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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와 화해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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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 (창 50:15~21)

오늘 저는 '용서와 화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애기가 걸음마를 하기까지는 약 1500번 넘어져야 된다고 합니다. 단번에 일어서지 못한다고 욕을 하면 그 아기는 낙심하여 영영 일어나 걷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부모 형제는 계속 격려의 박수를 쳐주고 용기를 주어야 어린아이는 넘어져서 또 일어나고 일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가지 일에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약 21번의 실수를 통해야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 중에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면 결코 성공을 바랄수가 없습니다. 자연도 산불로 새까맣게 타버린 산천을 용서하고 화해하여 다시 나무가 자라고 풀이 돋아 복구되는 것을 우리는 항상 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도 말할 필요 없이 용서하고 화해하여 새 출발을 해야만 합니다.

1.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나?

첫째로,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느냐 그런 질문을 할 것 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되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요, 의무요, 특권인 것입니다.
아담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에게 참 평화와 행복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 영화를 가지면 행복할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가짜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는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 22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악인인데 악인에게는 마음에 평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셔서 우리 죄악을 담당하셔서 청산해 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까?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용서를 받고 용서를 받아야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앞서고 화해는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원죄와 자범죄가 태산같이 높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되는데 죽어 버리면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죄 없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영원한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다 갚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한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영원히 청산되고 만 것 입니다. 이제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으면 주님이 죄를 말갛게 씻어주시고 죄책에서 해방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은 한없이 큽니다.

비누를 쓰면 미국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인종이나 몸에 때가 묻어 더러워진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똑같이 씻어주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비누가 사람 차별하는 것 봤습니까? 예수님의 보혈도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동서양 죄인, 의인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죄를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다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씻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얼마나 의롭게 되느냐. 하나님처럼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양이시면 우리도 태양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힘으로 능으로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처럼 의롭게 된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그 보혈로 씻음 받으면 부끄럼 없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처럼 의롭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의 수양이나 도덕이나 노력이나 고행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의롭게 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 비교하면 걸레 썩은 냄새가 나는 의밖에 않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처럼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19절에 보면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께 나가서 화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케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느니라."

죄를 용서하면 그 다음 화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해주고 화목을 않으면 냉기가 도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다음에도 한편이 잘못했다고 화해를 하면 용서해 주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옛날로 돌아가서 화기애애하게 서로 받아주고 사랑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해도 나는 화해는 못한다 하면 이건 안되지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죄 용서함 받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내 친아버지가 되는 나는 친 자식이 되고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고 주님이 우리속에 들어와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와 더불어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 앞에 설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보혈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또 우리가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어느 한 교회에서 먹지 못해 굶어 죽은 세 살짜리 여아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쌍한 아기의 장례식장에 남루한 옷을 입고 충혈된 눈으로 찾아온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사람들이 기도하는 틈에 죽은 어린 아기의 신발을 벗겨서 훔쳐 도망을 쳤습니다. 그 신발을 팔아 가지고 술을 퍼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죽은 아기의 아버지였습니다. 20년 후, 시카고의 한 교회에서 수 천 명의 성도들 앞에서 한 사람이 눈물로 회개하며 간증했습니다.

