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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상황인식(3)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마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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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상황인식(3)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마 9:18-26) 
 
삶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 혹은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고 마음에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는 일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똑같은 모습, 즉 다른 병행구절을 보면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모습을 가지고 사람들은 죽었다라고 단정하고 피리를 불고 호곡하며 훤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황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잔다'라고 전혀 다른 인식을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상황인식에 대해서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을 물리치고 그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셨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되고 우리 주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에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판단과 삶의 상황 인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됩니다.

왜 사람이 숨이 끊겨서 죽었다라고 판단했는데 예수님은 그 죽은 사람을 죽지 않고 잔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이 결국 실제가 돼서 우리 인간의 말과 다른 것이 진리가 되어 버렸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믿음에 어떤 연관을 가지며 또 우리 삶에 매사를 대할 때 우리는 어떤 은혜에 근거하여 우리 삶의 상황을 인식해야 할까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진행됨을 봅니다.
한 회당의 직원, 다른 병행 구에서는 회당장 야이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딸이 중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가서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고
"예수님 내 딸의 병을 좀 고쳐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많은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있었고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극렬히 반대하는 아직까지는 모두에게 인증 받지 못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라고 하면 그 당시에도 꽤 인정받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소원하고 딸을 고쳐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 두 가지입니다.) 대단히 다급했고 예수님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을 보시고
"가자, 내가 고쳐주마." 하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갑니다. 가는 도중에 한 가지 사건이 생깁니다. 열 두해나 혈루 병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던 여인이 있는데 이 여인의 마음에 믿음이 있어요. '내 마음에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내 병이 나으리라'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헤치고 그 병든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을 때 그 병이 정말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제 사건이 돼서 이러저러한 몇 가지 대화가 오고가게 되고 아마 그런 가운데 시간이 지체되어서 그랬는지 하여간 예수님이 그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사람들이 호곡하고 훤화하는 것을 볼 때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죽은 시신이 된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보고 "아냐, 죽은 게 아니야, 지금 저 아이는 잔다."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아니 뻔히 죽은 아이를 보고 잔다고 얘기하니 도대체 예수님이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비웃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뒤로 하고 그 소녀에게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내용 속에서 오늘 중점적으로 믿음의 한 단면으로써 삶의 현장과 현상에 대한 바른 인식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3주 동안 믿음 있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첫 번째 주에는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특별히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확신, 절대적인 기대, 절대적인 신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기대, 확신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주에는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무서워 떨다 주님을 깨워서 주님께서 그 풍랑을 잠재워주시는 장면 속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두려움을 떨치고 확신과 자신감속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세 번째, 믿음은 특별히 우리 상황에 대한 믿음과 은혜에 근거한 바른 인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어떻게 파악하고 바르게 깨닫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먼저 풀어가고자 하는 것은 삶의 현장을 판단하는 상황인식은 각자의 의식에 따라 서로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다.

죽은 소녀를 보고 죽었다라고 하며 그 소녀가 잔다라고 말씀하는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경험, 그들에게 주어진 지식,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 속에서는 이 소녀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그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보는 것과는 다른 판단기준이 있고, 또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 못하고 주님을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비웃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를 벗어나는 새로운 기준이 있음을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죽은 소녀를 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결과적인 바른 판단입니다.

주님이 왜 이 소녀를 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계획도 있으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그 소녀를 일으키실 능력이 있기에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잠자는 것같이 멈추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에 비해서 그 소녀의 인간적인 죽음은 잠자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 두 가지 관점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인간들과 예수님 사이의 능력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이제 설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설이 되면 아이들이 예쁘게 세배를 하면 어른들이 이렇게 세뱃돈을 주잖아요? 그런데 어떤 아주 조그만 어린아이가 세배를 했어요. 그랬더니 세뱃돈을 주는데 정말 아이에게는 합당하지 않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십만 원을 줬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는 십만 원은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큰돈이에요. 이 조그만 아이에게는 너무너무 많아서 감당치 못할 돈이에요.

