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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에 붙잡혀 사는 사람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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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붙잡혀 사는 사람 (빌 3:12-16)

예일대학의[로니 타워]박사가 6년 동안 재밌는 연구를 해서 내놓은 결론이 있습니다. <공처가나 애처가는 보통 사람보다 일찍 죽는다>는 결론입니다. 보통은 아내가 남편에게 의지하고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남편이 아내에게 의존해서 사는 것을 공처가 혹은 애처가라고 합니다. 그럴 때에 이 남편은'아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과 스트레스 때문에 일찍 죽는다고 합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부인이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런 전통적 부부관계 아래서 살 때에 남편도 부인도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부인이 남편을 이끌고 남편이 공처가가 될 때는 둘 다 일찍 죽는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남편에게서 풀리면서 자유라고 다른 것에 붙들리기 시작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은 어떻습니까? 둘 다 오래 살겠습니까? 하여간 연구결과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아야지 어떡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서 생각할 게 있습니다. 자유란 게 무엇인가라는 자유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무언가에 전적으로 매여서 살되 매일만한 사람에게 혹은 매일만한 무엇인가에 완전히 매여서 사는 것이 때로는 자유요 그 자유가 오히려 인간의 수명까지도 연장해 준다는 결론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에 매여 삽니다. 한 마디로 노예입니다. 명예에 매인 사람도 비참합니다. 자기 지식이나 자기 편견에 매인 사람은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못 바꾸고 끌려가는 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나쁜 습관에 매인 사람이나, 죄의 종이 된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반면에 이것을 좋은 것에, 유익한 곳에 나를 붙잡아 매고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건전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마땅히 매일 것에 매여야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을 잡았으면 목숨처럼 사랑해야합니다. 진실하고 오직 그 하나뿐인 것처럼 매여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에 매여 살 수 있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내 생의 전부인 것처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 첫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반드시 무엇인가에 매여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매여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삶의 이유, 삶의 목적은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쓴 시 중에<당신이 있음에>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면 / 당신은 하늘이 됩니다.
바람에 마주 서면 / 당신은 바람이 됩니다.
비를 기다리면 / 당신은 비가 되고
눈을 기다리면 / 당신은 눈이 되어 내립니다.

내가 기다리기 전에 / 언제나 먼저 오시는 당신
내가 다가가기 전에 / 이미 내게 와 있는 당신
누워도 길을 걸어가도 / 늘 당신이 내 곁에 있음이
내가 당신 떠나지 못하는 / 정해진 삶의 이유입니다.    -架痕/김철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께 잡힌바 된 존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잡힌바 되었다는 말은 포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붙들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고백은 순간적이거나 일시적인 고백이 아니라 아주 논리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이 고백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들의 얄팍한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자, 바울이 예수께 붙잡혀 산다는 고백에는 어떤 의미까지를 포함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바울의 고백에는 목적이 예수께 붙잡혔다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 빌1:21절에"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유명한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아니라 앞으로의 생까지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 갈, 한 마디로 목적이 주님께로 붙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자식의 번성을 위하여? 지식적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살아가십니까? 또 그 이외의 어떤 것입니까?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목적은"주를 위하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세상을 벗어나 주님께로 온 사람들이라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됩니다. 나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뀐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목적입니다. 목적 자체가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울의 고백에는 지식과 가치관이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조금 위쪽인 빌3:8을 보면"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해로 여긴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전날에 좋아하던 것, 믿기 전에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던 것 다 버리고 분토와 같이 배설물로 여기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좋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술도 좋아하고 좀 세상 적으로 사는 사람이 세상을 즐기면서도 항상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내가 이래 살다가 죽으면 틀림없이 지옥 갈텐데...'하는 게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문 앞에 딱 서서 이 사람보고 하는 말이"너 천당 갈래 지옥 갈래?"라고 묻더랍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싶어서한 번 더 자비를 베풀어주어서 천국과 지옥 둘 다 구경을 좀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기꺼이 승낙하고 먼저 천국을 갔습니다. 흰옷을 입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다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뒤에 좀 앉아있으니 세상에서 놀던 가락이 있어 가지고 따분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그래서 얼른 지옥으로 가보자고 합니다. 지옥에 가보니 카지노도 있고 술집도 있고 여자들도 많고 왁자지껄한데 그게 자기가 놀던 세상하고 똑 같아서 딱 맘에 들어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저는 아무래도 지옥체질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으로 보내주세요"그랬답니다. 베드로가 아무 말하지 않고 데려다 줍니다. 이제 지옥으로 갔더니 탄광 굴 깊숙이 들어가서 뜨거운 불 속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남자가 안내자에게"이거 좀 틀리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왔던 데가 여기가 아닌데요."항의를 했더니 안내자가 하는 말이"아, 이 사람아 그 때에는 관광비자로 왔고 이번에는 영주권으로 왔기 때문에 틀리는 게 당연하지"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우스운 이야기 이지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다. 천국은 아무나 갑니까? 유행가 가사가 아닙니다. 천국은 아무나 갑니까? 천국 가서 행복할 사람이 천국을 가지...그렇지 않습니까? 체질이 지옥인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여러분, 살아 있을 동안에 천국 체질이 되십시오. 그래야 천국가지요. 살아가면서 지옥 체질이 되면 죽어서 어떻게 천국 가겠습니까? 평소에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야 하는데 늘 생각기를'내가 어쩌다가 교회는 와가지고 이런 생고생을 하냐!'그러면서 항상 취미는 다른 곳에 가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다른 곳에 가려고 하고, 몸만 와서 앉아 있고 정신은 딴 데서 즐기고 있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간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천국 보냐줘도 자기가 견딜 수 없어서 지옥에 가지 않겠습니까? 천국체질이 아니라 지옥 체질이니까..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할 만큼 만족합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들 속에서 자신을 싹 빼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려 했습니다. 전에는 핍박자 그러면 그 안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안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쟁이 그러면 바울 할 만큼 그 안에 자신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술 그러면 아무개, 싸움 그러면 아무개, 괴팍한 성격 그러면 누구, 잔소리꾼 그러면 누구였지만 이제는 그 것들 안에는 내가 없고 오직 예수 안에 있는 누구 할 정도로 그리스도 안에 우리 자신이 발견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도바울의 고백은 계속적으로 좇아간다는 고백입니다. 12과 14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잡혔다"는 말은 노예의 신분입니다. 그러나"좇아가노라"는 말은 자유인입니다. 잡히는 것은 피동적이요 좇아가는 것은 능동적입니다. 더 이상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바를 전하고 얻은 바를 나누고 더 큰 능력을 얻고자 쉼 없이 달려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노년기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인생을 많이 살았다. 그런데 내가 살면 살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무슨 의미입니까? 인생은 내 맘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붙잡혔다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예수께 붙잡혀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깊은 뜻을 알고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야 될 것입니다. 이게<예수께 붙잡혀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무엇에 끌려오며 살았습니까? 이제는 잡으려고 좇아가야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붙잡힌 바를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께 붙잡힌바 된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입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받은바 은혜를 나누기 위해 계속적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을 받은 채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받은바 사랑을 나누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예수께 붙잡혀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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