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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머무는 삶, 떠나는 삶 (창 11:1~9, 창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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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11:1~9, 12:1
제  목 : 머무는 삶, 떠나는 삶 

1. 머물려는 욕망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께서 너무나 잘 아시는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은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으로부터 동쪽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다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시날 평지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성과 대”를 쌓기 시작했는데요. 이 “성과 대”라는 것이 소위 말하는 ‘바벨탑’입니다. 그렇지만 이 바벨탑은 서울의 남산 타워나 부산 용두산 공원의 타워와 같은 식의 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탑에 대해 “성과 대”라고 하는데요. “성”이라고 하는 것은 규모 면에서 도시나 촌락이 구분 되지 않는 집단 거주지를 말하며, 단지 성과 촌의 차이는 성벽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날 평지에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고, 그 주위를 “대”로 둘러쌓았습니다. 여기서 “대”라는 것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뜻하기도 하고, 도시 외곽에 구조와 생김새가 아주 거대하고 높은 망루, 혹은 탑처럼 생긴 구조물을 쌓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의 후손들이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그 주변에 “대”라고 하는 둥근 모양으로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성, 혹은 견고한 요새 같은 것을 만들어 그 도시를 둘러싸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성과 대”를 건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성을 쌓고 대를 높이 세운 이유 “자신들의 이름을 위하여”

오늘 본문은 홍수 이후 사람들이 성을 쌓고 대를 높이 세운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 그들이 성을 쌓고 그 주변에 거대한 탑과도 같은 대를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쌓아올린 이유가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는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내자”라고 할 때 ‘낸다’는 말의 의미는 ‘만들다, 이루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이 바벨탑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했을 때 그 의도를 읽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때는 홍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다 한 핏줄이었고, 가까운 친지들이었으며, 또한 그들은 함께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하는 것, 즉 창조주 하나님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이름으로 무엇을 만들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무엇을 이루자고 하는 것은, 주변에 있는 다른 종족이나 또 다른 누군가를 지목하여, 그들과 경쟁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면서 상대하고 싶었던 존재, 자신들도 뭔가를 해내고 이루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대상은 누구였겠습니까? 그는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습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당연히 홍수였겠지요. 홍수는 세상이 뒤집어진 변화의 사건이었고, 노아 가족 외에 모든 사람이 죽고 방주에 든 동물 외에는 모든 동물이 소멸하는 등 옛 세상이 가고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 사건이었고, 기후와 환경과 동식물과 사람의 생활여건까지 모조리 변하게 만든 사건으로서, 홍수 사건은 그 엄청난 위력과 무시무시함 때문에 생각만 해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가도 홍수의 기억과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한 이유는 바로 이 홍수의 참혹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라랏 산과 멀리 떨어진 시날 평지로 왔고, ‘이만하면 홍수로부터 멀리 떨어져왔고, 이런 곳이라면 우리의 안전한 거처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곳에 성과 대를 쌓게 된 것입니다. 성을 쌓을 때, 그들의 마음에 있었던 생각은 '만약 또 다시 홍수가 온다고 해도 없어지지 아니 할 성을 쌓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돌보다 더 강한 ‘흙벽돌’을 만들었고, 그 사이 사이를 오늘날의 아스팔트와 같은 ‘역청’으로 붙여가며 성과 대를 쌓았습니다. 그렇게 쌓은 구조물이 하늘에 닿을 만큼 되기를 바랐습니다. 비를 내리는 구름보다 더 높이, 구름 위 하늘 끝까지 쌓아서, 노아 시대 홍수보다 더한 홍수가 나더라도 안전한 곳이 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모습과 태도를 ‘자기 이름을 내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단순히 홍수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홍수가 났는지,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신 뜻과 그 이후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조차도 잊거나 외면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또 다른 홍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된 존재,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께 맞설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아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분’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분명히 그 후손들에게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일러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노아의 말은 믿지 않았습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던 노아의 후손들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편하고 좋은 존재가 아니라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타락입니다. 신앙생활이 부담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종말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하려던 인간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나요? 오늘 본문은 그들이 쌓던 성을 다 쌓지도 못했다는 것과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생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부터 떠나려한 사람들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만큼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상속지분을 받아 외국으로 갔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면서 인생을 마음껏 즐기면서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가 먹는 사료조차도 먹을 수 없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개만도 못한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돼지만도 못한 ×”일 텐데요. 탕자는 바로 돼지보다 못한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그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이름을 내고, 자신이 뭔가를 이루려고 한 사람들의 비참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죠.

아마 여러분은 “타이타닉”호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영국이 제국의 명예를 걸고 영국의 영광을 세계에 자랑하기 위해서 만든 배였습니다. 영국의 힘, 영국의 능력, 영국의 지혜를 다 동원해서 최고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46,328 톤, 배의 길이 259 미터, 높이 20 미터, 폭 28 미터인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럽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가장 튼튼하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였습니다. 영국인들은 이 배를 만들고서는 ‘아주 강하고 탄탄하다’는 뜻으로 ‘타이타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배는 “절대로 침몰할 수 없는 배”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까지 했습니다. 이 배가 처음 출항할 때, 그들은 이 배가 크고, 강하고, 화려하고, 뿐만 아니라 속도에서도 최고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랬던 이 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해 4월 14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타이타닉 호는 미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해안통제소로부터 “빙산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를 신뢰했던 항해사는 이 사실을 선장에게 아예 보고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급해진 해안통제소는 계속적으로 무전을 보냈지만, 이것을 계속 무시하던 항해사는 자리를 비우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타이타닉 호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되었을 때, 마지못해 선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전방에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 말을 들은 선장은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네. 항해를 계속하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몇 분 뒤, 타이타닉 호는 얼음덩어리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크고 강한 배라고 여겼던 바로 그 타이타닉호가 파선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배에 승선한 사람 2208명 중에서 1513명이 죽어 해양사고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 본문이 주는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이 자기 세계를 만들려는 모든 인간의 계획은 이렇게 비참하게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이 살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떠나고 교회로부터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요 따라서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됩니다.

