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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창 41-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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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창 41-42장) 

오늘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시며 당신님의 뜻을 조용히 이루고 계셨습니다. 1-4절을 보면, 요셉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죄를 범했습니다. 바로는 그들을 경호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었습니다. 마침 그곳은 요셉이 갇혀 있는 곳이었고, 경호대장은 요셉에게 그들을 시중들게 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욕보이려고 했던 노예를 당장 죽이지 않고, 감옥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밀한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옥에 갇힌 두 관원장들은 하룻밤에 서로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5). 아침에 그들의 얼굴에서 근심스런 빛을 발견한 요셉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8)라고 합니다. 간단한 이 한 마디의 말 속에서 요셉이 어떤 자세로 감옥 생활을 했는지 보여줍니다. 요셉은 억울해서 손에 아무 일도 잡히지 않는다며 신세 한탄하거나 대충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색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기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자기 처지도 코가 석자지만 그들을 돕고자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라는 그의 대답은 그가 감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드러내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지속적인 교통은 요셉이 어느 곳에 있던지, 어떤 때에든지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듣고 사흘 안에 복직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12). 그 일을 확신했기 때문에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고 부탁했습니다(15-16).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듣고는 사흘 안에 처형될 것이라고 해몽했습니다. 이왕에 죽을 사람이고 “그 해석의 길함을 보고” 해몽을 요청한 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로 해몽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요셉은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 요령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에 요셉은 이년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삼일 후 바로의 생일에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습니다(20-22). 하지만 성경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23)고 기록합니다.

요셉이 술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그가 복직되면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체로 누구든지 마음에 억울함이나 답답함이 있으면 사람을 붙들고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격에 따라 아무나 붙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를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만 속을 털어놓는 사람도 있는데, 여하튼 그러한 일들은 공통적으로 잠시만 위안을 줄 뿐입니다. 요셉 역시 한 가닥 희망을 가졌지만 그 희망은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성경이 반복해서 가르쳐주는 진리 중 한 가지는, 사람이란 의존할 대상이 아니는 사실입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하면서 자식에게 기대는 부모는 대부분 깊은 실망을 맞봅니다. 사람은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섬겨주고 그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섬겨주었다고 뭔가를 기대하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기대할수록 실망을 넘어 낙망과 절망을 맛보게 됩니다. 보답을 바라는 마음은 상대방에게 큰 부담감을 느끼게 해서 관계만 악화시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있다고 고백 했다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을 전달했을 뿐임도 생각해야합니다. 받을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영광과 감사를 받아야 하지 요셉이 아닙니다.

요셉의 감옥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범이 될 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기 원하는 그릇이 되려면 좀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끔 사람도 의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 의존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좀 더 연단되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이년 더 감옥 속에 두셨습니다. 요셉에게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나날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단지 연단을 위한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려는 계획을 수행하시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요셉은 단지 보디발의 집에서 자기 몸 하나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상상치 못한 훨씬 원대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를 통해 애굽과 당시 근동 지역의 세계를 구원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 속에서 요셉이 성장하기까지 인내하셨습니다.

만 이년 후에 바로가 연속으로 꿈을 꾸었습니다(41:1-7). 아침에 바로는 마음이 뒤숭숭하여 애굽의 마술사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들였지만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8). 그제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추천합니다(9-13). 바로는 즉시 요셉을 불렀습니다.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15). 요셉이 대답했습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바로는 꿈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했고, 요셉은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며 그 꿈이 일곱 풍년과 일곱 흉년을 예고하는 것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조언했습니다(32-36).

여기서 이년 전과는 달라진 요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은 더 이상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할 뿐이고,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도울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바로에게 조언하고 그것으로 끝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자기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소연하면서 풀어주도록 바로에게 기대지 않았습니다. 이년의 시간동안 요셉은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철저히 하나님만 의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꿈을 해석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에 합당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공으로 돌리고 하자기 공로를 전혀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자 바로와 그 신하들조차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요셉의 제안을 좋게 여길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은 근거없는 엉터리 해석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그 신하들에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38)라고 하였고,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39-40)고 했습니다. 요셉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애굽 총리가 되어 칠년 풍년의 때에 곡물을 거두어 각성에 저장하도록 다스렸습니다(47-49).

바로와 그 신하들이 요셉을 좋게 여긴 것은 단지 요셉이 꿈을 잘 해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셉이 그 꿈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제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로 행정 업무를 보았었고, 감옥에서도 간수를 대신하여 행정 업무를 보면서 그 역량을 길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지금 내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가운데 요셉은 큰일에도 충성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갔습니다. 총리의 직무를 맡겨도 하나님 백성답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13년 동안 요셉의 신앙적인 측면과 업무처리 능력이 성숙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요셉이 꿈만 해석할 줄 알고 행정 능력이 없었더라면 잠시 총리자리를 차지했더라도 금방 목이 달아나고 말았겠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이처럼 은혜를 감당할 수는 그릇이 된 후에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준비시켜서 쓰시지, 준비되지도 않은 사람을 쓰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꿈과 해석의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정리해 봅시다. 바로의 꿈은 어떤 인간의 술수와 지혜로도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은사를 요셉에게만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꿈을 듣는 즉석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었고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은사는 ‘꿈’이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던 시절에 필요했던 은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성도들은 계시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모든 뜻이 성경으로 기록된 시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꿈을 꾸고 그것을 해석할 은사가 필요치 않습니다. 육감이 예민한 사람들이 어떤 꿈을 계기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생각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것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제 모든 꿈의 해석은 자기 생각의 반영이며 그럴듯한 추측일 뿐이고,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확인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준비된 자가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당시 애굽의 풍습을 따라 “사브넷바네아”로 고치고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주었습니다(45). 여러 가지 환경이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 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51-52). 어떤 괴로움은 잊히지 않고 마음에 남아서 계속 괴로움을 줍니다. 요셉은 괴로움을 잊을 수 있는 것도 은혜로 여겼고, 수고한 결과로 창성하게 되는 것도 은혜로 여겼습니다. 그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노예로 살던, 죄수로 살던, 총리로 살던 은혜를 알고 언제나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참으로 은혜의 삶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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