그런데 여기 앉아계신 우리 어른들이 한 달 수입이 십만 원이라고 합시다.
그럼 그 돈은 어떻게 되지요? 너무 작은 돈이에요.
한 달에 십만 원 가지고 생활할 수가 없거든요.
똑같은 액수의 십만 원이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나 과다한 돈이고 어른들에게는 한 달 수입으로는 너무 작은 수입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십만 원이 위치할 배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즉, 어른들에게는 적고 어린 아이에게는 큰 겁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 어린아이가 죽은 것은 어떻게도 무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만 잠자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또한 앞을 보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사역을 앞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즉,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부활의 예증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을 넘어서신다는 것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도 예수님이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리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후, 또 주님의 구속사역을 깨달은 이후에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던 모든 사역의 진정한 의미 즉, 주님은 죽음의 권세에 매이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가르쳐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슬픔을 거두시고, 눈물을 거두시고, 그리고 우리 삶의 애곡을 거두시는 분임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앞을 보고 모든 일을 이루실 주님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당연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래, 우리는 주님과 차이가 있어.' 라고 생각하고 끝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끝이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그 주님의 힘과 능력이 바로 우리들에게 적용되어 주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수 있다라는 것을 믿고 손과 발을 움직여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는 것과 아는 것을 내게 적용해서 내가 그것을 활용하고 아름답게 내게도 이루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은 훌륭하셔.' 라고 인정하고 끝나는 것과 그 주님의 훌륭하신 능력과 힘이 내게 적용되어 은혜로 역사하기를 소원하며 그대로 행하고 그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머릿속에서 인정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 속에서 그 힘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머리와 가슴의 믿음뿐 아니라 손과 발의 믿음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선언하는 교회가 아니라 실천하는 교회다.
우리성도들은 선언하는 교인이 아니라 실천하는 교인이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 그리고 생활 속의 믿음, 이와 같은 것이 우리들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각자의 판단근거에 따라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여 인식할 것이나 결국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고 그것이 결국 진리요, 진실이 됩니다. 뭐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됩니다.
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되고, 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진리가 될까요?
주님은 세상만물을 주관하셔서 모든 사후를 알고 계시고 또한 그 이유를 만들고 바꾸고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만물은 결국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즉, 주님의 말씀하신 것을 따라서 이루어주시지요.

이제는 따라서 우리는 모든 판단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과 내 기준과 내 여건 속에서 어떤 일이 가하다 불가하다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주님이 이 가운데 역사하신다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까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주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꼭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주님의 뜻이 여기 분명히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보다 주님의 계획이 분명하다면 결국 시간 지나면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지 못해도 주님이 이루실 것이고 나는 그 주님이 이루실 부분의 한 부분을 감당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내 성취여부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내가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시는데 나는 그 주님이 이루시는 부분을 감당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면 우리 삶은 전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아무리 큰 인물이라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크고 위대한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데 사용됐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출애굽을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까? 모세가 이룬 겁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이루심에 사용되었던 사람에 불과한 겁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모세가 이룬 게 아닙니다. 모세의 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떤 사람한테, 아이에게 "너 이것 좀 갖다드려." 해서 그 아이가 갖다드렸어요. 그 아이가 준 겁니까, 제가 준겁니까?
하나님이 하시고 모세는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능력과 여건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의 뜻대로 된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과연 주님의 뜻인가? 하는 확신이며, 그 확신이 들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확신 없이 어떤 일을 하면 쉽게 흔들립니다.
확신한 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낙심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해 줄 뿐입니다.
사단조차 방해하지 않는 일이 어디 하나님의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니니 사단조차 방해하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사단의 방해가 있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승리로 이루는 것이지요.
어떤 일의 힘들고 쉬움, 혹은 잘되고 안 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이 우리를 휩싸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있는가 물으시려면 다음의 질문에 확답해보시면 됩니다.