"저는 20년 전, 제가 돌보지 않아 굶어 죽은 딸의 장례식에서 아기의 신발을 훔쳤던 파렴치범이었습니다. 그런데 벌레만도 못한 저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용서하여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시카고의 유명한 부흥사인 멜 트라더 목사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는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면 이렇게 파렴치한 죄인도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오히려 주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귀한 직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자기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했으면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와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자기가 너무나 못나 보이고 밉고 탄식스러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 너무 싫을 때가 있지요? 저도 72세를 살면서 내가 미울 때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얼굴 꼬락서니 보기도 싫고 내가 미워서 세수할 때 얼굴도 안쳐다보고 세수만 하고 얼굴을 닦았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하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질 때 극히 불행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않고 자기와 화해하지 못하면 이런 불행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하고 자연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아요. 한강에 투신 자살하려고 뛰어가는 사람보고 "네 이웃을 사랑하세요. 네 이웃을 사랑하세요."하면 "너나 사랑해라!"고 할 것 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자기를 따뜻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처자도 사랑하고 남편과 자식들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은 자기를 미워해야지요. 회개하고 주님의 백성이 된 자기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으니 자기도 용서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준 사람을 왜 자기가 미워할 수 있는 것입니까? 왜 자기가 용서해 줄 수 없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 받았으면 그 다음 아무리 과거에 자기가 못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빠진 자화상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을 용서하고 자기를 화해하고 자기를 끌어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9장 17절에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고 하셨으며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화해하고 자책을 그치고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10년, 20년 전에 지은 죄를 지금도 회개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다 하고 난 다음에 용서했다고 할렐루야 하고 그 다음 또 하나님께 업드려 또 회개를 하고 또 용서해 달라고 할렐루야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회개하면 그로써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가 자백되면 한꺼번에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를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하도록 하는 것은 마귀가 양심에 가책을 자꾸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꾸짖는 것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한번 성령이 꾸짖었으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짖으면 당장 용서를 받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때가 많아도 비누로 한번 깨끗이 씻으면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인 것입니다. 깨끗이 씻고 난 다음에도 "나는 때있다. 때있다. 때있다."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한번 씻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와서 자책감을 주고 또 와서 자책감을 주면은 그것은 성령이 하는게 아니고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양심의 가책을 그치고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잘못한 것 후회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책은 하지 말고 후회를 하는 것은 반성을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 안하겠다. 다시는 나쁜 일 안하겠다. 다시는 도둑질 안하겠다. 다시는 방탕하지 않겠다. 후회를 해야 반성을 하는 것이지요. 자책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책은 자기비하를 가져와서 점점 더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너는 못났다. 이 죄인아. 이 병신아. 이 죽일 놈아. 너 같은 놈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마귀는 자책감을 가져와서 짓누르므로 완전히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이 자책인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후회는 반성하는 기회를 줍니다. '아~ 내가 그때 잘못했지.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것은 후회는 해도 반성을 하기 때문에 좋지만은 자책감은 우리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기쁘고 즐거운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늘 가슴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이 효과가 큽니다. 한번 용서받으면 영원히 용서받은 것입니다. 한번 회개한 죄는 다시 범하지 않는 이상은 회개하지 마시고 감사하시고 찬양하시고 후회는 하시고 반성은 해도 자책은 하지 말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주홍 같은 죄가 눈같이 되고 진홍 같은 죄가 양털같이 되는 것이니까 없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번 자복하면 그 다음으로 청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그 죄 들춰내는 것은 마귀의 참소지 성령이 회개시키는 운동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회개한 죄는 영원히 씻음 받고 사라진 것을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과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으면 이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외과 의사 선생님의 간증을 들어 보았었습니다. 그 의사선생님의 간증에 보니까 한 여자가 왔는데 진찰을 해보니까 유방암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어떤 병을 앓았는가 물어보니까 그는 제일 먼저 갑상선 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간암에 걸려서 또 수술했습니다. 또 얼마 안 있어 자궁암에 걸려서 수술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방암에 걸렸습니다. 암백화시장인 것입니다. 백화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이 "당신 지금 유방암을 수술해도 소용이 없어. 또 다른 암에 걸릴 것입니다. 이 암은 몸이 나빠서 암이 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무슨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남편은 북한에서 내려온 혈혈단신 피난민이었는데 그와 내가 결혼을 해서 우리는 잘살아 보겠다고 건축 노동장에서 시장에서 온갖 장사란 장사는 다 했습니다. 그래서 집도 조그마한 것 하나 마련하고 남은 돈은 중견 건축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그만 부도가 나서 사장이 달아나고 돈을 다 날리고 있는 집도 빼앗기고 단칸방 월세집에 들어가서 나와 우리 남편과 애 둘을 데리고 사는데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너무나 미워서 이가 갈리고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 남편은 탄식하고 늘 울고 고통을 당하다가 혈압이 높아져서 뇌일혈이 걸려서 지금 중풍병자가 되어서 집에 드러누워 있고 학교 다니던 두 아들 딸은 학교도 못가고 그 비좁은 자리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 나의 마음이 갈갈이 찢어지고 원한에 사무치고 이가 갈리고 그 건축회사 사장을 만나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이 말하기를 "그것은 사람이 마땅이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만 당신이 그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이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암을 유발합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갑상선암, 간암, 자궁암, 지금 유방암까지 걸린 것은 마음에 그 곪은 것이 터져서 암으로 나온 것이니 먼저 용서해 주고 난 다음에야 수술해도 소용이 있지요.

