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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과 바울 (삼상 15:17-23,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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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바울 (삼상 15:17-23, 딤전 1:12-17)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본 구절은 아닌가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몇 차례 이 구절을 읽게 되었고 인상 깊게 마음에 담았던 구절이다.  여러분은 어디서 이런 좋은 글귀를 보았는지요?  다름아닌 고속도로 휴게소 공중 화장실에 붙여진 스티커였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붙여진 글귀였지만 그 의미를 적용하다 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 상황(?)은 아니기에 오히려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 향취가 있습니다.  길게 또는 짧은 기간 이 세상에 머물다 떠날 때 저마다 남기고 간 흔적들이 있습니다.  상쾌하지 못한 인간 냄새만 풍기다 떠난 경우도 있고, 떠난 후에도 사람들의 마음 속 구석구석 여기저기에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남기고 간 분들도 있습니다.  그 성격이 어떠하든 여기저기 흩뿌리고 간 냄새들이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해악이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변해도 어쩌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전혀 딴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시작은 그럴 듯 했는데 갈수록 실망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멋지게 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망을 안겨다 주는 변화도 있습니다.

우리가 금년 들어 매주일 주간묵상 자료를 가지고 개인 경건생활에 힘쓰자고 하였습니다.  1월 첫 주일부터 사무엘상의 말씀을 매일 묵상의 범위로 정하고 지금 25장을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 일에 동참하고 있는지 확인하지는 않고 있지만 꼭 함께 하기를 기대합니다.  요즘 사무엘상을 읽는 중에 사울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성경에 나오는 두 사람을 대조해 봅니다.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입니다.  성경을 잘 아는 분들은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이미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 이 사람들을 놓고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결론까지 예측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는 아직 성경에 밝지 못한 분들이 상당히 있으니 두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 몇 가지를 설명하면서 대조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BC 1010년 경에 80세의 나이로 죽은 구약의 사울과, AD 1세기에 살았던 신약의 사울은 시대적으로 1000년 이상의 긴 시간 차이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라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이스라엘 사람이며,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고,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통점이 있고 또 그것을 통해 서로 다른 결과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일진대 과연 나는 어떤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교훈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름이 같고, 출신 가문이 같습니다.  구약의 사울은 야곱의 막내 아들 베냐민의 후손들이 이룬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던 사람, 겸손하고 인물도 잘 생기고 왕이 된 후로는 강력한 리더쉽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의 사울 역시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가문에서 성장하고,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그 시대 최고의 율법 스승에게 구약의 율법을 공부한 학자이며, 종교적으로는 율법의 엄한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키며 부정한 삶과는 구별된 청결한 삶을 살기에 힘쓰면서 스스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 자부했던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자기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유능한 지도자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시작이 멋있었지만 그 최후는 비참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의 시작은 하나님 보시기에 배반과 거역이었지만 도중에 새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은 먼저 구약의 사울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우리에게도 왕이 있으면 좋겠다고 강청하여 12 지파의 사람들 가운데 제비 뽑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은 사람이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를 연 초대 임금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정 배경이나 외모의 출중함과 지도력에 있어서도 왕으로서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명령을 철저하게 받드는 효성과 순종, 그리고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보여준 겸손의 태도는 이스라엘 초대 임금으로서 적합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다만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는 모든 지파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된 사울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 사람들은 사울의 리더쉽을 인정하고 그 후로는 감히 어느 누구도 왕권에 도전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이렇게 시작을 멋지게 장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된 후 2년이 되었을 때 사울의 인생은 처음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이 벌여졌는데 출전을 앞두고 제사장 사무엘이 와서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약속한 기간에 도착하지 않고 군사들은 두려움으로 흩어지려고 하자 마음이 급해진 사울이 제사장의 고유 권한인 제사를 직접 집행한 일로 인해 사무엘로부터 ‘왕이 망령된 일을 하였습니다’ 하는 엄한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초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를 바르게 세우고 모범을 보일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함부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한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엄하게 물으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하고 다른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통보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시작으로 사울은 그 후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또 한 번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과 싸움에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 어떤 생명도 아끼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사울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 승리에 도취하여 하나님의 명을 잊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의 양과 소들 중에 좋은 것들은 남겨두고 가치 없는 것들만 진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군의 왕을 사로잡아 승전을 과시하려 했고 돌아오는 길에 갈멜이라는 곳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찾아와 ‘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아각 왕을 사로잡아왔으며 짐승들을 남겨둠으로 하나님께 악을 행하였느냐’ 묻자 사울은 ‘나는 하나님의 명을 순종하였지만 백성들이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겨 하나님께 제사 드리자고 하기에 부득이 그리하였다’는 변명을 하였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입니다.  왕이 이처럼 하나님을 버렸으니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고 무서운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책망에 사울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무조건 하나님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나를 높여 나의 체면을 세우고 하나님께 경배하게 해달라고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회개하는 태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체면과 왕권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선지자 앞에 엎드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울을 정말 외면하시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나니 사울은 그의 시작과 같지 않고 갈수록 포악한 성격과 왕권 남용을 드러내었고 심지어 악신이 들려 정신적인 질환을 앓기도 하였습니다. 

