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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생활(5) (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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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생활(5) (잠 11:2)

(잠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1.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최상류 계층인 “바리새파의 최고 지도자의 집”(눅 14:1)에 초대받았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 생활면에서도 가장 바르게 산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 최고 지도자가 초청한 모임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람들도 초청되어 있었습니다. 초청객들이 저마다 상석에 앉고자 했습니다. 당시 연회석에 앉는 순서가 손님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손님은 대개 가장 나중에 도착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유대인의 연회석은 “ㄷ” 자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좌는 그 세 면의 중앙 부분으로 배정되어 있었습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하는 손님들이 자리를 잡는데 저마다 상좌를 택하는 장면을 보고 예수께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4:8-11) 결혼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상석(上席)에 앉지 말아라. 혹시 너보다 더 귀한 손님이 오면 주인이 네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주십시오.’할는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너는 창피만 당하고 끝자리로 밀려날 것이다. 너는 초대를 받거든 맨 끝자리(末席)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주인이 와서 ‘좀 더 높은 자리에 가서 앉으십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모든 손님들 앞에서 영광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높은 자리’(上席), ‘낮은 자리’(末席)에 연연하지 말고 매사에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높고 낮음은 전적으로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를 높이기도 하시고, 높은 자를 얼마든지 낮추기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들어 부유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게도 하시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기도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취해야 할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생활 자세는 ‘말석에 앉는 것.’,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이란 인생을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겸손은 헬라어로 ‘흙’(humus)이라는 뜻으로, 땅바닥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교만은 “다른 사람들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다.”(huperephanos)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에서 간교한 뱀이 하와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창3:5-6)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러한 사탄의 말에 미혹되어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과의 열매를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결국 하와는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므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탄의 유혹,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 말에 넘어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인 것을 망각하고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 넘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고하셨습니다.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피조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한 낱 죄인에 지나지 않는 인생임을 깨닫고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한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당대 가장 주목받고 있는 요한에게 ‘당신이 누구요?’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요한이 조금도 숨기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솔직하게 말하자 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 ‘나는 엘리야가 아니오.’ ‘그럼 우리가 기다리는 예언자인가요?’ ‘나는 예언자도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요1:19-27)

