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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도 종 나름입니다 (롬 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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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종도 종 나름입니다.
본문 : 로마서 6:15-23

전에 시무하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에게 지난주에 메일이 하나 도착을 했습니다.
아들이 철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감사를 전하는 문안 인사 편지였습니다.
편지의 말미에 참 짧은 글이지만 감동의 글을 적어서 보냈는데 은혜가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2008년 목사님의 목양터에 철들어 가는 ‘크리스티아누스’들 까닭에 가슴 저리도록 행복한 날 들이 많아지는 신나는 목양을 중보합니다.
목사님!, 살려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1,000명 , 10,000명 , 100,000명.
지체 할 시간이 없잖아요. 주 안에서 하 실 수 있잖아요.”

글을 보낸 집사님은 진해교회에서 셀 목장의 목자로 신실하게 주의 시역을 감당하는 분입니다. 

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내 생각의 가장자리에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자리를 잡고 있는가를 묵상할 때 내 생각이 진정으로 살려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의 심정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어떻게 하면 나의 삶에 손해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에 따라 나는 진정한 예수쟁이인가 아니면 이름만 있는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인가는 판가름이 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점심식사를 할 때 사랑의 교회 원로 목사님인 옥한흠 목사의 설교 동영상을 틀어 놓고 설교를 들으며 식사를 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좋은 의미인지 아니면 나쁜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저의 설교 내용이 옥한흠 목사와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해서 그 분의 설교를 들어 보았습니다.

지난 2월 3일 사랑의 교회의 주일 예배 시간에 선포했던 설교를 식사를 하면서 들어 보았습니다.
듣다가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 놀랐는지 아십니까?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똑같을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옥한흠목사님의 설교를 최근에 들은 것은 작년 100주년 한국교회 대성회에 ‘주여 한국교회를 살려주옵소서!’라는 여러분과 함께 영상주일을 통하여 들은 것이 유일한데 어쩌면 옥한흠목사의 메시지의 내용과 이 목사의 메시지의 내용이 똑같은가를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생각이 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2월 3일 주일 예배 설교의 옥목사님의 설교의 내용 중에 ‘긍정의 힘’을 쓴 조엘 오스틴 레이크우드 교회의 담임목사에 대하여 아주 엄격하게 비판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유는 그의 메시지는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 역시 작년 연말 즈음에 설교를 통하여 조엘 오스틴의 비성경적인 사상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설교를 행 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똑같습니까?
다시 말합니다.
생각이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인정하고 동의할 때 우리들의 머리에서 고정되는 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옳다고 인정하여 생각하는 것에 우리는 우리들의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순종’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어진 구절 중에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 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 사람들이 생각을 고정하고 순종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첫째, 죄에게 순종을 하든지 둘째,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종의 종이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이 가는 대상이든 아니면 사상에게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 생각이 머무르고 따라가는 그 대상에게 나는 순종을 하는 종이 된다는 말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하여 두 종류의 종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공유하려고 합니다. 


1. 우리는 죄의 종으로 살았고 또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우리들의 모습을 정의합니다.
‘본래 죄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재삼 강조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미 에베소서 강해를 통하여 살펴보았던 엡 2:1-3절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대로 우리는 이 세상의 풍조를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공중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았을 때의 우리들의 삶은 죄를 긍정하고 죄에게 우리들의 생각을 고정하고 죄의 종이 되어 살았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죄의 종이 되어 살도록 사탄은 우리들을 공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공략을 무너져서 죄가 하라는 대로 하고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철저한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죄의 종으로 살아 왔던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조금 더 확산하여 죄의 종으로 살 경우 맞이하게 되는 결론까지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20-21절을 주목하십시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① 의에 대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표현 자체가 점잖은 표현이라서 그렇지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막 살았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표현된 ‘의’라는 단어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dikaiosuvnh’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라는 단어는 신학적으로는 ‘의롭다고 인정한다.’라는 ‘칭의’의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또 다른 원어적인 의미가 바로 ‘공정하게 살다.’, ‘올바르게 살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원어를 적용하여 해석하면 죄에 종이 되어 산다는 것은 올바르게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정하게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논문 작성에 올인하고 있어서 세간에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잘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집에는 TV도 없어서 뉴스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논문을 작성하는 기도원에서 있다가 교회에 들어오면 중요한 인터넷 기사를 스크랩하는 데 분주합니다.

