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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만을 닮기 원합니다 (마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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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을 닮기 원합니다 (마 3:1-17)

1. 주님의 세례 받으심

요단 강가에 서신 주님.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 곳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는 것을 보았다. 주님은 비로소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요한 앞에 주님은 서셨다. 요한은 깜짝 놀라며 세례 베풀기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요한은 자기 앞에 서신 그 분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 죄를 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그런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3:6)에 보면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베풀기 전 요한의 메시지는 (3:2) “회개하라”였으며, 세례를 베푼 다음에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는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세례를 가리켜 말하기를 (3:11) “너희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라고 말한다.

회개는 죄를 전제한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왜 주님은 기꺼이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신 것일까? 더구나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세례받기 위해서 몰려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틈에 있었다. 결코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 돌아간 다음 아무도 없을 때 가만히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 (눅3:2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지금 요한 앞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앞으로 메시야의 사역을 할 때 사역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저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아닌가? 우리가 받았던 그 회개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아닌가? 저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 자신이 메시야라고? 웃기지 마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꺼이 세례를 받으신다.

요한 앞에 서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요한에게 맡기신다. 요한의 손이 예수님의 머리에 얹어지고 물속에 잠길 때 기꺼이 주님은 물속으로 들어가신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피조물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은 기꺼이 자신을 피조물에게 맡긴다.

왜 주님은 기꺼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3:15)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 받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의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의는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공의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 나무 십자가에 몸뚱이가 매달려있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그 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 분은 셋째 날에 나무를 만드신 분이다. 그 분은 풀과 채소와 나무(식물)를 만드신 분이다. 그런데 그 창조주께서 그 나무에, 그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다. 나무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나무에게 기꺼이 자신을 맡기신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 손과 발을 깊이 찌르고 있는 대못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그 분은 셋째 날에 땅을 만드신 분이다. 땅 속에 있는 수많은 광물을 지으신 분이다. 그 분은 철광석을 만드신 분이다. 그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다. 셋째 날에 지으셨던 그 피조물, 그 철광석, 그 못에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을 맡기신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기꺼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다.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례 받으심으로 자신의 메시야 사역이 더 어려울 질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비웃음으로 인해 자신의 사역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는데 주님은 기꺼이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얼마나 더 편할까? 내가 얼마나 일을 더 쉽게, 더 잘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까?'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내가 좀 불편하고 어려워도, 내가 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기꺼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사람들의 칭찬에 우쭐거리지 않고, 사람들의 비판에도 얼굴 붉히거나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화재로 내 자신이 망가져버리는 일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더욱 힘쓰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정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주님의 겸손이었다.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 앞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는 겸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겸손. 겸손은 그렇게 속죄의 능력까지 가능케 하는 주님의 성품이었다. 인간의 범죄가 교만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한다면 주님은 겸손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겸손은 죄의 뿌리를 삼켜 버렸다. 우리도 주님의 겸손을 본받자. 겸손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제자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겸손. 부하 직원을 인정해 줄 수 있는 겸손. 자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 겸손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올 한 해는 더욱 겸손해졌으면 한다. 민감한 영성을 가지고 겸손이 나의 내면이 되고 인격이 되게 했으면 좋겠다. 나의 말과 행동 가운데 교만함이 고개를 쳐들 때 그 순간을 빨리 알아차리고 다시 겸손의 자리로 내려갔으면 좋겠다. 겸손함으로 우리는 언제나 맨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 우리의 세례

주님은 그렇게 세례를 받으셨다. 우리의 세례는 어떤가?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으셨는가? 처음 세례 받을 때를 기억하는가? 아직도 그 때의 감격을 기억하는가?

초기 교회의 세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서가 있는데 <디다케>와 <사도전승>이다. <디다케>에서는 “두 길”이라는 제목의 문서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르침을 준다. 2세기의 초기 교부들은 세례 받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금식, 도덕적, 교리적 준비를 할 것을 당부한다.

<사도전승>에는 기독교 초기 2세기 때의 세례의 모습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세례 예비자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세례 예비자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교육은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뉜다. 하나는 장기적 준비 과정으로 약 3년에 걸쳐서 기독교 교리와 도덕적 훈련을 쌓은 과정이다. 또 하나는 단기적 과정으로 장기 과정을 다 마친 사람들을 심사해서 선발된 사람들에게만 집중적으로 훈련을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는 매일의 축귀와 세례받기 전 2일 동안 금식, 성경읽기, 공부를 포함한 철야가 있다. 이 모든 훈련을 마친 후 부활절 새벽에 그들은 마침내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유아세례가 집중적으로 베풀어질 때는 이런 세례의 예비 과정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한국교회는 세례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3년은 아니더라도 3개월 혹은 1개월 정도의 교육은 필요할 것이다. 초기교회는 그렇게 엄격하고 정제된 세례교육을 받았기에 내가 세례 받고 예수 믿는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떤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불굴의 신앙인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례교육을 약화시킴으로써 결국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고, 세례 받고 예수를 믿다가도 작은 시련에도 넘어져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은 주님의 수세주일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단 일회적 사건이지만 우리는 내가 받은 세례를 자주 자주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에도 단순히 “저 사람이 세례 받고 믿음으로 잘 살겠나?” 생각하지 말고 나의 세례를 기억하고, 바로 그 순간에 나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주님이 세례 받으시고 공생애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사역과 직분 앞에서 세례 갱신의 서약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례란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는 예식이며, 성령으로 거듭남과, 새롭게 하심과, 나는 주님께 속한 존재임을 확인하며 헌신을 서약하는 것이기에 우리 또한 주님께 헌신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교역의 사명을, 교사의 사명을, 찬양대의 사명을, 항존직의 사명을,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주셨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주님과 같이 기꺼이 나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그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3.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제가 우리 교회에 온 지도 벌써 만 4년이 된다. 오후 찬양예배 때 와서 맨 처음에 설교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나 되었다. 저는 지난 4년 동안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많은 것이 변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가운데 머리가 심하게 빠졌다는 것이다. 소갈머리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또 나의 설교도 달라졌다. 이제는 어떤 사람, 어떤 신학자를 좋아하고 그것을 설교의 내용으로 삼았던 것에서 돌아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나의 외침의 전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 변한 것 가운데 하나는 내 자신의 모습과 인격도 조금 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4년 동안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만드셨고, 그런 부분을 하나님은 훈련시키셨다. 내 마음 속으로 가장 많이 했던 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자”는 기도였다. 그 기도는 나의 기도의 제목의 첫 번째였다. 운동하다가도 문득 내 입가에 머물렀던 기도. 어떤 교회의 이야기,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났을 때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 저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칭찬한다고 거만하지 않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내 마음이 무너져버릴 만큼 분노하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지난 4년의 시간은 내게 가장 기본적인 인격을 훈련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동안 욕망을 버리고, 내 개인적 야망을 버리고, 뻥치는 것도 버리고, 가장 소중한 것을 붙잡는 훈련의 기간이었다. 아직 완성된 것도 없고, 많이 부족하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그것을 계속 훈련시키고 계신다.

올 해는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로 하자. 주님만을 닮는 것. 그것이 올 해 우리 소원의 전부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 그것이 올 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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