당대 유대 사회의 최고위층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며 권세있는 ‘외침’으로 수많은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따르는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은 결코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분, 위치,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7-11) 세례 요한은 자신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마3:3,사40:3),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소개하는 “소리”에 불과하며, “나는 그 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고백하므로 그의 겸손의 도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었던 모세는 인생을 ‘티끌’로,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는 풀’로 고백했습니다.(시90편)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0:6-8)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니라. 주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니라. 과연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느니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느니라.
하나님의 입김 앞에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시드는 인생임을 기억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겸손이며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2.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이 인류 최초의 죄악이었던 것처럼 인간에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만큼 겸손하게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가수 조영남은 겸손이 힘들다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엔 내가 최고지. 겸손 겸손은 힘들어......나보다도 잘난 사람 또 있을까 나보다도 멋진 사람 또 있을까 겸손 하나 모자란 것 빼면은 내가 당대 제일이지. 겸손 겸손은 힘들어...돌아가신 울아버지, 울어머니 날더러 겸손하라 겸손하라 하셨지만 지금까지 안되는 건 딱 한 가지 그건 겸손이라네. 겸손 겸손은 힘들어...> 그러므로 겸손은 배워야만 합니다. 겸손의 표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겸손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칼라일) 겸손을 가르치는 데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 그의 말씀과  생활, 그리고 그의 삶에 주목하고 관심을 집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의 뜻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종하신 그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대로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희생으로 섬기며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다니엘서 4장 내용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왕 느브갓네살이 하루는 무서운 꿈을 꾸고 번민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다니엘이 불려와 해몽하도록 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자신의 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의 중앙에 큰 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나무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자라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가지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과일이 주렁주렁 달렸으며, 들짐승이 그 그늘에서 쉬고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며 온 세상 사람들이 그 과일을 먹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한 천사가 내려와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 나무를 베고, 가지를 찍고, 잎사귀를 떨며, 그 열매를 흩어 버리고, 짐승들을 그 나무 아래서 몰아내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잡아맨 채 풀밭에 그대로 두어라. 이 사람이 하늘의 이슬을 맞고 땅의 식물 가운데서 짐승과 함께 살게 하라. 그가 7년 동안 사람의 마음을 갖지 않고 짐승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자들이 명령한 것이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다스리시고, 자기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나라를 주시며, 그가 원하시면 가장 천한 자도 왕위에 앉힌다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나 느부갓네살왕이 꾼 꿈이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왕이시여, 이 나무는 바로 왕이십니다. 대왕께서는 점점 강성해져서 왕의 위대하심이 하늘에 닿았고 왕의 권세는 땅 끝까지 미쳤습니다. 또 대왕께서 보시는 가운데 하늘에서 한 천사가 내려와 ‘그 나무를 베어 없애 버려라. 그러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잡아맨 채 풀밭에 그대로 두어라. 이 사람이 하늘의 이슬을 맞고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살게 하라.’고 했는데, 왕이시여, 그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것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왕에게 일어날 일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게 될 것이며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먹고 이슬에 젖을 것입니다. 그때 왕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누구에게든지 그가 원하는 자에게 나라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천사들이 그 그루터기는 남겨 두라고 명령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왕이 인정할 때 대왕께서 나라를 되찾게 될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왕이시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교만한 죄를 버리고 옳은 일을 행하며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러면 왕이 계속 번영을 누리실 것입니다.>

그로부터 12달 후에 느브갓네살 왕이 궁전 옥상에서 거닐다가 ‘이 큰 바벨론성은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 내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한 이 나라의 수도가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의 왕권은 너에게서 떠났다. 네가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누구에게든지 그가 원하는 자에게 나라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음성이 끝나자마자 느부갓네살 왕은 즉시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은 하늘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처럼 되었으며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다 지났을 때 느브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정신이 되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나라는 대대로 지속될 것이니라.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시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 뜻대로 행하시니 그의 뜻을 거역하거나 그가 행하시는 일을 물어 볼 자가 아무도 없구나! 내가 이성을 되찾게 되었을 때 내 명예와 위엄과 내 나라의 영광이 나에게 되돌아왔으며 내 신하들과 귀족들이 나를 영접하고 나는 다시 왕위에 앉아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노라.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지금 하늘의 왕,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노라. 그는 진실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이시니라.”

느브갓네살 왕은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다스리시고, 한 인간의 생사화복과 한 나라의 왕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까지도 주관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바벨론 제국과 제국의 왕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자긍하며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 순간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들에서 소처럼 풀을 뜯으며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무려 7년을 그렇게 살다가“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회개하며 천지만물과 나라 민족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이해하고 배우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짐승의 탈을 벗고, “총명이 다시 돌아온지라.” 정신이 제대로 돌아와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이심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겸손을 배우는데 7년이 걸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의 왕좌에 다시 앉게 되었습니다.