교계의 인터넷 뉴스를 스크랩하는 동안 지난 주 한 주간 동안 이슈가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가능하면 아주 객관화시켜서 해석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지난주에 교계에서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MBC에서 방송한 뉴스 후라는 프로그램의 후폭풍이 거세다는 기사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첫 번째 방송을 인터넷을 통하여 보고 목회자의 세금문제 등으로 연이어 이어진 방송의 첫 회 분을 보고는 그 다음에는 시청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어진 방송이 나간 뒤에 우리 교계에서 한기총을 중심으로 하여 MBC 방송국의 시청거부와 시청료 거부 투쟁 및 심지어 MBC를 민영화시켜서 기독교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여론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MBC가 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전쟁(?) - 말의 어패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느낌 자체가 그러니까 또 한기총에서 이 단어를 쓰고 있으니까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 에 대하여 현직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유쾌하거나 아니면 묵과하는 그런 회색지대에 서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또 MBC가 지금 내보내고 있는 한국교회와의 전쟁에 대하여 MBC를 향하여 그들이 잘못 보고 있는 편향된 부분을 지적하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MBC가 한국교회를 통하여 질타를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습니다.
한기총에서 말하고 있는 가장 앞선 대변의 말처럼 한국 대형교회의 일부의 잘못된 부분을 전체 한국교회의 모습인 양 왜곡하고 있는 MBC에 대하여도 저 역시 분노가 일어날 때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묵묵부답으로 지금 MBC가 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대형교회에 일부 목회자들의 일탈로 매도하기에는 너무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살라고 하시는 방법대로 솔직히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의 일부 세습을 한 목사들,
정치에 편승하여 예언자적인 삶을 살지 못한 목사들,
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는 일부 목회자들에 앞서
우리들이 정직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디카오수네’(칭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내 가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다른 방법의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것에 대하여 도리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의 종이 되어 막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정신차리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에 가슴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셀 목장의 목원에게 간증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금요일 셀 목장예배가 기다려집니다. 목장예배를 드릴 때 목원들이 함께 나눔을 갖습니다. 서로의 진솔한 나눔을 갖고 기도하는 그 나눔의 본질은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을 붙들고 한 주간 어떻게 승리했는가를 보고할 때 어떤 때는 은혜의 울음바다가 되고 또 어떤 때는 웃음으로 도배를 합니다. 우리 목장에서 느끼는 가장 큰 감격은 선포된 말씀을 붙들고 한 주간 동안 세상의 권세들과 피터지게 싸우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했는가를 보고하는 감격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있는 한 이런 간증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나눌 수 없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 있으면 막 살기 때문입니다.
막 사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20절을 다시 목도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② 죄의 종이 되면 얻어지는 또 다른 결과가 있는데 죽음입니다.

본문 21절과 23절입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3절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망’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qavnato"’ 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1) 육체의 죽음, 영과 육의 분리 : 생물학적인 죽음
2) 은유. 죄로 인해 야기된 영혼의 비참함 : 영적인 죽음
3) 죽은 악한 자들의 지옥에서의 비참한 상태 : 영원한 죽음
4) 죄로 인해 야기된 모든 비참함을 포함하는 죽음 : 온전한 죽음

