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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대 기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실수 (눅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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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2:41-51
제목 / 현대 기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실수

어느 여인이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상점에 들어가 잡지 한 권과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왔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서 대합실에 앉아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쳐다보니까 옆에 어떤 신사가 방금 자기가 놓아둔 과자 봉지를 뜯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지만 뭐라고 해야 될지를 몰라 그저 자기 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도 아무 말 없이 하나 집어먹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그렇게 말도 없이 계속해서 하나씩 집어먹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남자가 마지막 과자를 집어 들더니 절반으로 쪼개어 절반은 놔두고 절반은 자기 입에 넣고는 씽긋 웃으면서 자리에 서 일어나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런 강심장도 다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여인은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와서 그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그 남자의 뻔뻔스런 모습이 계속 아른거려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러다가 안경을 닦기 위해 휴지를 꺼내려고 종이 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 자기가 샀던 과자 봉지가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열심히 집어먹은 과자는 실상 자기의 과자가 아니고 그 남자의 과자였던 것입니다. 여인은 "아차" 했습니다. 과자를 사서 가방에 넣을 것을 모르고 그 남자가 자기 과자를 먹는 줄 았았던 것입니다. 그 남자가 어떻게 생각했을 까를 생각하니 그 여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애교로 봐줄 수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싱긋 웃으며 갔겠지요?

실수란 본의 아니게 잘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실수도 있지만 때로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해 전에 대구에 사는 황대홍씨(29)가 교통사고를 당해 밀양시내에 있는 어떤 병원에서 장 파열 봉합 수술을 받았으나 계속 배가 아파서 다른 병원에서 C.T촬영을 한 결과 뱃속에 길이 20cm 가량의 수술용 가위와 가제 2 뭉치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수술한 의사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지만 실수가 이 정도가 되면 큰일입니다.
실수란 이렇게 사소하고도 재미있는 실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기도 하는 실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도 세 가지의 실수를 하였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범한 3가지의 중요한 실수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를 잃어버린 실수

본문에 보면 전통에 따라 소년 예수는 12세가 되는 해의 유월절에 그 양친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눅2:43절에 보면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들이란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한 주간의 날들을 의미합니다. 즉 유월절 행사가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가 다른 친척들과 함께 뒤 따라 오고있는 줄 알았습니다.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고 열심히 하룻길을 갔습니다. 가다가 찾아보니 예수는 동행중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이런 실수를 합니다. 예수를 잃어버리는 실수 말입니다. 혹시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 없습니까? 무엇이 예수를 잃어버리게 했습니까?

1) 안일한 생각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친척들의 틈에 끼여 당연히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려니 했습니다. 그리고 평안하게 길을 갔습니다. 적어도 예수가 자신들의 일행 속에 없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사고 방식 속에 평안함을 추구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면 될 수 있으면 그것이 영적으로 아무리 유익하다해도 모험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가 자동적으로 자기와 함께 하려니....하고 평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고합니다.

살전5:3절에서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라고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평안 제일주의는 예수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교회 다니고 있고, 규정된 종교 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예수는 나와 함께 동행하고 있겠지.. 라고 안심하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힘들어도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귀찮아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2) 예수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예수가 함께 따라 오는지 안 오는지 중간에 한번만 살폈어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잊고 있다가 아니 막연하게 동행중에 있겠지 하고 무관심했다가 저녁에 찾아보니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대화의 내용에 예수 이야기가 얼마나 등장합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얼마나 예수님 생각과 뜻을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도 믿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마25:41-46절에 보면 심판 날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심판은 마25: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준엄하게 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한 무관심은 주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귀찮은 일을 왜 합니까? 바쁘고 피곤한데 무엇 때문에 남도 하지 않는데 합니까? 때로는 죽도록 일해 놓고 좋은 소리 듣지도 못하는 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일합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려고 그릇을 들고 샘으로 달려갑니다.

“로베레 장군” 이라는 영화에 보면,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온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는 저항 운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저 평안하기를 바라는 자인데, 이렇게 처형당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일이 없다.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때, 한 저항운동가가 옆에서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도시가 파괴되었고,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 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매우 인상 깊은 말입니다.

사실, 빈둥거리며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은 큰 죄입니다. 성도는 자기중심적인 시간이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간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부터 맡은 사명적인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무관심은 죄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잃어버리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예수와 그의 뜻에 관심을 가집시다.