그 후 25년 뒤에 느브갓네살 왕의 아들 벨사살이 왕이 되었습니다. 벨사살은 부왕 느브갓네살이 교만하여 7년 동안 짐승처럼 들에서 지냈던 것을 직접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교만했습니다. 1천명의 귀인들을 왕궁에 불러 큰 잔치를 열고 예루살렘을 약탈하여 가져온 예배 기구들을 술잔으로 삼아 술을 마시며 우상을 숭배하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만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 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의 맞은 편 벽에 글자 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잔치를 즐기던 벨사살 왕은 이를 보고 얼굴빛이 창백해지더니, 공포에 사로잡혀 사시나무 떨듯 다리를 떨었습니다. 벽에 새겨진 글자의 뜻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벨사살 왕의 어머니 태후가 들어와 지난 날 자기 남편의 꿈을 해몽했던 다니엘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다니엘이 연회석에 들어와 벨사살 왕에 말합니다. “왕의 아버지 느브갓네살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굴다가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들에서 소처럼 풀을 뜯으며 7년을 지내다 비로소 세상 모든 나라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하나님 뜻대로 왕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신 벨사살 왕은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도, 교만하여 스스로를 높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을 숭배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예배 도구들을 술잔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글자는 바로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입니다.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왕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이 꿈 해석대로 벨사살 왕은 그 날 밤에 살해되었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에게 왕권이 넘어가고 말았습니다.(단5장) 느브갓네살의 교만과 그 결과를 직접 보고도 겸손을 배우지 못한 아들 벨사살 왕은 살해되고 나라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잠언 18:12 말씀대로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에스겔 선지자는 소돔 성 멸망의 이유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겔16:49-50)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소돔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환경이 좋아지자 하나님을 등지고 교만하고 거만하여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십니다.(욥22:29)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겸손을 배우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많은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들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시편 10:17)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붙들어주십니다.(시편 147:6)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십니다.(시편 149:6)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잠언 3:34)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잠언 13:33)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입니다.(잠언 22:4)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습니다.(잠언 29:23)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기쁨이 더해주십니다.(이사야 29:19)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십니다.(이사야 57:15)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11:2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을 배워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어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겸손을 배워 그 겸손함으로 그의 삶을 영광되게 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지 몇 해 되지 않은, AD. 59년에 그는 자기 자신을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고린도전서 15:9)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5년이 지난, AD. 64년에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베소서 3: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1년 후인 AD. 65년에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디모데전서 1:15)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갈수록 더욱 더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100년 역사 속에 유명한 백선행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세상 떠나실 때 사회장으로 치루었습니다. 이 분은 16살에 과부가 되어 자식을 키우며 삯바느질을 해서 돈 이백냥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찍 죽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묘를 산을 사서 모셔야겠다고 생각해서 친척이 나서서 산을 사주었는데, 그만 사기를 당했습니다. 나무 한 그루 살수 없는 악산(惡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망했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 때 일본사람들이 대동강에 다리를 놓기를 원했는데, 시멘트 재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돌아다니다 보니, 이 백과부의 산이 시멘트 산이었습니다. 이 산의 돌을 갈면 시멘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300냥을 주겠다고 하니, 백과부가 안파는 것입니다. 너무 싸서 안파는 가 보다 하고, 산 가격의 열배 이천냥을 주겠다고 해도 안파는 것입니다.

일본기업에서 속이 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안하길 산값의 백배 이만냥을 주겠다고 해도 안파는 것입니다. 사기는 사야 하겠는데, 이 분이 교회를 나가니 목사님 말씀을 무조건 들을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이 자초지종을 듣고 백과부를 찾아갔습니다. 왜 안팔려 하냐고 목사님이 물으시자, 과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산을 사서 백과부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 산을 사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제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니, 망한 것은 저 한사람으로 족합니다. 다른 사람까지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안팝니다 라고 하자, 목사님이 웃으며 그거 팔아서 절대 망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해서 팔라고 하는 것이니, 이만냥에 팔자고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회 세우고, 학교 세우고, 고아원 세우고, 양로원 세우고, 세상에 어느 부자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마음이 그 일을 감당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회장을 치루면서 그의 이름을 붙이길 ‘백선행 집사’라고 했습니다. 백과부의 “다른 사람이 이 산을 사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제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니, 망한 것은 저 한 사람으로 족합니다. 다른 사람까지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는 말은 마치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망하는 길이 아니라 성공과 축복의 길임을 깨닫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어 소원이 성취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한 삶이 되시며, 은혜가 풍성하고 재물과 영광과 생명, 그리고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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