첫째, 내가 일을 하면서 어려움이 있어도 기쁘고 감사한가?

둘째, 어떤 일을 겪어도 섭섭함이 없고, 화나는 일도 없고, 오직 모두가 다 나를 돕는 자고 또 감사하다고 생각되는가?

셋째, 결국 과정의 어려움은 있으나 결과는 최고치의 선을 이룰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늘 기쁘고 감격스러운가? 그리고 그 일이 끝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고 나면 그 다음 단계의 또 다른 계획이 세워지는가? 하는 것이지요.

또 일을 하다가 나는 그만두고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계속해도 섭섭하고 마음 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한 부분 동안이라도 사용됨을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 드는가?
내가 이루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는 분이고 나는 하나님의 이룸에 잠시 동안 사용되었다는 것이 내 자신에게 분명히 납득되어져야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사용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주의 역사를 우리를 통해서 스스로 이루시는 분이 되시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뜻대로 됨을 믿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근거하여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뜻대로 될 것이야!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될까?
거기에 근거하여서 내게 주어진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고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결국은 주님의 뜻대로 됨을 믿고 기대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일은 내 경험과 지식과 배경 속에서 판단되어 그것이 근거대로 이루어진 것이 보통사람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진보하게 되면 또 달라집니다. 이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근거가 아니라 나의 지식과 능력과 배경에 더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믿고 믿음에 근거해서 어떤 일을 판단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판단할 때 내 능력이전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저는 늘 이 사실을 생각하면 감격스러워요.

어떻게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나 잡고 있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제가가 됐는지 그들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고, 그리고 그들은 성경을 기록하는 성경의 저자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볼 때도 나 자신의 한계에서 나를 보지 말고 주님의 뜻과 섭리가 어떻게 작용할까를 기대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야 합니다. 참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슨 일을 이룰까하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나를 존중할 수밖에 없지요.

좀 복잡하다 생각해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어디를 가다 걷다가 넘어졌어요. 어떤 일하다가 잘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해요. 도대체 이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이, 무릎 까졌네. 피나네. 기분 나쁘다. 오늘 모든 일 안 될 것 같아.’
‘오늘 일 잘되는데 기분 좋네.’ 라고 먼저 생각해야 될까?
도대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주님의 뜻과 섭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 내 인간적인 생각에서 기분 좋다, 나쁘다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가 느껴질 겁니다.
사람이 유치할 때는 감정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내 기분이 좋다, 나쁘다, 내 정서가 어떻다. 거기에 의해서 좌우 되요.

