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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에게 긍휼을 베푸심은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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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긍휼을 베푸심은 (딤전 1:12-17)

  기독교는 변화를 기대하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시작은 좋았지만 그 마지막은 패망으로 끝이 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악으로 마친 구약의 사람 사울 왕을 모델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그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간 성경의 인물 바울을 소개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사울 두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름이 같고, 출신 가문이 같습니다.  구약의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던 인물이고, 겸손하고 잘 생기고 강력한 리더십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의 사울 역시 베냐민 지파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유력한 가문에서 성장하여 그 당시의 최고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로 공부하여 구약의 율법에 능통할 뿐 아니라 헬라 철학에도 밝은 학자였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으로는 구약의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력한 부모 덕에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민족 히브리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그 당시 잘 나가던 엘리트 집단에 속한 피 끓는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회심을 한 후에 여러 지방의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자신을 소개한 내용들을 참고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삶을 살기 전에는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과 학문의 열정, 그리고 혈통적 자부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던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내가 이전에 유대 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1:13-14)

  빌립보서 3장을 보면,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3:5-6)

  그리고 오늘 읽은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니라’ 하였고, 15절에는 ‘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는 말로 하나님께 긍휼을 입기 전 자신의 실체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따라 자신이 신봉하는 여호와 신앙에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열심이 있던 사람, 자신의 지식과 신념으로 형제들을 억압하고 판단하며 십자가 복음을 사악한 교리로 여기고 비웃고 비아냥거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진리를 가장 선한 것으로 여겨 그 지식과 신념과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정치와 종교의 힘을 빌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훼방자, 핍박자로서 살인을 마다하지 않고 갖은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입은 순간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것임을 깨달은 이후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긍휼,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의 다른 죄인들에게 알리는 본이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그는 나 같은 죄인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께 감사를 드린다고 찬송합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로 임명 받아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그 시점으로부터 성경은 그의 이름을 유대인의 이름 사울 대신 헬라어 이방인의 이름 바울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삶이 바뀌고 이름이 바뀐 바울이 드디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사도로 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하늘로부터 강력한 빛 가운데 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회심한 이후로 그는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그 삶의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옥에 가두며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 서고 예수 믿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던 자였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며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양육하며 끝내는 그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아낌 없이 드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이 전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처음 시작은 은혜스러웠지만 그 마지막은 하나님을 버린 비참한 결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사울은 그 시작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백할 만큼 하나님께 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충성스런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자기 왕국을 세우고 왕좌를 지키기에 급급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과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에 헌신했던 종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을 둘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자신의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대답을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일수록 비관적입니다. 사람을 돌이켜 새롭게 할 수 있을까 하여 세상의 좋은 말로, 사랑으로, 물질로 갖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될 때 사람에게 희망을 둔다는 것이 이렇게 어리석고 허무한 것인가 하고 실망을 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되는 존재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교회에 다니면 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 희망을 접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에 대하여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닌 자신의 변화된 삶을 증거로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변화를 체험하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변하여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을 받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은혜로 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만 바울은 사람에게 찾아오는 변화의 능력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의롭다 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분명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기 전 그는 자신이 알고 믿고 따르는 율법이 그를 의롭게 만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라 여겨 그 율법을 준수함으로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혈통과 가문을 자랑거리로 여겼던 사울이었습니다.  학문과 지식과 종교적 열심을 자랑거리로 내세웠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 그 동안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내세웠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것임을 발견하고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7절- 9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는 절대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사람에게 진리의 빛과,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시니 어두움이 변하여 광명이 되고 절망이 희망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체험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의 긍휼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나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감히 누가 이처럼 배경 좋고 똑똑한 청년 사울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동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공의 앞날이 훤히 열린 그렇게 부요한 집안의 아들을 가리켜 어느 누가 불쌍한 인생이라고 측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습니다.  네가 붙잡고 따르며 자랑하는 그것들이 너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 찾아와 그에게 새로운 삶을 보이시고 새 생명을 선물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청년 사울처럼 자랑할 것이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괜찮은 가문, 남 부럽지 않은 학벌과 직장, 외모와 재력과 종교적인 열심과 도덕적인 삶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내세울 만큼 충분한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 세상의 그 무엇보다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고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그보다 소중하고 값진 선물로 얻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그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나는 예수께서 구하러 오신 그 죄인들 가운데 가장 못된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고 나를 긍휼히 여기신 이유는 앞으로 나처럼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을 사람들에게 저 사울 같은 죄인 중의 괴수도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어 구원을 얻었으니 누구든지 그 긍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하였습니다.  나를 다른 모든 죄인들의 예(example)가 되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겸손히 고백한 바울은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일군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감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이것이 변화된 사람 바울의 모습이다.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는 사람들에게 내가 본이 되게 하시리라는 바울의 말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열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을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감사하며 나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삼으심에 감사하며 삽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시어 말씀으로, 사건으로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 부르고 계십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에 놀라 “주여 뉘시니이까?” 하고 엎드려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긍휼은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수 많은 예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바울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기풍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865년에 태어난 유명한 평양 깡패 출신 이기풍은 일제 시대에 억압받는 민족의 설움을 방탕과 주먹으로 풀면서 살던 깡패였습니다.  어느 날 마모 삼열 선교사가 그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하자 서양 선교사의 전도가 싫어 돌맹이를 던져 선교사의 턱을 깨뜨린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깡패들을 동원하여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이기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를 보고 양심이 찔렸던 이기풍은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을 증거할 사람이다’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놀라 잠에서 깬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던 중 원산에서 만난 스왈렌 이라는 선교사가 또 다시 그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외치는 말이 마치 하늘에서 울리는 우뢰처럼 들려 그 자리에서 굴복하고 예수를 믿기로 하였습니다.  회심을 한 이기풍은 먼저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사죄를 하였고 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로서의 수업을 하였으며, 평양 대부흥이 발발했던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인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주도 선교사로 자원하여 갖은 핍박 속에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항거하여 신앙을 지키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한 이기풍은 77세의 일기로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신학과 사상의 커다란 봉우리였던 성 어거스틴 역시 젊은 시절에 방탕한 삶과 종교적인 깊은 고민 속에 지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회심하고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던 좋은 예입니다.  수사학에 관심이 많았던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매력을 느껴 그의 설교를 통해 수사학을 배우다가 성경을 알아가면서 믿음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말씀과 삶 사이에 일치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삶에 갈등하던 그는 자신이 여전히 죄의 노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참함 가운데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왜 나의 추한 죄들을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까?' 자문했고 고통 중에 울고 있을 때 갑자기 담 너머로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하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성경을 펼쳐 눈길이 닿는 첫 구절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이 일은 그 동안 고민 중에 있던 어거스틴을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고 그의 회심은 오랜 방황의 종식을 의미하였습니다.