그러면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암 수술을 하고 난 다음에 후유증이 있어서 그것을 고치겠다고 약을 한주먹씩 매일 마다 먹어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시켜서 회개를 시켰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를 회개시켜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만들어 주었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 여자가 다 자기를 망하게 한 원수들을 용서하고 미워한 것을 회개하고 비로소 얼굴에 웃음을 찾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이만큼 먹던 약을 다 그쳐 버렸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의사 선생님이 유방암을 수술했는데 깨끗이 나아 버리고 이제는 건강해서 찬송을 부르며 산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원망, 시기, 질투, 분노, 좌절 절망 같은 것은 마음에 생겨난 무시무시한 종기인 것입니다. 이 종기가 자라므로 말미암아 육체에 여러 가지 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를 반드시 수술해 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용서하지 아니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남에게 대해서 미움을 가지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좌절하면 그 사람은 내 영향력을 받지 않지만 내가 좌절하고 병이 들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예수님 이외에는 완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저 사람이 완전하지 못하느냐 하는데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의롭게 되라고 나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 이상 저들도 죄인이고 내가 용서받은 이상 저들도 용서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과 화해해야 내가 행복 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눈과 하나님이 보시는 눈은 다릅니다. 우리가 볼 때 고약하게 보아도 하나님이 고약하게 안보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정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외면을 보지만 하나님은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재판관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식들을 재판하는 재판관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아내가 남편과 자식을 재판하는 재판관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도 목사가 성도들을 재판하는 재판관이라고 생각하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재판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자기 속에 있는 대들보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재판관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졸업장을 받으러 나오면서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총장에게 졸업장을 받고 악수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려갑니다. 거기에 참석했던 학부형 한 사람이 혀를 쯧쯧 차면서 "요사이 애들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졸업식 날 대학 총장 앞에서 건방지게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고 악수도 안하고 그냥 내려가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 옆에 서있던 재학생이 "선생님, 쉽게 비평하지 마십시오. 저 학생은 우리 학교에 모범이요, 우등생입니다." "그러면 왜 건방지게 한손으로 졸업장을 받고 한손으로 악수도 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한손이 없습니다. 외팔입니다. 못쓰는 의족 나무 팔을 가지고서 어떻게 졸업장을 받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손은 포켓에 집어 놓고 한손으로 졸업장을 받고 나갔습니다. 오해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얼굴이 새빨게졌습니다. "내가 사람을 너무 가볍게 봤구나. 외모로 보고 그 진실을 알지 못하였구나." 그는 후회하고 회개했다는 말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찰스 스윈돌은 우리가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일곱 가지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다. 둘째, 우리는 그 동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셋째, 우리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넷째, 그 상황에 있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섯째,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여섯째, 우리에게는 편견이 있고,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일곱째, 우리는 불완전하고 일관성이 없다. 이런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우리는 재판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중심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요, 틀림없는 판단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만물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이웃을 심판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웃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자신을 재판관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7장 4절로 5절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6장 14절로 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스탠리 존스과 노만 필은 사람의 마음에 미움과 원한이 있을 때 정신과 육체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주는지를 실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한 부인이 평소 건강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오른 팔을 올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단을 해보니 그녀는 친정어머니와 오랫동안 같이 살았는데, 하도 친정어머니가 잔소리를 많이 하고 간섭을 많이 하기 때문에 수없이 친정어머니 뺨을 후려 때리고 싶은 생각이 나서 오른팔이 저렸습니다. 그런 생각을 오래 계속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오른손이 마비가 되어서 오른팔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팔 병신이 되었어요. 그래서 목사님 앞에 나와서 상의를 하고 진단을 하고 어머니를 미워서 때리고 싶은 마음이 화근이 되어서 팔이 마비되었으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화해하고 난 다음 그 손이 팔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는 1천 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한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른 대학교에서는 276명을 대상으로 연구 조사했는데, 평소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이 감기에 걸릴 확률도 4분의 1 정도로 줄어든다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면 건강하고 면역성이 강해져서 병도 잘 안 걸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장수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와 화해는 우리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4. 얼마나 용서해야 하나?