두 번째, 성숙해지면 이성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어떤 것이 바른 생각이고 바른 행동인가?
세 번째, 우리 믿음이 자라 더 성숙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믿음에 근거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직까지도 내 마음에 일어나는 정서에 휩쓸려 가는지, 내가 보다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바르고 합당한 생각에 의해서 움직여 가는지, 아니면 내가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파악하고 믿음에 근거하여 움직이는가?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험에 불합격했어요.
‘아이, 난 실력이 없어 안 돼. 운이 없어. 난 그만두라는 뜻인가 봐.’ 하고 생각하다가도 ‘주님이 왜 내게 이런 일을 주셨을까? 내게 좀 더 많은 인내와 자기 수렴과 또 좀 더 많은 준비와 지식을 요구하시나보다. 주님의 뜻은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불합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있게 되겠지!’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믿음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주님의 뜻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답은 벌써 나왔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는 게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가 흥하고 축복을 받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라면 도대체 이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주시고 이루려는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 잘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통해 내가 뻐기고 휘두르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고, 나를 통해 이것을 통해 주님의 뜻과 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기쁨으로 베풀고 돌보고 섬기라는 뜻이라는 것을 파악해야지요.
우리는 그 순간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이름이 끝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많이 서는데 제가 꼭 이런 기도를 해요.
"하나님 이제 이 결혼을 통해서 새로운 사랑이 출발이 시작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더 깊은 사랑의 향기가 있고 더 애틋하고 그윽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서로가 서로를 더욱 더 그리워하며 사모하고 기대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렇게 애틋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정말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하는 것 같아요. 떨어져서 살 수 없어서, 같이 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하고 싶은 거 다했다, 할 것 다했다, 모든 것 다 이루었다라고 생각하면 그 삶이 얼마나 척박하겠습니까?
오히려 여기서부터 이제 새로운 출발로 사랑의 아름다움의 완성을 이루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더 아름다움이겠지요.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내가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고 내가 상대의 기대를 채워주고 싶어 마음에 갈급하며 사랑의 깊은 배려로 상대를 대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매듭과 출발을 이루어가는 것이 진정한 결혼의 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사셨으리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삶일 텐데 한 번 맞는지 확인해보세요.
살아갈수록 더욱 더 애틋해지고, 더 보고 싶어지고, 같이 있어도 그립고, 더 아껴주고 싶고, 없으면 못살 것 같고, 자다가도 보고 싶어서 눈뜨고 한 번 보고 또 자고.
여러분, 그렇게 사시지요?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자다가도 눈뜨고 또 한 번 보고 또 자요.
목사님 무슨 꿈을 그렇게 꾸십니까?
이제까지 살만큼 살았고 알만큼 알아서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꿈에 나타나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당신 꿈에도 나타나서 너무너무 고마워.' 하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당신은 꿈속에까지 나를 찾아와서 나를 묶어두려고 해? 제발 꿈속에서라도 나를 좀 놔줘.' 라고 생각하십니까?
결혼해서 우리가 그것으로 사랑이 완성된 것이고 그 다음부터 쇠퇴하는 것이라면 결혼이라는 것은 무덤이 되겠지요.
오히려 우리는 결혼을 하나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 그것이 끝이라면 우리 인생은 하락하는 것밖에 없지 않아요?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룰 때 또 다른 새로운 일이 보이고, 그것을 이룰 때 또 다른 새로운 길이 보일 때 ‘야, 내 인생 끝까지 달려가는, 정말 피곤하기 짝이 없는 삶이구나!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끊임없는 소망과 열정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또 다른 일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뜨거운 마음의 열정이 피어오름을 감사하는 것이 우리 은혜의 삶이 아닙니까?
언제나 삶은 현재가 끝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가야 하는 겁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주님의 뜻과 계획에 관심을 가지면 삶은 전혀 다른 은혜의 세계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이룸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출발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과연 주님의 계획이 우리가 돈을 벌었으면 끝일까요? 어떤 위치에 올랐으면 끝일까요? 아닌 것 같은데요?
요셉은 총리에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총리에 오른 것은 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총리에 오른 것입니다. 총리가 끝이 아니라 총리가 돼서 그때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 면을 생각하면 우리는 돈 번 게 끝이 아니라 돈을 벌어서 뭘 해야 되는가가 또 다른 시작이지요. 위치에 오른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위치에서 뭘 해야 되는가가 우리에게 또 다른 출발일 뿐입니다.

또 어떤 일이 안 되어도 실망하지 않고 주님의 또 다른 계획을 바라보며 또 다른 우리의 출발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제 대학 입시도 끝나가고 새로 입학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한 출발선상에 섰을 뿐입니다.
내가 바라는 학교에 들어가서 좀 더 나은 학교에 들어가서 기분 좋을 수도 있고, 또 기대와는 달리 좀 더 섭섭하게 출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이 다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새로운 출발선 위에 섰을 뿐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서 4년 뒤에는 또 다른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조금 앞섰다고 해서 그것이 영구히 고정되는 것도 아니고 조금 뒤졌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불변하여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새로 출발한다 생각하고 새로운 경주를 시작하는 겁니다.
기쁨으로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4년 뒤에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자만하거나 혹은 낙심하거나 그로인하여 기쁘게 달려가지 못한 사람은 4년이 지난 뒤에 마음에 후회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현재가 전부가 아니고 결정된 것이 아니고 지금의 결정이 나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생각하고 달려간다면 우리 삶은 전혀 다른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삶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좀 심하다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음식재료를 받았어요.

