공감이 됩니다. 이 시는 모든 경우에 가장 적절한 시입니다. 시편 23편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다 해당되는 시입니다. 모든 경우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시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나의 목자는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내가 나를 잘 아는 것 같아도 내가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 “목자”란 말에서 나를 먹이시는 자, 치는 자이심을 고백합니다. 나의 목자는 초장을 아십니다. 좋은 물이 있는 시내를 아십니다. 나에게 위험한 곳을 아십니다. 파리 떼가 있는 곳을 아십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이 마르면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늑대가 나타나면 지팡이로 막으십니다. 파리 떼가 머리에 붙으면 기름으로 바르십니다. 너무나 나를 잘 아시기에 부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먹을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지역은 52%뿐입니다. 인류에게 닥쳐오는 물 전쟁은 가장 심각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10년 뒤에는 물 부족이 20억 톤이 될 전망입니다. 물 부족 인구가 2025년에는 30억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목자이십니다. 그 분이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면 되는데 왜 부족할까요? 인간의 욕심이 부족하게 만듭니다. 몇몇 사람의 독점이 부족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환경파괴가 부족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풍성케 하시는 목자신데 이런 인간의 실수와 잘못이 모자라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게 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이 나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셨기에 내가 구하기 전에 아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압니다. 이름을 각각 불러냅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목자는 자기의 양과 남의 양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양을 아는 것이 목자의 본능입니다.

  저는 늘 규칙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종합건강진단 외에 제가 약한 곳을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가서 검사를 합니다. 저를 봐주시는 의사는 순환기내과에 한 분, 이비인후과에 한 분, 치과에 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선생님들은 나보다 나의 몸을 더 잘 아십니다. 입을 벌리고 들여다보면 잘 관리하는지 마구 사용하는지 다 아십니다. 내가 내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나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사람마다 몸의 구조가 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 엄밀하게 따지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다른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약점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제일 잘 아는 것 같아요 조금만 무리하면 감기에 걸리는데 꼭 목에 신호가 옵니다. 목이 약하다는 증거이겠지요? 이렇게 사람마다 약한 곳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다른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느 우울한 설교자가 숲 속으로 산책을 합니다. 설교자는 새 군사시설로 들어갔습니다. 경계 순찰하던 경비병이 설교자에게 소리쳤습니다. “정지, 누구요? 왜 여기 온 거요?” 설교자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뭐라고 하셨죠?” “당신은 누구요? 왜 여기 온 거요?” 설교자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제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는 돌아 나왔습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가 약한지,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양인 나를 목자인 그 분은 알뜰히 알고 챙기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합니다. 잠언 27:20에는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삽니다. 이 곳은 만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반면에 만족함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의 눈도 그렇습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눈을 통하여 우리 뇌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말합니다. “우리 사회는 필요를 위해선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인간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을 채워 만족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기근이 들게 하사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신 하나님이십니다(시 105:16). 그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 메추라기를 주시고 하늘양식을 내리셔서 그들로 만족하게 하셨습니다(시 105:40).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둘째, 여호와로 말미암아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35에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왜 부족한 것이 없었지요?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부족한 것이 없지요? 사람의 만족이란 물질의 양에서 오는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만족이란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을 보세요. 부자 나라들이 아닙니다. 작년에 보면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호주 옆의 작은 섬나라인 비누아투라고 합니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이런 나라들이 행복한 나라들입니다. 소유가 만족하게 하고, 행복을 준다는 말은 서구 문명의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참 만족은 여호와로 말미암습니다.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것이 참 만족입니다. 이 세상을 다 얻어도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없어도 주님을 얻으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가운데 보화의 비유나, 진주장사의 비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팔아 하나만 얻어도 만족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줘도 안 바꿀 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베드로나 마태와 같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 좋은 직장과 직업을 다 버리고 주님 한분만 보고 따라갔습니다. 신앙의 위인들과 수도사들이 그랬습니다. 세상의 좋은 직장과 직위를 버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을 따르고, 증거하고, 핍박받고, 순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위대한 삶을 살고 값비싼 만족을 얻은 삶입니다.

  지난 번 말레이시아에 가서 들은 얘기입니다. 얼마 전 말레이시아 방송가에 심한 충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아니면 지위를 얻는 것이나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인기 앵커우먼이 무슬림을 가장하고 앵커우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독교인인 것을 감추고 앵커로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녀가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올 것이 뻔한 일입니다. 결국 그녀는 방송국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에 호주로 종교적 망명을 갈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슬림의 개종은 곧 죽음입니다. 이런 위험하고 생명을 위협을 받는 일이지만 주님 한 분이 더 귀중하여 자신을 죽이는 용기가 만족입니다.

  2세기에 ‘디오그네터스 서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적힌 구절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지만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모든 것에 풍성했다. 그들은 학대당했지만 학대하는 사람들을 축복했다. 선행을 베풀었지만 행악자로 처벌받았다. 처벌받는 가운데 새 생명을 얻고 기뻐했다”. 자신의 불이익에도 여호와를 선택한 것은 이 선택이 곧 영혼의 만족이며 삶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5:10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세상의 것에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세상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다행증’(euphoria)이란 병명이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병적인 행복감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볼 때 행복의 근거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병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근거도 있고, 병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족하고 행복한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여호와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빌립보서 4:11~13 에는 바울의 위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 때문에 부족이 없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 만족입니다. 시편의 기자도 103: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결론

  만족케 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은 성경에 많습니다. 앞날이 두렵고 혼란합니까? ‘여호와라’ 즉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에게로 달려가십시오. 하루하루 먹고 입는 일을 염려하십니까? ‘여호와이레’,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너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여 있습니까? ‘여호와살롬’,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몸이 아프고 불편합니까? ‘여호와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진찰하십니다. 적진에 고립된 병사와 같은 느낌을 가집니까? ‘여호와닛시’,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모든 면에 만족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90:14에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아시지요? 신앙입니까? 열정입니까? 사랑입니까? 그 부족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부족을 다 채우고 만족하게 하여서 일생을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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