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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백성, 내 사랑한 자 (롬 9: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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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 내 사랑한 자 (롬 9:25-29)

  제가 미국에 가서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시카고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에 출석하면서 그 교회의 청년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거기에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신학생 청년도 한 명 있었는데, 언젠가 성경공부 시간에 '칼빈의 예정론'이 우연히 언급되자 그 청년이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다보니 사람 쪽의 책임을 무시하게 되는 자체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라고 아주 열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복음주의 계통의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발언은 개혁주의의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비판이었습니다.

  그와는 또 대조적인 사람 한 명을 제가 플로리다에 있는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멀리 로스앤젤레스에서 거기까지 공부하러 온 젊은 목사였는데, 클래스에서 한국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대화를 하던 도중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친구가 "목사는 뭐니 뭐니 해도 일단 '하나님 주권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목사답지."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제가 당장 맞장구를 치면서 또한 속으로도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모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제가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 동료 신학생이나 목사의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을 듣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앙인들에게는 정말 당연하고 또한 제일 중요한 이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이 왜 비개혁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거치는 반석'과도 같이 여겨지는 것이겠습니까?
  그 문제는 바로 구원론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아까 처음에 예를 든 신학생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정'을 그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사람 쪽에서는 자기 구원을 위하여 아무 할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 아니냐?"라는 논리가 그런 반발심을 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은 왜 그처럼 모순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에 따른 구원'을 믿는 것입니까?
  폐일언하고,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이란 '사람의 지식과 논리와 판단으로 유추해서' 얻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선포하시는 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 9장 6절 이하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명백하게 선포해 주시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특히 19절부터 24절에서는 저 유명한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토기에 대하여 전적 권한을 당연히 가지고 있듯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건드릴 수 없는 고유의 권한, 사람이 이의를 달 수 없는 절대적 주권을 소유하시고 행사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느냐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권한을 마음대로 사용하실 때, 그것이 사람 편에서 보면 그저 밉게만 여겨지는 것이겠습니까?
  주권적 선택 앞에서 속으로 불만은 가득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그저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식의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와 같은 절대주권적 선택을 우리 사람 편에서 과연 어떤 자세와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주권적 선택은 전혀 구원 못 받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희망의 길을 열어 줍니다.

  본문 25절과 26절에 "25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특히 이방인 중에서 어떤 사람이 구원 받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북조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도 역시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 9장 1절부터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이 하나님께서 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예언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새 이스라엘'을 통하여 일어나게 될 새로운 영적 현상을 두고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는 유명한 말씀을 전했던 것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아닌 자"나 "사랑치 아니한 자"라는 것은 사람이 완전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되어 버린 처지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그들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된 일이 아니라, 사람 쪽에서 죄를 지음으로써 자초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구원의 가망성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적적인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 부르겠다."고 소명해 주심으로써 열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A가 아닌 것'이 'A'이다.(not A = A)"라는 말은 세상 수학과 철학에서는 도무지 통할 수 없는 모순적 명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고,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고 부르겠다."라는 이런 아주 희한하고도 특별한 논리를 쓰고 계십니다.
  바로 그렇게 하심으로써 원래는 구원 받을 자격이니 이유가 전무했던 죄인, 그야말로 가망성 확률 제로였던 죄인에게 기적적인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역사는 100퍼센트 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원래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 받은 존재인데 내가 용서한다. 당연히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이지만 아무 조건 없이 내가 구원해 준다.' - 여기에 사람의 의나 공로란 것이 1퍼센트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에 따른 구원을 더 이상은 자세히 설명할 길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혀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으로 불릴 자격 없는 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치 아니했던 자' 아니 '사랑은커녕 오직 저주 받아 마땅했던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최대한도의 하나님 사랑'이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원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택하여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주권을 그런 은혜로운 선택을 위해 발휘해 주지 않으셨더라면, 저나 여러분이나 세상사람 모두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 가운데 살다가 다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란 '다 구원해 주어야 하는데 그 중에 일부를 냉정하게 유기해 버린 선택'이 결코 아니라, '다 저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 중에 일부를 당신의 사랑으로써 구원하여 주시는 선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를 선택하신다고 하니까 나는 상관할 바가 아니구나." - 이것은 자기를 스스로 저주하는 사람의 망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선택하신다면 내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지 않느냐?" - 이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지도 않고 따라서 구원 받고 싶어 하는 간절함도 전혀 없는 사람의 교만한 논리일 뿐입니다.
  "하나님 같으신 절대주권자께서 선택해 주신다고 하니 비록 나 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택함을 받기만 하면 확실히 구원 받게 되는 것이구나." - 바로 이것이 진짜 구원의 확신과 체험이 있는 신앙인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택하시는데 누가 그 선택을 받았는지를 아직은 알 수 없으니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가망성이 있다." - 아무리 예수 믿을 것 같지 않고 전도 받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만나도 바로 이런 자세로 전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구원 못 받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구원의 가망성을 열어 주는, 오로지 저주 가운데 있던 죄인에게 유일한 구원의 활로를 열어 주는 너무나도 고마운 역사인 것을 꼭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주권적 선택은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결코 방심할 수 없게 합니다.