이 4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까?
‘완벽한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으로 살 때 오는 결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옥한흠 목사의 설교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혼의 건널목이다. 건널목을 건너면 그 다음 종착역이 있는데 그것이 심판이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 죄에서 떠났지만 다시 죄의 종이 되어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의 결과는 완벽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장병들의 영결식이 제1사령부장으로 경기도 성남 국군 수도병원에서 열렸습니다.
영결식에는 가족들과 장병 4백여 명이 참석해 고인들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습니다.
순직한 7명의 장병들은 22일 오후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었습니다.
사건의 동영상을 보는 데 하나의 말 머리가 지워지지 않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날 벼락같은 소식을 들은 한 유가족이 시신이 들어오는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랐어. 이런 일은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줄 알았어’
하고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죽음은 큰일입니다.
누구나 피해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땅에서의 이별을 선언하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슬픈 일입니다.
육체의 이별도 이렇게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는데 이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 육, 혼의 완벽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맛보는 자들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계 21: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나는 이 비극의 주인공들이 하나도 우리 교회에는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어떤 종이 되어야 합니까?

 
2.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순종의 종이 되라고 역설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바울은 이번에는 의의 종이 되라고 역설합니다.

마지막 2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바울의 회심의 일격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임합니까?

본문은 말합니다.
그 종에게는 영생이 임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세 가지를 다시 복습합니다.
바울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종이 무엇입니까?
순종의 종, 의의 종,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로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철저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교우들이 주목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말은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33-40절은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는 비유입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가 실과 때가 가까이 와서 돌아옵니다.
이제 주인은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의 농부들이 욕심을 갖고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서 상처를 내서 쫒아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인이 더 많은 종들을 보냈는데 역시 그렇게 화만 당하고 쫒겨났습니다.
생각 끝에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말은 듣고 공경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이제는 상속자가 왔으니 그를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자고 결의를 하고 포도원 밖에서 아들을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소위가 참으로 악합니다.
이 사람들이 무엇이 악했습니까?
주인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주인은 아들까지 주었는데 그 아들을 농부들은 죽였습니다.
성경은 이 기사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마 21:40-43절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우리는 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아주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습니다.
주님은 참으십니다.
또 참고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자는 진멸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이 말을 오늘 우리의 현실에 맞게 표현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종은 종이어야지 주인일 수 없다.”
 
성경은 역설이라는 것을 참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종이 주인이 되려면 멸망이지만 종이 종으로 순종하고 충성하면 세상의 종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영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23절에서 바울은 힘 있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나는 우리 교우들이 이 영생의 복을 놓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지금 소천하셔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 계신 기억에 남는 선배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서울 서지방 소속의 역촌교회를 개척하여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신 고 김효겸목사님이십니다.

제가 파주에서 목회를 할 때 힘든 교회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들을 헌신예배에 세우고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시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역촌교회 단에서 헌신예배를 인도하였을 때였습니다.
그 날 헌신예배의 기도를 맡으신 권사님이 기도한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30대 초반의 목사가 설교를 하니까 이렇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오늘 단위에 세우셔서 말씀을 증거하실 젊은 종님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게 하시옵소서.’
그냥 여기까지만 기도를 했으면 했는데 이제는 담임목사님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당시에 50대 중반이셨던 김효겸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의 담임을 하시는 노종님을 붙들어 주셔서 목회를 잘 하실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가 끝나고 담임목사님이 저를 소개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웃던 웃음을 머금고 선배목사님이 나오셔서 이렇게 농을 던지셨습니다.
‘이제 늙은 종놈이 우리 교회에 오신 젊은 종놈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날 그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파안대소하였습니다.
웃음이 끝나자 선배목사님이 의미 있는 말을 던지셨습니다.

‘여러분은 웃었지만 저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 아닙니다. 종은 종놈이지 종님이 아닙니다.’
이 땅에는 계시지 않지만 저는 그 날 선배 목사님의 그 말을 제 육비에 새겼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목사든 평신도든 우리는 하나님의 종놈들입니다.
종이라고 해서 다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종은 종님은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놈은 될 수 없습니다.
종이라고 다 종이 아닙니다.
종도 종 나름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쇠사슬에 묶인 종들이 되십시다.
죄의 종이 되지 마십시다.
진정으로 종다운 종
주님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종다운 종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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