요새 한우고기가 비싸고 맛있다고 그러던데요, 한우고기를 한 십만 원쯤 받았어요. 어떤 사람은 그냥 돈이 없어서 그런지 채소만 한 만원어치쯤 받았어요. 둘 다 다 음식을 하라고 그래요. 그럼 뭐라고 해요. "야, 이거 십만 원짜리 재료를 받은 사람하고 만 원짜리 재료 받은 사람하고 음식 만들어봐야 무슨 상대가 되겠어? 뻔한 일을." 그리고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람에 따라 고기만 좋아하는 사람과 채소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요.
아무리 고기가 훌륭한 고기라고 해도, 비싼 고기라고 해도 채소도 있어야 더 맛있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삶의 필요와 기여는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달라집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요? 인생의 가장 두 가지 잊으면 안돼요.
하나는 흘러간다는 겁니다. 흘러간다는 거예요. 좋은 것도 흘러가서 없어지고 나쁜 것도 흘러가서 없어져요. 기쁨도 흘러가고 고통도 흘러가는 거지요.
또 하나는 삶은 항상 반전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렇게 잘 되다가도 안 될 수도 있고 그렇게 안 되다가도 갑자기 잘 될 수가 있는 거지요.
이 흐름과 반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단언할 수가 없는 거지요.
항상 우리는 좀 더,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상황이, 이 일이, 이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 주님이 이루시려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이 시간 내가 가져야 할 최고 최선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리고 주의 뜻은 무엇일까?

주님은 십자가의 참상의 현장을 인류구원이라는 최고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현장으로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골고다의 언덕처럼 아무런 소망 없는 삶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이루시려는 은혜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은 아니야 잔다라고 생각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셨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이루실 능력도 있는 거지요.
계획과 능력도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이 맞는 거지요.

