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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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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 (마 5:10~12)

고통 중에도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헌신으로 성장합니다.

‘성장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4살-10살 정도 어린아이들이 자라면서 무릎이나 다리관절에 나타나는 통증입니다. 이것은 너무 빨리 자라나서 뼈와 근육이 서로 불균형하게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한 인간의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도 아픔을 겪어야 성장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의 변화와 개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가난이라는 고통, 핍박이라는 고난, 정의를 위한 박해라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야 새로운 성숙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길을 가는 동안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존경합니다. 그들은 용기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고통보다 깊은」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지닌 많은 문제들의 뿌리에는 사람의 용기의 부재(不在)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문제를 직면할 용기가 있으면 고통을 받아도 적절한 고통과 고난을 받게 되는데 불필요한 고난을 받게 되는 많은 부분이 용기가 없어서 생겨나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란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고 증언합니다. 정치가, 종교지도자, 과학자, 기업가, 예술가 등 창조적 지성인일수록 다른 사람들 보다 좌절과 상실을 더 많이 겪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재미있게 이런 표현을 합니다.

“고통자체는 창조적인 것이 아니지만 고통 없이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 사람을 자라나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지만 고통 없이는 사람이 성장할 수가 없다.”

어느 누가 고통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고통 없이는 창조적인 이익과 창조적인 인물이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고통의 세월, 번뇌와 고뇌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성숙하고 성장했던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성숙하고 나라가 발전하는 수많은 과정을 보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박해와 핍박,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충성했던 사람들로 말미암아 역사가 발전되고 성숙되어 왔습니다.

성숙의 과정에는 시련 속에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짧은 세월동안 민주화를 이루어 왔습니다. 산업화를 이루고 이제 세계 열방과 더불어 선진화를 향한 과정 중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 고통과 어려움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만큼 발전하는 과정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위해서 애썼던 흑인 지도자 만델라는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후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법정에서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하면서 선언합니다.

“피통치자(국민)는 통치자에게 발언할 권리를 가지며 그 요구가 무엇이건 간에 그에 대한 답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정통성 있는 정권이라면 누구나 결정사항을 권리의 위임자들(국민)에게 설명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민주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당연히 통치자는 국민에게 왜 이런 결정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국민들은 통치자에게 우리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말하고 그 요구에 대해서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얼굴색과 상관없이 1인 1표를 행사하는 민주주의의 권리를 주장하여 흑인들의 인권을 되찾으며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이 됩니다. 흑인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던 백인들을 향해서 그는 놀랍게도 용서를 선언합니다. 국민통합의 증진과 화해를 위한 법을 제정했습니다. 인권유린을 하며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사면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범했던 모든 인권유린의 죄악을 철저하게 고백하기만 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 정책의 아픔을 딛고 흑백의 인종이 함께 사는 국민통합의 나라를 만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10)

기독교는 고난을 단순하게 예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잔악한 일을 즐기는 새디즘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기학대를 즐기는 마조키즘을 좋은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고난에 대한 전제가 있는데 바로 의를 위한 고난입니다. 여기서‘의’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한다”(마태복음 5:11)

여기서 ‘의를 위한 고난’이란 예수님을 위한 고난,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고난입니다. 고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증언하기 때문에 생기는 신앙고백적인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며 생명의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생기는 고난입니다.

초대교회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순교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는 아픔이었습니다. 로마제국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주님입니다. 저 카이사 황제가 주인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의 개인적인 혁명뿐만 아니라 사회가 갖고 있던 혁명이기도 했기 때문에 고난이 뒤따라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여 년 전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 1월 27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박해를 받을 수 있으며 아마도 순교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들 앞에 있는 위험을 분명히 보면서도 이러한 경우에 사람들이 늘 그랬듯이 제게 와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할 때 저로서는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백여 년 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선교사들을 통해서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큰 어려움과 고통을 주는지 모릅니다. 이념과 종교 갈등, 문화와 관습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생명을 담보할 만큼 엄청난 용기와 담대함이 있어야 하는 것임을 조금만 땅을 넓혀서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껏 전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도 지하에 숨어서 신앙을 고백하며 기도하는 우리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슬람권 국가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생명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배척을 당합니다. 언제 죽음이 다가올지 모를 정도의 위협을 당하는 현실이 오늘의 세계 속에서도 있습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발생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치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유와 해방, 생명과 진리,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며 때로는 순교의 길을 간 사람도 있습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삼일운동 80주년을 맞습니다. 일본제국주의를 대항했던 우리 조상들의 독립을 향한 열정과 헌신에 고난의 역사가 동반되었습니다. 삼일운동은 국민들의 자유와 진리와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총체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고난의 역사가 동반되어 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4개월 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였습니다. 삼일운동 만세사건에 가담함 조선 사람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얼마나 만행을 당했는지 논의하면서 1919년 7월 10일자로 당시 조선 총독 하세가와에게 다음과 같은 항의서를 보냈습니다.