  어거스틴 외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영국 교회의 좋은 예들이 있습니다.  노예상인에서 목회자로 변신하였던 존 뉴튼이나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앞장 섰던 윌리암 윌버포스와 같은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순종하고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 의 작사자로 더 유명한 존 뉴튼은 노예무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부르짖었고 주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된 지 4주 만에 뉴튼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뉴튼은 이 일을 통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어떤 죄인이라도 영접하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노예무역을 그만 두고 목사가 되어 버킹검에서 16 년 간을 그리고 올니 교회에서 27 년 간을 봉사하였습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찬송하였던 뉴튼의 생애는 아무리 비천하고 추악한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도가니에 녹아 내리지 않을 심령이 없으며 주께 돌아오면 주의 충성스런 일군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교훈을 잘 보여줍니다.

  영국의회 역사상 21세 최연소의 나이로 의회에 진출했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캠브리지 대학을 다니던 25세 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후 기독교적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전의 습관들을 모두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가 27세였을 때 쓴 일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일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국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고 하였습니다.  윌버 포스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운동을 전개하였고 의회에 노예폐지법을 제출하여 강력한 반대자들과의 수 많은 논쟁을 통해 영국의 악법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가 힘들어 할 때마다 존 뉴튼이 그의 맨토가 되어 격려하였고 온갖 회유와 협박에 맞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갔던 윌버포스는 1833년 7월 27일, 그 뜻을 세운 지 46년 만에 영국 국회가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보고 약 한 달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예수를 믿으므로 완전히 바꾸어집니다.  그리고 변화된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민족의 운명이 바꾸어지기도 합니다.  회심은 바울과 어거스틴이나 뉴튼, 윌버포스 그리고 이기풍과 같은 유명한 분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회심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긍휼을 베푸심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남기게 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갑시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나를 또한 본으로 삼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복을 누립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 다음으로 미루지도 맙시다.  나를 바꾸어 새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오늘 그리고 지금 주의 자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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