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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중에 넘치는 기쁨 (살전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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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중에 넘치는 기쁨 (살전 3:1~10)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쉽게 내 마음을 다 열어 보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방이 그대로 받아들여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는 하지만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또 표현하기에 따라서 나는 이런 뜻으로 말했는데 상대방은 저런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같은 말을 해도 조금 퉁명스럽게 말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상대방은 그 말을 들을 때 호의적으로 듣기보다는 내게 무언가 불쾌한 마음이 있어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로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내 표정과 말이 전혀 다르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성격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어려운 말도 아주 쉽게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쉬운 말도 아주 어렵게 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말을 빨리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말을 너무 빨리 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될지 상당히 혼란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웃어야 될 상황에 울 때도 있고 그 반대일 때도 있습니다. 누구는 흥분하면 더 침착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흥분하면 오히려 말을 전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표정만으로 다 알 수 있다면 좋겠는데 또 표정이라고 하는 것도 감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철저히 속으로 갈무리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어떤 때는 같은 말을 심각하게 하기도 하고 가볍게 하기도 합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가운데 온전히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다른 사람의 일에는 이렇게 저렇게 중재를 잘 하는 사람도 그것이 자기 문제가 되면 오히려 더 흥분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 말 좀 들어보라고 하면서 중재에 나서기도 하면서 자기 일에는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뒤늦게 일이 커지고 난 다음에야 수습해보려고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상황을 어렵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듣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라는 말을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건 상대방을 향해서나 하는 이야기지 나는 아닐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저 나는 내 입장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한데 과연 그럴까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방이 따라주면 그건 당연한 일이고 그렇지 않을 때 역시도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얼마나 하는지 한번 돌이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사이를 살펴봄으로서 우리들의 입장도 함께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전서 2장 7절로 8절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자기가 사도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내 말대로 따르라고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도니까 너희들을 그냥 아무 말 말고 따르기만 하면 돼”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언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을 향해서 요구하는 것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그때 바울 사도는 강압적으로 “잔소리 말고 그냥 순종해”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주인의 자녀를 젖먹일 때는 그저 사랑 없이도 내게 맡겨진 일이니까 한다는 마음으로 젖을 물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젖먹이는 아이가 자기 자식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죠. 아무래도 주인의 아이를 젖먹일 때와 자기 자식을 젖먹일 때는 그 마음부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주인의 아이를 더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을 향해 더 애틋한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자식이 아프기라도 한다면 그 애타는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차라리 내 목숨을 내 놓더라도 이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마음이 바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참으로 안타깝게 한 것은 마음이 그렇게 간절한데도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성도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내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왜 못 찾아오느냐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목숨까지도 내어줄 정도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지금 환난을 당해 너무도 힘들어 하고 있으니 마땅히 데살로니가에 들러 성도들을 만나보고 무슨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주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말이 통하겠느냔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하지 말라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바울은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하며 하소연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마음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여전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 사도의 그런 모습이 그저 섭섭하게만 여겨지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저 말만 그렇게 하지 속마음은 전혀 그게 아니라고 우리는 그저 관심 밖이라고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바울 사도인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래 참다못하여 바울 사도는 자기들은 어쩔 수 없어서 아덴에 머물지만 대신 디모데를 보내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디모데를 보내는 것은 디모데가 우리의 형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요 디모데를 통해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환난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장차 이런 환난이 있을 것을 미리 말하였던 것이요 그 말대로 된 것임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고 말을 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정말 견디기 힘든 그런 일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정말 은혜 아래 살기를 원하는데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은혜를 좀 받았는가 싶은데 얼마 있다 보면 내가 정말 은혜 받은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참담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도 은혜 아래 재미있게 오순도순 살고도 싶은데 왜 우리 마음은 그토록 쉽게 흔들리는 것이고 왜 그저 들리는 것이나 보이는 것들이 마음이 들지 않는 것들뿐인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안팎으로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요. 그런데도 그 어디에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은혜가 되는 말 역시 하나도 내 귀에 들려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엇 하나 마음 편하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짜증스럽기만 하고 정말 내가 왜 사는가 꼭 이렇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되는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누가 나를 이해해 주는 것 누가 나를 다독거려주는 것 그 따뜻한 한 마디가 그리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어서 가지 못하지만 우리 대신 디모데 네가 가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좀 위로해 주려무나. 그래서 환난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도록 하려무나.” 이게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이런 디모데의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일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성도가 힘들어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게 된 내가 먼저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나 혼자 힘으로 안 될 때는 다른 분들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함께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그 분을 위하여 중보하며 기도하는 것 역시도 빼놓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튼 우리 안에 교통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어떤 때는 서두르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오히려 더 때를 기다리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직접 하게도 하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게도 하십니다. 어떤 때는 혼자서 하게도 하시고 여러 사람을 통해서 하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어려움 속에 힘들어하는 성도들을 볼 때 누가 더 힘들겠습니까? 힘들어 하는 당사자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까? 그 누구도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우리 주 예수님이 가장 힘들어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한들 주님의 마음만큼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흉내는 내겠죠. 하지만 주님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직접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주셨지 않습니까? 한데 저는 아직 죽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생각하면 그저 말뿐인 사랑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엊그제가 제 생일이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제가 회심한 날로 정해서 생일로 하고 있습니다마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제 밑의 동생 때문입니다. 저는 신학대학교에 재학 중에 있었고 바로 밑의 동생이 대학을 들어가게 됐는데 집안이 어려워서 둘이 함께 대학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먼저 군대에 갔다 오겠노라고 해군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해군은 전통적으로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기 직전에 충무에 있는 이순신장군 사당을 참배를 합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동생이 탄 배가 그만 충무 앞바다에서 삼각파도에 걸려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래 그 YTL정에 탔던 훈련생들 159명이 그만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그날이 바로 1974년 2월 22일 제 생일날이었습니다. 나중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장사를 지내는데 그때까지도 아버님은 눈물 한 방울 흘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6남 1녀의 자녀들 중 아버님이 제일 사랑하셨던 아들이셨습니다. 어릴 때 늘 아버님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자랐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잃고서도 눈물하나 흘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통곡하시던 어머님이 한탄을 하셨습니다. 당신처럼 매정한 사람도 없다고 어찌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는데 눈물조차도 흘리지 않냐고 하실 때 아버님이 절규하시듯 하시던 말씀이 귀에 생생합니다. 당신은 통곡이라도 하고 있지만 이런 나는 창자가 다 끊어져 나가고 있다고요.