사울의 이런 변화는 점점 심각하게 되었고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린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와 인기가 높은 것을 보고 왕의 자리가 불안하여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급기야는 다윗 살해령을 내리기 까지 하였습니다.  아들 요나단을 시켜 다윗을 죽이라고 할 만큼 왕좌에 불안을 느낀 사울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의 말년은 이처럼 정신적인 불안과 포악함으로 불행하게 지내다가 끝내는 블레셋과의 전투에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갔다가 패하여 부상당한 자기 몸에 스스로 칼을 꽂아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시작은 화려했으나 그 마지막은 하나님을 떠난 비참한 생을 가리켜 성경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어리석은 삶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고 주의 일군이 되었지만 그 은혜를 망각하고 스스로 높아지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쌓는 일에 잘 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인데 그 순종을 외면하고 자신의 영광을 얻는데 우선하며, 하나님께는 겉으로 보이는 의식을 행하면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기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울의 처음 마음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울을 보면서 우리를 봅니다.  나와 우리 교회는 더 나아가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을 향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여깁니다.  비록 매몰차고 가시가 도친 비판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스스로 정결하고 정화될 능력이 없고 또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이기에 세상의 사람들을 통해 책망을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로 들어야 옳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바른 길로 돌아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의 정로를 따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공영방송과 신문 지상에서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숨 쉴 틈이 없이 몰아치는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으로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실수와 부끄럼을 무슨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내보임으로 덮으려는 듯한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것으로 드러난 부끄럼을 포장하기보다는 비판과 책망을 쓴 약으로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순종하는 자세로 변환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이 살 길이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갈멜에 기념비를 세우고 아각 왕을 사로잡아와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고, 기름진 양과 소를 가져와 재산을 늘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을 때 왕의 체면을 회복하고 왕권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왕으로서 책임져야 할 자기 잘못을 백성들에게 돌리고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지도록 붙들고 애원하였던 것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과 안위와 자리에 연연하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지도록 붙들고 매달려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옷을 찢으며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 했습니다.

한국교회와 우리 성도들은 들추어내진 교회의 부끄러움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다른 사람에 대한 핑계와 예배와 선행이라는 외형적 이벤트 성 행사들과 의식으로 포장하고 감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잘못은 시인하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 승리를 한 후에 마치 자신의 힘으로 얻은 승리인 것처럼 자기 이름을 위하여 갈멜에 기념비를 세우듯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자기 이름 내는 일에 너무 관심이 많은 듯 합니다.  목사들도 교인들도 교회와 자기 이름 드러내는 일에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황금과 명성으로 교회의 권위와 가치를 세우려고 열심 내기 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순종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과정과 방법은 아무래도 좋으니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성공과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우리가 절대로 경계해야 할 가치관입니다. 

한 주일만 지나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게 됩니다.  우리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겠지만 기독교인 대통령을 뽑았으니 교회가 큰 일 했다고 생각하거나, 예수 믿는 대통령이 나왔으니 한국교회가 힘이 있는 증거라는 오해와 착각에 빠지면 안됩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더 노출이 되고 기독교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거리가 됩니다.  믿는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면 교회가 힘을 얻고 교회에 대한 비난은 힘을 잃을 것이며 복음이 더 효과적으로 선포되리라는 기대는 혹시 초등학생들이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대통령은 공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국정을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이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불꽃같으신 눈을 두려워하는 공직자로 일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더욱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말씀이 명하는 정직한 길을 걸어야 하고, 나라와 국가의 앞날을 위하여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선량한 국민과 시민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그를 기쁜 마음으로 지지하지 않았을지라도 이제 한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함께 힘을 합하여 사회와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힘쓰는 것이 의로운 백성의 할 일입니다.  반대와 비난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앞에 선 지도자들이 바른 길로 향하도록 위하여 기도하고, 때로는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하여 곁길로 가는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을 걷도록 간언하며 책망하는 책임도 감당해야 합니다.   

사울은 그 왕의 직분이 하나님께 받은 왕권이었음을 망각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고 왕좌를 지키기에만 급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가 만 왕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영광스런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도 걷고 십자가의 길도 걷는 영광입니다.  한국 교회가 한 손에 진리도 쥐고 다른 손에 세상의 영광도 함께 쥐겠다고 한다면 두 주인을 섬기려는 인간적인 욕심이 될 뿐입니다.  만일 그 길이 옳았다면 예수께서 그 길을 걸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 영광스럽고 화려한 길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가신 영광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 길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 사람 사울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가 아름답다고 했는데 구약의 사울은 아름답지 못한 자취를 남기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나면 은혜가 소멸되어 인간 냄새만 풍기게 됩니다.  성령이 떠나버린 사람은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이름과 자리와 공적을 앞세우는 속이 빈 강정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지고 오직 사람 냄새만 남습니다.  기독교는 변화를 기대하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변하되 잘 변해야 합니다.  한 주간 주의 말씀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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