2. 잃어 버리고도 모르는 실수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하루 동안 몰랐습니다. 모르기는 고사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헛된 믿음입니다. 하루 동안이었기에 망정이지 더 오랜 시간 몰랐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오늘날의 성도들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중에도 믿음을 잃고도 잃은 줄을 모르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잃고도 잃은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열심을 잃고도 잃은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실수입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무슨 문제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답답한 문제인 것처럼, 잃어 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실수 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형편없이 하면서 예수는 항상 자기와 함께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함께 하시는 것은 주님 편에서 하실일이고 우리는 예수 잘 믿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어 볼수 있을까 염려하고 고민하고 잠 못자는 밤이 있었습니까?

언젠가 기도원 집회를 하고 강사님을 모시고 죽림 온천에 갔습니다. 한 참 목욕을 하다가 보니 그분은 아주 뜨거운 열탕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들어가려고 발을 한 발 넣었다가 어찌 뜨거운지 얼른 발을 뺐습니다.
그 뜨거운 물에 그 분은 목까지 담그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항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천히 조금 뜨거운 물로 시작하여 몸에 적응을 시키면 아주 뜨거운 물에도 몸을 담글 수 있습니다.

어떤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50도쯤 되는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었더니 “아이구 뜨거워! 개골” 하면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집어넣었습니다. 개구리는 뛰어나오지 않았습니다. 밑에서 불을 땠습니다. 온도가 20도 쯤되었습니다. 개구리는 따스함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슬슬잠이 오려고 했습니다.
계속 불을 땠습니다. 30도가 되고 40도가 되었습니다. 점점 온도는 높아져 60도가 되고 80도가 되어도 개구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개구리는 만세 탕이 되었습니다. 천천히 데워진 물은 개구리의 몸에 뜨거움에 대항하는 내성을 일으켰습니다. 나중에 물이 끊어 다 익어도 뜨거운 줄 모르고 물에 있다가 죽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부정적이 면역성이 있습니다.
은혜받은 처음에는 기도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봉사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불충성하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은혜 받는 자리라면 부지런히 좇아다닙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영적인 내성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열성스럽게 안 해도 괜찮더라는 거지요. 적당히 믿어도 별 손해 없더라는 것입니다.
영적 내독성이 자라기 시작하면 이미 영적으로 늙은 것입니다. 결국은 죽고 맙니다.

유1:12 절에 언급한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 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모르는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 엉뚱한 곳에서 찾는 실수

예수가 보이지 않자 아차 싶어서 요셉과 마리아는 오던 길을 되짚어서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찾아갑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탔겠습니까? 그들은 정신없이 예수를 찾았습니다. 곧 바로 성전으로 갔으면 하루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한 것을 보아서 그들은 사람이 많은 예루살렘 거리를 헤메고 다닌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사흘후에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성전에 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실수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누려야 할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어 버린지 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말입니다. 잃어버린 줄 모르니 어찌 찾아나서겠습니까?
살면서 문뜩 자기 삶의 언저리에서 무엇인가 많이 잃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잃어버린 그것을 찾기 위한 노력을 시도합니다.
돈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명예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권력과 권세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자식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예수는 길에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거리에도 없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는 성전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찾읍시다. 그는 성전에 계십니다.

요2:21절에 보면 성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면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고 요2: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이해를 못했지만 요2:21절에 보면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육체입니다. 그는 지금도 십자가에 계십니다. 성도들은 예수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호와로운 궁전에서요? 높은 교회 건물 종탑에서요. 아닙니다. 가련한 인생들을 위해 고난 당하신 십자가에서 찾아야합니다. 십자가는 상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라고 딤후4: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고난의 현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십자가가 바로 고난의 현장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공간적으로는 구별된 곳,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일 때 주님을 찾습니다. 공간적인 거리는 마음의 거리에 비례합니다.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고 각 기관과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이 예수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성도들의 몸입니다.
구약 시대는 보이는 건물 성전 시대입니다. 신약시대는 예수님이 몸이 성전이었습니다. 교회시대에는 신자들의 몸이 성전입니다. 바울은 성전론에 있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3:16 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시대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이 거하는 전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성도들의 몸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몸에서 찾는 다는 것은 바로 성도들의 행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에게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성도들의 몸에서 찾으려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통해 예수를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찾읍시다. 여러분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삶은 Battery 가 바닥나서 켤수없는 notebook 과 같습니다. 그 안에 엄청난 data 가 있다고 할지라도 내어 쓸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삶은 하나님 안에 모든것이 다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짜증스러워지고 근심이 다시 머리를 쳐들고 말씀에 은혜가 되지 않은 때는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습관적인 신앙과 어리석게도 자신의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껍데기뿐인 믿음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데는 하루 밖에 안 걸렸지만 되찾는데는 사흘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만큼 잃기는 쉬워도 찾기는 힘들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과연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하루 하루의 삶에서 예수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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