그날 이후 제게 있어서 더 이상 육신의 생일은 없습니다. 오직 동생의 기일일 뿐입니다. 바로 밑에 두 살 터울이었기에 그렇게 친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싸우기도 무지 싸웠습니다. 그랬기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지요. 싸우다 정이 든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래요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서 내 마음도 그 사람 못지않게 아픈데 그걸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무어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위로하겠다고 하는 말이 퉁명스럽게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합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그게 인생입니다.

바울 사도가 참다못해서 디모데를 보내는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이 참다못해서라는 말이 참으로 묘합니다. 참다못해서 라는 이 말이 바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사랑하기에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투정이 오히려 반가울 수도 있습니다. 툴툴대는 말이 더 반가울 수도 있습니다.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투정하기도 하고 거기에 맞받아쳐서 큰소리치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어렵습니다. 어떻게 받아주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다 함께 받아주고 믿어줄 때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을 우리 다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디모데를 보내면서 바울의 마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해서 더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다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바울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릅니다. 디모데가 돌아와서 하는 말인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목회자의 기쁨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자식이 잘 되는 것 역시 기쁜 일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것은 헤어져 있는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 안에서 잘 섬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해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가장 기뻤던 일 중에 하나는 새로 딸을 하나 더 얻었다는 것도 몰론 기뻤지만 그보다 더 감사하고 기뻐했던 것은 저와 함께 믿음과 사랑을 나눴던 지난날의 성도들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좋은 일꾼이 되어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을 때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목회자의 기쁨이요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너희가 나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믿음 안에 서 있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볼 때는 그것이 내 탓인 듯싶어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소식을 다시 알게 되었을 때 반가워하는 그 마음을 전해들을 때입니다. 정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지만 목회자의 도리상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혹시나 지금 그곳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으로만 그리던 분들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어떻게 지내는지 믿음 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던 그들이 정말 보고 싶었노라고 꼭 가서 뵙겠다고 할 때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하는 마음을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의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사실은 바울도 너무 힘이 듭니다.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너희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 수고가 헛된 것으로 알았습니다. 자꾸 그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거기다가 지금 자기의 입장이 너무 어렵고 고난을 당하다 보니까 더더욱 내가 헛고생한 것이 아닌가 싶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는 마음 때문에 더 힘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성도들은 그래도 하소연할 사람이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아닙니다. 하나님 한분 외에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고 내색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가슴만 시커멓게 타들어갈 뿐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에게 감로수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 안에 서 있는 것을 볼 때입니다. 넘어지고 쓰러졌던 성도들이 다시 일어서는 그 모습을 볼 때입니다. 저 역시 약한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여러분이 분에 넘치도록 사랑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받는 사랑에 비해서는 너무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저를 위한 기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우리 모두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 믿음과 사랑으로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 중에 기뻐하는 바울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은 이제 긴 어둠을 벗어났습니다. 모든 불안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전해 듣고는 언제 불안했느냐 싶게 언제 힘들었느냐 싶게 갑자기 힘이 납니다. 너무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쁨을 안겨준 성도들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하는데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하는 길은 다름 아닌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꼭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저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돌아보아야 할 가족이 없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성도들에게만 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들의 믿음이 더 굳세어지고 더 든든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주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바울의 마음이 목회자들만의 마음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목회자 한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그 소원을 그 마음에 주신 주님의 소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간구하시는 것이요 성령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항상 모이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 안에서 든든히 자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이 과연 무얼까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했는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사랑하는 것일까요? 누구는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과연 그럴까요? 어떻게 해야 결코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사랑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사랑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힘들기에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랑이 힘든 것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은 내 뜻 내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상대방을 생각해야 그게 참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위한 것일까요? 가고 싶은데 갈 수 없고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바울처럼 하고 싶다고 다 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너희는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을 옳다고만 할 수도 없기에 아닌 것을 아니라고만 할 수도 없기에 그만큼 사랑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그건 너무 비겁한 것이 아니냐 그냥 회피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해서 알거니와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없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붙드시고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실 때만 사랑도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닌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그리고 내 힘으로가 아닌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할 때만이 이 사랑도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날마다 간구하며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의지해서 참 사랑을 실천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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