그러면 네 번째로, 우리는 얼마나 용서해야 됩니까?
한없이 용서해야 됩니까? 고약하게 구는 남편을 얼마동안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까? 바람피우는 아내를 얼마동안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까? 부모 말을 안 듣고 방탕 하는 자식을 얼마나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까? 나에게 가시노릇 하는 이웃을 얼마나 용서해야 됩니까?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합니다. 한없이 용서할 수도 없고 어찌할 수 있을까요? 내가 예수님 믿고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 몇 번이나 용서 받았는지 계산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주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몇 번입니까? 헤아릴 수 없지요? 한평생을 살면 수 만 번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이 용서해 주었었습니다. 나에게는 관대하면서 이웃에게는 관대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무공해 지대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도 죄지었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죄악의 공해지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부패와 부정과 죄악의 유혹에 꽉 들어찬 죄악의 공해지대에 살기 때문에 여기에서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에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여러분 이 공해가 심한 죄악 속에 살면서 다시는 죄를 안 짓는 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찬을 마치고 난 다음에 허리에 타월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으면서 베드로에게 오니까 베드로가 "나는 주님에게 발을 못 씻깁니다." 주님이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 "그러면 내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한번 깨끗이 목욕한 사람은 다 깨끗하다. 발은 씻어야 된다."고 했어요. 한번 예수 믿으면 깨끗하게 구원을 받았으나 행위는 늘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발은 더러워지니까 자꾸 씻어야 되는 것입니다. 발은 행위니까 행위는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먼지와 티끌이 많은 세상에 안 더러워질 사람이 누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발은 더러워지니까 행위는 늘 회개하고 용서받고 남도 늘 용서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로 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의 횟수를 얼마나 할까요? 하루에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지요. 예수님은 칠칠에 사십구. 490번 용서하라. 아예 작심하고 죄를 지어도 490번 못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이 내게 잘못하면은 490번 잘못해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용서하기로 작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죽으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우리를 영원히 용서해 주고 마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 못 받지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늘 용서받는 것입니다. 용서는 이미 영원히 주어졌는데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밥을 줘도 안 먹겠다고 거부하는 사람 먹일 수 없잖아요.

그러나 내가 회개만 하면 얼마든지 주님께서 용서해 줄 작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다고 야~ 오늘부터 마음대로 죄짓고 회개만 하자. 그렇게 이용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의 선하심을 악하게 이용하면 그 회개는 진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정말 내가 세상에 살면서 어찌할 수 없이 불가피하게 심신이 더러워진 것은 회개하면 되지만 주님의 사랑을 악용해서 그것을 이용해서 마음대로 죄짓고 또 회개하면 되지. 나중에는 주님께서 회개할 수 있는 영을 부어주지 아니하시면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서 회개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이 언제나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은 얼마든지 용서를 받습니다만 가짜 회개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위대한 용서와 화해

다섯째로, 우리는 위대한 용서와 화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을 보십시오. 부친 야곱이 죽은 후에 형제들이 말을 지어서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말 안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러나 저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죄책이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방파벽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세상 뜨니까 이제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할 것이다. 마음에 겁이 털컥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유언을 조작해서 요셉에게 가서 말을 합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 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 50:17)

왜 울었느냐. 얼마나 겁이 났기에 저렇게 유언을 조작해서 내게 말하느냐. 요셉이 다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그들이 두려워서 떠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겼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8~21)

위대한 용서와 화해인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10년간 종살이하고 3년간 감옥살이 했으니 이가 갈리고 온 마음에 한이 맺혔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줄곧 그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형들을 용서하고 마음으로 화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이 건강하게 살아났지 원한을 품었으면 감옥에 병들거나 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용서하고 늘 화해했던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지은 죄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나중에 요셉 앞에 엎드려서 통회했지만 요셉은 이미 용서해 주고 화해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용서하고 화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해를 가하여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주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는 능력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여러분이 고통을 당할 때 언제나 긍정적으로 주를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심히 고통스럽고 괘씸하고 괴로울 때 여러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 이러한 사람을 보내어서 합동하여 선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군요. 악을 변하여 선으로 만드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성경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밥상을 차리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으니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가 안 오면 밥상도 없는 것입니다. 진수성찬 먹고 싶어요? 그러면 원수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겁니다. 원수가 안 오면 진수성찬 펼 수가 없지만 원수가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진수성찬 차려서 먹고 기름을 부어서 높여 주시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 원수가 안올 때는 편안하고 좋고 원수가 오면 마음이 압박을 받긴 해도 오히려 진수성찬 차려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높여 주시고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것이니까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으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부흥사 빌리블레이는 이전에 권투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과거 권투 시합에서 자기에게 늘씬 얻어맞고 패배한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악수하는 척 하면서 이 빌리블레이 목사를 후려 갈겼습니다. 한 대 얻어 맞고 빌리 블레이 목사는 땅에 엎드려 졌습니다. 일어나서 얼굴을 싸매면서 "과거에 내가 권투시합에서 너를 때려서 네가 졌지? 그래서 복수하고 싶어서 나를 때렸는데 마음이 시원하지 않거든. 한 대 더 때려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하나님도 이미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니까 침을 딱 밷고 욕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얻어맞은 빌리블레이 목사는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는데 때리면 마음이 시원할 줄 안 이 사람은 마음이 고통스러워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얻어맞고도 왼뺨을 돌려대면서 성이 안차거든 더 때려 달라고 하는 그 눈 속에 평화가 넘치는 것을 마음속에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블레이 목사님의 교회 예배에 참석해서 회개하고 그는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대 얻어맞고 다른 사람 영혼을 구원했으니 좋지 않습니까?