저는 요즘 왜 그럴까? 라고 생각하는데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역사상의 언제나 이와 같이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영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에서 안티기독인들의 목소리가 굉장히 높여지는 것 같아요.
기독교 사회 내에서도 자성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나는 잘하고 있어.' 라고 생각하지 말고, 혹시라도 '나를 잘 돌아보지 못한 것은 없나?' 하고 생각하고 더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더 바르게 더 옳게 그리고 바른 일들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왜 그들이 그럴까? 하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아프거나 고통스럽거나 아니면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의 심령이 우리를 향해 관심을 가져 달라는 아픔의 표현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 해야 될 바르고 또 꼭 도움의 일을 해야 될 마음의 결심의 기회가 되야 합니다.
미움이 아니라 가엾음의 눈길을 가지고 바라봐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니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의 표현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표출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이웃인 그들을 또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은 표피적인 판단과 심층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괜히 우리에게 와서 "꽥" 소리 지르고 괜히 우리에게 화냈어요.
왜 쓸데없이 우리에게 화내 하고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 생각할 수 있지요? 그것은 표피적인 판단이고.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소리 지르고 상관없는 내게 화를 낼까? 정말 무슨 가슴 아픈 일이 있나보다. 하고 가엾게 생각하면 인생이란 한 없이 가엾어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도 평화롭고 정서적으로 꼬임도 없고 유덕한 인간적 성품을 가졌다면 괜히 꼬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만 하면 되죠. 그렇지 못하니 다시는 그 일을 못하고 안하고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겁니다.
자신이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할 필요도 없고 틈도 없고 여지도 없어요. 늘 말씀드리지만 일꾼은 일하느라 힘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말꾼은 일을 안 하니까 힘이 남아서 말을 하는 겁니다.
자신이 정말 가슴아파하며 힘들게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기에 무엇이라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내 것 가지고 가슴아파하며 결단해서 남에게 주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너는 왜 그만큼만 주느냐? 너는 더 주는 것이 맞지 않느냐? 왜 너만 잘살려고 하느냐?" 이런 얘기 절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좀 더 주지 못하는 내 형편과 내 마음의 작음을 슬퍼하고 더 주고 싶어 애쓰고 마음을 넓히려고 애쓸 뿐입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얘기 맞는지 보세요.
정말 실천을 해 본 사람은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정말 실천해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저러는구나! 하고 마음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기 보다는 가엾어 하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랑해야 될 우리 이웃이라는 생각을 갖고 돕기 위한 우리의 일을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주어야 합니다. 배고프지도 않고 보챈다는 것은 아픈 겁니다.
우리는 병이니까 약을 주어야 합니다. 마음 상해하지 말고 사랑의 심정으로 돌본다면 돌보지 못한 우리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우리 본연의 해야 될 바를 해야 합니다.
진정한 겸손과 사랑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영적 강건함에서 이루어지는 용기와 능력과 힘에 의해서 비롯됩니다.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포악하고 한심해보이기 전에 정말 가엾어서 그 주먹을 슬며시 잡고서는 뭔가 별것 아니라도 우리 마음의 사랑을 건네주도록 그 손에 슬며시 뭔가를 쥐어줄 수 있다면 의외로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물양성에 두 가지 지표를 정했지요?
하나는 사회 오피니언 리더 양성과 또 하나는 범죄자 방지를 위한 건전한 시민 양성이라고 했습니다. 사회의 여론지도 그룹이 되어서 이 사회를 지도해 나갈 지도자 그룹을 우리는 양성해야 됩니다.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이 사회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합니까?
또 하나는 정말 그 길이 어렵게 되어서, 정말 어쩔 수 없는 환경적인 영향으로 또 그가 주어진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바르게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고 그를 잘 양육해준다면, 정말 그가 건전한 시민이 된다면 또 이 사회에 우리가 훌륭한 인물을 키우는 것만큼 우리는 큰 기여를 하는 겁니다.
남대문에 방화를 할 사람을 미리 도와 사랑의 그물에 걸려 그 일을 방지했더라면 우리는 너무나 큰일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합니다. 남대문에 방화를 한 사람을 생각하면 정말 그 정신세계가 황폐했을 겁니다. 자신이 자기를 통제하지 못한 거지요.
이미 정신세계의 모든 체계가 마비된 것이지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하나 둘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그래도 사회규범이 통제를 이루었다는 거예요. 우리 이 사회가 통제되지 않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이 사회의 규범과 가르침과 모든 것이 최소한의 통제를 이루었던 겁니다. 그리고 사회 사랑이 없다고 해도 사랑과 베풂과 나눔이 사람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감동이 돼서 마지막에 어려운 순간에 행동을 자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마지막 사랑까지 결국 우리가 이제까지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했다는 뜻이고 이제까지 우리가 이룬 모든 일들이 부족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어떤 형편과 여건 속에서도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파악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이런 상태에서 생각해 보면 갑갑한 상태도 있는 것 같아요.

