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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병든 자를 위해 교회가 할 일 (출 15:25~26, 약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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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자를 위해 교회가 할 일 (출 15:25~26, 약 5:14~16)

우리 가운데 마음의 병, 육체의 병, 영적인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가 많다.
그러한 환자를 위해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병든 자는 병원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병든 자는 무조건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 밀은 인간이 의술을 통해서 병 고치는 것을 무시하거나 금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의사, 간호사, 약사들을 통해서 아픈 이를 고치고 새 인생의 기회를 주기 원하신다. 다만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께서 교쳐 주심을 믿으라는 것이다.

주님이 의사 중의 의사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의 병을 친히 고치셨다. 소경, 다리 저는 자, 손 아픈 사람, 귀머거리, 혈류병 걸린 자 등 각색 병을 고치셨다. 그러니까 아픈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다 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공식을 벗어나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병을 다루라는 메시지이다.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교회에 나오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병 고침의 은혜를 믿어야 한다.

마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하였다.

눅5:17을 보라.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그 병을 고치는 능력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병 고치는 능력을 교회에 주셨다.

고전12:9을 보라.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만나서 교회를 세워나가지만 그 중에 병을 고치는 은사를 주셨기에 교회는 아픈 자를 위한 돌봄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 되기를 포기한 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는 성령을 받은 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 베드로는 사도이기에 능력이 부어졌다고 한다면 평신도인 빌립 집사를 보라. 저는 말씀을 증거할 때 앉은뱅이, 중풍병자를 고치는 표적과 기사가 뒤따랐다.

행4:23~31을 보면, 사도들과 무리들이 일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행4:30을 보면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 사도와 무리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기도하던 곳이 진동하는 역사를 체험한다. 하나님이 진동으로 응답하신 것을 확인해 볼 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이 시대의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형식과 틀에만 매어있는 이유는 신유의 메시지를 교회가 외면하고 아픈 자는 모두 병원에 맡겨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병원이 많이 생겼어도, 또 병원에 크리스챤 의사가 많이 근무한다 하더라도 교회에 주신 메시지는 병든 자를 돌아보는 일이다. 병원은 경영과 의술의 발전을 목적하여 환자를 돌보지만 교회는 믿음과 사랑, 구원을 목적으로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

이제 병 고침을 위해 교회가 나서야 할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마8:16을 보라.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사람을 다 고치셨다. 이렇게 고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말씀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마8:17 “이는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질고’란 히브리어로 ‘병’을 말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은 찔리고 상하는 고난으로 죄와 허물을 대속하시고 징계와 채찍을 받으므로 평안과 나음을 이루신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가난한 나를 부요하게 하신 것처럼, 죄 없으신 분이 고난을 당하므로 죄 있는 내가 깨끗해 진 것처럼 주님이 병을 짊어졌기에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고침의 원리를 100% 믿었다.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킨 베드로는 벧전2:24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여호와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라고 하였다.

병 고침을 위해 교회가 나서야 하는 분명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할 일이 분명하다.

첫째, 믿음을 지녀야 한다. (약5:15)

초대 교회의 사도들, 제자들, 무리들처럼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출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런 하나님을 믿을 때 거기서 믿음의 기도가 나오는 것이다.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는 나면서 걸어본 적이 없는 자이지만 행14:9을 보면 바울이 그를 볼 때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은 일어서 뛰어 걷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 김성원이라는 어린이가 있다. 성원이는 뇌수막염을 앓은 이후 13세가 되도록 경기와 듣지 못함과 말 못함의 고통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질명의 장애물을 무엇으로 옮길 것인가? 바로 믿음이다. 믿음으로 나가자. 신유의 하나님을 믿고 병마를 박살나게 하는 믿음이 해답이다고 생각했다. 치료의 하나님이 고쳐주셔서 병이 낫는다는 믿음으로 싸워야 함을 보게 되었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둘째, 병든 자는 심방을 요청하라. (약5:14)

약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병든 자는 가만히 있지 말고 교회에 심방 요청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교회의 장로란 말은 오늘의 장로 직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로란 말은 연장자란 의미의 말이기에 장로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영적으로 성숙한 자, 신앙으로 무장된 자를 청하라는 것이다.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만 한다면 그 사역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 병든 자는 심방을 청해야 한다.
대개 아픈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가린다고 질병을 숨기고 심방을 받으려 하지 않는데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질병을 키우는 것일 뿐이다.

셋째,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약5:14下)

약5:14의 말씀처럼 우리의 기도는 내 이름으로는 아무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철저히 주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병마를 꾸짖고 쫓아내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요, 귀신이 떠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구원의 이름, 존귀한 이름이기에 응답이 이 이름으로 인해 나타난다.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의 이름을 앞세우자.

넷째, 죄를 고백하며 서로 기도하라. (약5:16)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병 나음을 위해 죄의 고백이 중요하다. 그런데 서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죄, 너의 죄를 서로 내어놓고 고백할 때 서로가 소통이 되고 서로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관계가 된다.

아픈 사람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 아프고 삶 전체를 포기하고 있기 쉽다. 그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기 쉽다. 그러므로 돌아보지 못한 죄, 함께 하지 못한 죄, 그의 아픔을 나누지 못한 죄 등 죄를 고백하는 모습으로 신유를 사모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기도요, 일치의 기도요, 용납의 기도다.
죄를 고백하자. 서로 서로 기도하자. 약5:16의 말씀처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서로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 나는 기도하지 않고 너만 기도하라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기도가 솔로로 올라가지 않아야 하고 기도가 하나되어 기도 오케스트라가 되어 올라가야 한다. 기도를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서로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그것이 의인의 기도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죄를 고할 때 주의 이름으로 구할 때 아니 서로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 그래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서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 성도들은 기도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서로 기도해야 하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다섯째, 기름부음을 통해 고쳐지는 것을 믿으라. (약5:14)

약5:14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고 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은 병이 들면 의사보다 랍비에게 먼저 갔다. 그때 랍비는 병자에게 기름을 붓고 기도했다. 기름은 본래 치료하는 약 중의 명약이라고 믿었고 교회는 또한 여러 세기 동안 기름을 바르며 기도했다. 이제 우리는 병든 자에게 감람유를 이마에 발라주며 기도하는 것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마치 약을 먹은 자가 나으리라는 소망을 갖듯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왜, 기름을 바르면 치유된다고 하는가? 그것은 성령의 상징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통해서 병 나음을 받는 것이다. 기름부음이 있으면 안수 기도가 없어도, 다른 치유를 위한 행동이 없어도 치유의 능력이 나타난다. 기름부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예배하다가 찬송하다가 사람들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 

  이제 여러분과 나, 그리고 오목천교회는 기름부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신디 레이콥스는 말하길 “각 교회가 주일 예배 때에만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24시간 개방하는 기도실을 마련하여 24시간 동안 병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24시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24시간의 교회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교회가 24시간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병 낫기를 위해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가 힐링 플래이스(Healing Place)가 된다면, 기도실이 힐링룸(Healing Room)이 된다면 교회가 해야할 일을 찾은 교회가 될 것이다.
기름부으심이 있는 교회, 그것은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데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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