요셉은 형들의 죄를 모두 용서했습니다. 비록 자기를 꽁꽁 묶어 빈 구덩이에 던졌다가 남의 집 종으로 팔았지만 그 모든 것을 용서함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되고, 이후 그의 민족도 보살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했기 때문에 총리가 되었지요. 형들이 안 팔았으면 총리 안됐지요. 형들에게 팔리고 종살이하고 감옥살이 할 때는 기가 막혔지만 그런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수성찬 차려 주시고 기름을 부어 높여 주시고 잔이 넘치게 해주신 것입니다. 언제나 행복과 축복은 우연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고통 뒤에 행복과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감사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람에게 나중에 하나님이 축복의 진수성찬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반항하면 아무 진수성찬도 없고 거기에서 파탄에 이르고 말 것인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하면 자기 마음을 치료하고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원한은 미움은 독소를 뿜어 인격과 건강을 파괴하지만 마음을 치료하고 평화롭게 하려면 용서하고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원한을 품으면 이것이 무서운 독이 되어서 내 몸 전체를 파괴하고 내 인생을 파멸에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마음에 큰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언서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 장가가는 사람 인물 좋고, 재산 있다고 좋다고 시집, 장가갔다가 나중에 싸움하고 미워하고 마음에 평안함 얻지 못하고 이혼하는 사람 많습니다. 사람을 볼 때 돈이나 인물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 됨됨이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늙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받아 줄 수 있는 그런 넉넉한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 재산은 없더라도 편안하고 기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재산과 지위나 명예가 행복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대통같이 좁아서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줄 모르면 고통과 괴로움만 꽉 들어차고 행복은 날개치고 날라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이는 어떤 일에도 행복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행복의 기초는 평안인 것입니다. 평안은 용서하고 화해하는데서 다가오지요. 미워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곳에는 평화가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치유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지 않는데 서로 인간관계가 개선될 수 있습니까? 한없이 용서하고 화해하십시오. 남편을 한없이 용서하십시오. 아내를 한없이 용서하십시오. 자식들을 한없이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화해하십시오. 그 길만이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로 14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에베소서 4장 32절도 같이 읽어 보십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한없이 용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예수 믿으면 예수님 안에서 이웃을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우리 자신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서로 훌륭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화해의 악수"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미국의 부통령을 역임을 했던 험프리 의원의 장례식에 있었던 일인 것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미망인의 옆자리에 놀랍게도 평생에 그의 정적이었던 닉슨 대통령이 앉아 있었습니다. 험프리 상원의원은 병이 들어 죽기 전에 그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정치인으로 있을 때 닉슨 대통령에게 너무나 고통을 갖다 주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눈을 못 감겠으니 제발 우리 목사님에게 부탁해서 닉슨 대통령을 만나서 내가 회개하고 눈을 감게 해달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사흘 전에 그가 다니던 교회의 잭슨 목사에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죽기 전에 닉슨 대통령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제가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잭슨 목사는 이 말을 닉슨 대통령에게 전했고 이에 닉슨은 급히 비행기로 달려와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험프리의 손을 마주잡고 화해하고 험프리가 눈을 감을 때 평안하게 웃음을 가지고 세상을 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하였고, 요한일서 3장 15절에 요한 사도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은 죄 중에 잉태되고 태어나서 죄의 공해로 가득한 세상에 삽니다. 우리는 먼지와 티끌을 덮어쓰고 살기 때문에 항상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속사람도 항상 하나님의 용서와 자기 자신의 용서와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완전하고 세상이나 이웃의 재판관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한 목사가 '용서'라는 제목으로 쓴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시구 끝 부분이 특별히 제 마음을 감동 되어서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쓴 뿌리는 독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상대를 닮아가게 되고 자신조차 미워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는 자신이 받습니다. 세상엔 용서하지 못할 사람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용서하지 않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먼지와 티끌을 덮어쓰고 살기 때문에 항상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속사람도 하나님의 용서와 자기 자신의 용서와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살아야만 참된 행복과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세상은 가시밭이요, 흑암이요, 배설물 웅덩이요, 오직 좌절과 절망과 슬픔만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보혈 앞에서 영원히 용서받은 우리들은 영원히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자기를 재판관으로 알고 자기중심의 척도를 가지고 남을 평론하고 비평하고 살아온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다 허물이 많고 죄가 많은 사람인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영원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발이 더러워지면 하루에 490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깨닫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자신도 용서하고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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