저희 교회 예를 들면 한 가지 하는 것 중에 여러 가지 일중에 하나가 청소년 희망찾기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주변에서 처음에 우리가 얘기를 들을 때 우리가 돌봐야 될 청소년들이 한 4백가정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 우리 성도들이 숫자가 이렇게 되니까 4백가정정도 우리가 돌보지 못하랴 생각을 해서 처음에 시험적으로 몇 십 가정해서 현재 80가정정도 해서 지금 더 되겠지요? 올해는요. 그리고 시간을 좀 더 전체적으로 가져서 이건 프로그램도 여러 가지 발전도 이런 여정 속에 4백 가정을 전체적으로 늘려서 다 감당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쪽으로 계산하면 전국에 6만개정도의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이거 한 교회에서 한 명씩만 생각해도 우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돌봐야 될 손길이 필요할 때 그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정말 우리 자식처럼 돌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것을 단순한 산술적인 생각이예요. 절대 그렇게 안 될 겁니다.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를 겁니다. 그러기에 다양하게 여러 가지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할 겁니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또 우리가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구성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우리가 잘하고 있다라고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교회 중에 정말 교회가 약해서 한 사람도 도울 수 없는 교회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에게 산술적으로 다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저러한 주변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 평가하기 전에 내게 맡겨준 사명이 무엇이다 생각하고 답답함 가지지 않고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분량을 묵묵히 감당하다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조합해서 어느 날 문득 그 일을 이루실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한 부분을 끼적끼적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나 그렇죠. 우리가 몇 사람 어떻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나? 참 답답하기 짝이 없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야말로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 심는 심정으로 그 일을 꾸준히 해 나가다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어느 땐가 우리들에게 주의 영광과 기쁨을 주실 때가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스스로의 의로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로움을 생각해 감사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봐 우리 자신을 더욱 더 경성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비록 우리가 맡고 있는 일이 작을 지라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에 기쁨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가장 잘 인도하고 조합하여 완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일을 그 분께 맡기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겁니다.

지난 월요일에 작년 연말에 기증한 낙도 복음선교회가 진수식을 가졌어요. 우리 여전도회에서 열심히 바자회해서 기금을 모았고 요청을 받았어요. 요청을 받아서 기금을 마련했고 저도 좀 보태서 배를 한 척 기증을 했는데 아마 그 배를 만들어서 물에 띄우는 출발하는 식이죠? 그래서 여전도회원들이 가서 예배도 드리고 배도 타보고 오셨나봐요. 제가 이 그렇게 사진을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일 마음에 와닿은 사진은 다른 사진이 아니라 항구에 정박해 있는데 여러 배가 있는데 그 중에서 등대호가 하나 있는 사진이더라고요.

그 선교회가 15년이 넘었다는데 여태까지 배가 한 척이 없었어요. 참 우리도 너무 미흡했지요. 그것도 모르고 여태까지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에게 그 배 한 척 보내달라고 제의가 와서 저희가 고민 없이 한 척 보냈는데 참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그 수많은 바다에 떠 있는 배중에서 그 낙도에 가서 복음 하나 전하겠다고 15년을 일했는데도 배가 한 척 없었다는 게 너무너무 알고 나서는 답답한 일이더라고요.
한 척이라도 그렇게 있으니 감사해요. 제가 그걸 보고 느끼는 게 한 척 더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 리 가자면 십 리 가면 안 됩니까?
겉옷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면 안 됩니까?
성경에서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죠?
그럼 배 한 척만 보내주셨으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척 보내면 안 되나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가 배운 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면 살아집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주시는 대로 할 수 없을 때는 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할 수 있다면 또 그때는 하는거지요.
삶이 어렵다 힘들다라는 것은 다만 죽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이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은혜를 이룰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시면 결국 믿음대로 주의 역사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백성을 방치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백성에게 은혜를 주셨으며 끝까지 인도하셔서 그 백성에게 은혜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기도제목 보면 참 이러저러한 가슴 아픔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 기도제목 내시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보고 하나하나 기도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건 한 번 더 기도해야지 하고 더 어려움 기도제목 있으면 이쪽으로 옮겨놔요. 이렇게 옮겨놓다 보면 또 너무 많아요.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하나 이렇게 하다가 더 기도해야지 하는데 이게 또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더 어려운 일들이 많다는 겁니다. 살다보면 참 어려운 일들이 많죠.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은 그 어려운 일을 어려운 일로만 보지 마시고 사람 숨 안 쉬면 죽었다라고만 말하지 마시고 정말 주님께서 아니야 잔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일으켜 세우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기대하며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임하여서 우리는 믿음으로 내 상황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은혜의 성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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