“조선에서의 현 정치적 소유를 진압하면서 일본정부가 취한 부당하고 비 인간적인 방법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다음과 같은 잔인한 행위가 있었다.
무방비한 남녀, 어린이에게 사격과 총검질을 함, 일본민간인이 한국인을 곤봉으로 때림, 총 갈고리로 무장한 소방수가 평화적 시위자들에게 가한 야만적인 공격, 부상당하거나 죽어가는 시위자를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함, 혐의자를 재판 전에 매우 비위생적 상태 속에 무한정으로 구류시킴, 경찰심문 중에 사용한 고문, 범죄자를 경찰이 야만스러운 태형으로 처벌함, 마을을 불태우고 제멋대로 재산을 파괴함,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사건, 전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잔인한 방법들, 기독교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모든 관대한 인간감정을 분노시켰으며 문명국가의 기본법이랑 행동과는 정 반대였던 아무리 비난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불법행위들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캐나다의 장로교선교위원단에게 알릴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부당한 행동들의 일본인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특별조약을 맺고 있는 영국식민인 우리의 명예와도 관련된 것임으로 주저하지 않고 총독에게 항의하는 바이다.”

이것은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던 조선백성들이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항의하면서 증언한 문서입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때 보고한 기독교인 중에서 장로교 교인들의 피해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군경에게 체포된 자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 134명, 기타 기독교지도자로 체포된 자 202명, 감금된 남자 신자 2,125명, 감금된 여자신자 531명, 매 맞고 방명된 자 2,162명, 사살된 자 41명, 수감 중인 자 1,642명, 매 맞고 죽은 자 6명, 파괴된 교회당 12교회”

삼일운동 때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민족종교로서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운동이 곧 민족운동, 독립운동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향한 출애굽운동이 곧 대한민국의 독립자유운동임을 기독교 지도자들은 깊이 인식하고 민족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고난 받으면서 증오가 아니라 박해를 감내하기에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의 태도가 무엇이기에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들은 인간과 사회 속에 놓여진 불평등을 인식하고, 부정과 부패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과 타락, 소외와 가난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면 박해받기를 기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눈과 귀가 멀어지면 자기 욕심만을 채우게 됩니다.

왜 의를 구하며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는 자일까요? 고난을 받으면서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보복하는 자가 복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복에는 미움과 증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는 미움과 증오가 없기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강한 자요, 사랑으로 포용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만큼 어떤 순교보다 혹독한 고난을 받은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못을 박고 가슴에 창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께서 고난과 박해를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인간이 고난 받는 자리에 하나님도 고통 받고 계십니다.
인간이 우는 자리에 하나님도 울고 계십니다.
인간이 신음하는 자리에 하나님도 신음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고난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도 고통 받으며 아파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고통 속에 다가오셔서 우리의 연악하고 상처 난 가슴을 안아주기를 원하십니다. 히틀러 나치정권 당시 죽음의 가스실로 수많은 유대인들의 희생되었던 수용소가 아우슈비츠에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살아남은 위젤이라는 사람이 쓴 비젤(E.Wiesel)이라는 사람이 쓴 「밤」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독일 친위대는 두 명의 유태인 어른 남자와 소년 한명을 사람들의 모인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남자들은 즉시 죽었고 소년의 사투는 30분간이나 지속되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내 뒤에 있던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소년은 여전히 밧줄 때문에 괴로워했다. 나는 내 뒤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나는 내안에 목소리가 이렇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나님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네가 울고 있느냐? 나도 울고 있다.
네가 가슴아파하고 있느냐? 나도 가슴아파하고 있다.
네가 신음하고 있느냐? 나도 신음하고 있다.

우리가 아파하며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생명주기를 원하시는 안타까운 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어둠을 물리치시고 빛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알게 됩니다. 이 땅에 있는 죄악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안타까움을 읽게 됩니다. 그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이 주셔서 이만큼의 정치적인 자유와 경제적인 번영이 주어졌습니다. 종교적인 신앙 고백의 자유와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드리는 은혜의 역사가 주어졌습니다. 의를 위하여 우리 선조들이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자기 시간을 내놓은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자기 피와 땀과 생명을 내놓고, 이 민족과 하나님의 주시는 진리와 자유와 생명을 내놓을 때 우리에게 축복의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어둠의 세력이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와 가난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새롭게 삶을 일구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새로운 지도자 대통령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 다음세대가 우리보다 더 풍성한 삶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때로는 아픔을 견디고 참아야 합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때 하나님께서 풍성한 축복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자유와 진리와 평화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받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으로부터 회피하지 말게 하시고 용기를 가지고 감당하게 하셔서 주님께서 주신 축복의 역사가 이 나라와 이 땅 위에 열려지게 하옵소서. 주님께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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