2) 성을 쌓고 대를 높이 세운 이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노아 후손들이 시날에 머물러 성과 대를 쌓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오늘 본문은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합니다. 시날 땅에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사람들 모두, 흩어지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만족하려하며, 자신의 복은 자신이 얼마든지 가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 그래서 강해지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대로 됩니까? 강해지자고 하면 강해집니까? 하나 되자고 하면 하나가 되는 겁니까! 뭉치자고 하면 잘 뭉쳐집니까?

이러한 바벨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입니다. 기업들의 합병과 통합 등으로 거대기업, 공룡기업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은행들이 합병하고, 자동차회사들이 합병하고, 항공사들이 합병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대규모 메머드 교회들, 각 지역에 지역 성전을 만들고서 위성방송으로 본당 예배를 생중계하면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바벨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좋은 교회, 성경적인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요, 떠나보내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온 땅에 흩어져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홍수 이후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창 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 9:7).” 즉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한 곳에 머물기보다는 온 세상으로 펴져 나가서, 온 세상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람들이 실수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뭉치고 단합하면 어느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아니 하나님이라도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까? 지난 역사를 볼 때 세계 최강대국을 꿈꾸었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다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듯해도 하나님과 그 약속을 신뢰한 유대 민족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축복하신 후,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옵니다(약1:17). 그러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자신의 축복을 얻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붙어있는 것,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고 가장 안전한 것이고 가장 잘사는 인생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fortress mentality

우리가 이상에서 살펴본 것, 즉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땅에 거대한 성과 높은 대를 쌓으면서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는 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fortress mentality”라고 합니다. “요새 사고방식”, “요새 심성”, “정착 마인드”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서 거기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자기 행복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의 세계는 자기가 구축해간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왜 그들의 바벨 씨티 건축을 더 이상 못하게 하시고 그 사람들을 흩어버리셨을까요? 요새에 머물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으로 흩어지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은 오늘 본문처럼 강제적으로 흩으실 것입니다. 안정된 삶,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는 혼잡, 심판, 흩어짐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머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도 없습니다.

이런 삶에 대해서 오늘 본문 중 하나인 12장 1절 이하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떠나는 삶

창세기 12장 1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 바벨 공동체로부터 떠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익숙하고 평안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 성과 대를 쌓아 안전하다 생각하고, 또 자기 이름을 내려하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는 세계로부터 떠나는 것, 이것을 전문용어로 “pilgrim mentality”라고 합니다. “순례자 정신”, “나그네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늘 있어 온 그 자리, 편안하고 안정된 자리, 그냥 그대로 있다가 적당하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자기 세계 자기 인생에서 떠나는 것이 순례자 정신이요,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 삶인 줄 아는 성도의 삶입니다. 순례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현재 사는 곳이나 현재의 삶에 영원히 머물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거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떠났습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는 이 아브라함의 삶과 같이 자신의 삶을 “천국을 향한 노마드”라고 했습니다. “노마드”란 ‘유목민,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몽골말입니다. 따라서 “천국을 향한 노마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어 서라고 멈추어 서는 삶이요,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땅의 것, 사람의 것, 세상의 것을 내려놓는 삶을 말합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예외 없이 '떠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야곱도 세상적으로 성공한 삶을 누렸던 밧단아람을 떠나 형 에서의 위험이 기다리는 벧엘로 향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과 미디안 광야를 떠나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85세의 갈렙은 안정되고 좋은 여건의 땅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가장 악조건의 땅을 향해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 야곱, 안드레는 자신들의 그물과 배와 부모까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떠났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기록을 바울 사도가 로마의 셋집에 머물면서 주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쳤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셋집살이하는 삶, 그리고 복음 전하는 삶, 이것이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행28:30,31).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면, 오늘의 바벨에서 떠나십시오. 여러분, 이 말씀이 지금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떠나라는 말씀이 아님은 아시죠? 여러분이 한 교회에 머물고, 한 직장에 머물고, 한 지역에 머물더라도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기서 더 많이 소유하려 하거나, 안주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거기를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사역지로 보고 그렇게 생활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순례자의 삶”일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에게 익숙한 장소와 생활, 나아가 그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대한 집착과 안주하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움직이려하지 않고, 일하려하지 않고, 익숙한 세계에 그대로 머물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만약 고집스럽게 그렇게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보내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3. 순례자의 삶을 사십시오.

오늘 본문은 성도는 자신의 삶이나 어느 장소 어떤 환경에 안주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인 천국뿐일 줄로 알고,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려고 하는 본성을 거스르고 버리면서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순례자 정신이요 나그네의 마음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Fortress Mentality와 Pilgrim Mentality, 머물려는 욕망과 천국을 향한 순례자로 살아가려는 마음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십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거부하면서 순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늘 떠나는 삶, 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삶, 여러분의 가나안으로 향해 길 떠날 준비가 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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