  27절과 28절에 기록하기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의 문단에서는 구원의 가망성이 전혀 없는 줄로만 보였던 이방인 중에서도 결국 어떤 사람이 구원 받게 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선민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 받게 되는 사람은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모래 같은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라는 것은 혈통적 이스라엘을 두고 하는 말이고 "남은 자"란 진짜 구원 받게 되는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남은 자'라는 개념은 구약의 다른 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23장 3절의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에스겔 14장 22절의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미가 2장 12절의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리라"는 등의 예언들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다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이라는 문맥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남은 자'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앞에서 나왔던 것과는 대조적인 논리가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서는 'A가 아닌 것이 A이다.'라고 하셨지만, 여기서는 'A라고 해서 다 A는 아니다.'라는 또 다른 특별한 논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다 구원 받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 받게 된다.'라고, 'A 중에서 일부부만 진짜 A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소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제한 속죄'나 '전 인류의 구원' 따위의 교리는 결코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감언이설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직 제한된 소수의 '남은 자'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 약속이 불완전하게 성취되거나 미완성이 되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곧 이어지는 본문에서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번 하신 말씀을 반드시 완전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구원 얻는다는 약속은 하지 않으셨으며 궁극적 구원의 약속에서는 항상 '남은 자'라는 제한이 딸려 있었던 것입니다.

  '다 택함 받았다.'라고 하는 말은 '다 택함 받지 않았다.'라는 말과 사실상 꼭 같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란 말이 들어갈 때부터 이미 '선택'이란 말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전체 중에서 일부분만을 뽑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누가 예수 믿으려 하겠습니까?
  믿지 않아도 다 구원 받을 수 있다는데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겠으며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선교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겠습니까?
  자식들에게 유산 미리 다 나누어주어 버려도 부모 효도할 마음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인간의 악한 본성인데,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져 있다고 한다면 누가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두려워하면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런 얄팍한 교리로 치장하려 하면 신앙이란 자체가 아무 소용없어져 버리게 되며 구원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벌이 있을 때에 구원이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저주가 있을 때라야만 용서가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지옥이 분명히 있으니 천당이 비로소 천당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유기된 자가 틀림없이 있으니 택자가 진정한 택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은 그래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신앙생활에 결코 방심치 않게 합니다.
  오직 끝까지 '남은 자'만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함으로써, 교회만 다니고 있다고 해서 절로 구원 받았다고 절대로 방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불신자들 앞에서도 결코 교만하지 아니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권적 선택은 구원을 확실히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만듭니다.

  29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씨"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남은 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말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만일"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실로 의미심장한 내용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지 아니하셨더면," 즉 '만약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남은 자로 선택해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정말 두렵기 짝이 없는 가정법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꼼짝 못하고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될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무섭고도 철저한 심판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만일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지 아니하셨더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멸시하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즉 '바로 나 자신도' 그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여지없이, 필연적으로, 당연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만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에 하나라도 만약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없었더라면 우리 모두가 당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이 받게 될 수밖에 없던 운명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천만다행으로, 정말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씨를 남겨" 주셨습니다.
  남겨 두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100퍼센트 순전히 하나님의 의사에 달린 문제였으며, 누가 곁에서 조언할 사람도 없었고 그 결정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미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으로써 마땅히 내리실 저주 대신에 구원을 베풀어 주실 '영적 아브라함의 씨'를 남겨 두기로 작정해 주셨으니, '행운'이라는 표현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사람에게 벌어진 최고의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29절의 "만약에 그랬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끝난 후 그 다음 절과의 사이에 비어 있는 행간에서 사도 바울의 '깊은 안도의 한숨'을 충분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안도의 감정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없었을 경우를 가정할 때 자기 자신이 처할 수밖에 없었던 두려운 저주가 무엇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인정할 줄 아는 성도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성도만이 진정한 감사를, 정말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가 막히게도 좋은 일이, 정말 '행운아 중의 행운아'와 같이 '남겨 주신 씨'로 뽑히게 된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인 줄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반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의도하신 바이기도 했습니다.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말씀하신 대로,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구원에 있어서 결코 사람 편에서는 스스로 감히 자랑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8-9)라고 한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그 긍휼하심을 두고 모든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오직 당신께만 돌리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를 선택해 준 사람에게 감사 외에 다른 무슨 반응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국가대표 감독은 대표선수들을 자기가 마음대로 선발할 것입니다.
  그때 그 감독의 선택을 받은 선수가 '왜 나 대신에 다른 사람을 뽑지 않았나?'라고 불평하거나, '왜 대표선수를 뽑은 권한이 감독 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나?'라고 불만스럽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뽑힌 선수는 감독이 그 권한을 자기를 선발하는 데에 사용해 준 것이 그저 고맙고 많은 선수들 중에 자기가 뽑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뿐 다른 마음이 들 여유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주권적인 선택을 바로 나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이 놀랍고도 신기한 사실 앞에 그저 당연히 드려야 할 감사, 마땅히 돌려야 할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싱가포르에서 온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자기 고국에 대해서 제게 이야기해 주는 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이광요 수상이 평생 독재를 하고 있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광요 수상은 싱가포르가 식민지일 때부터 독립한 이후까지 총 30년이 넘도록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때가 아마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기 직전 즈음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 싱가포르 신학생은 그 말을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당시 우리나라의 군사정권을 겪고 미국에 갔던 때라 '독재' 하면 무조건 치가 떨리던 사람이었는데, 웬걸 그 친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주 만족스러운 어조로 "이광요 수상이 평생 독재하고 있지."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 친구뿐 아니라 싱가포르 국민 대다수가 이광요 수상의 독재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광요 수상은 그 독재적인 권력을 가지고서 싱가포르 국민들을 잘 살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싱가포르의 정권을 노리는 반대파 정당 정치인들을 제외하고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그의 장기집권을 지지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문제는, 독재나 아니냐 하는 것보다는, 그 독재 권력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을 이롭게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사실상 독재와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독재적 주권은 어디까지나 선하고도 공의로우신 통치로써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선정(善政)을 체험하고 그 나라 백성 된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성도로서는 그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그저 감사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반역하는 자들이 그것을 두고 마치 무슨 독재자의 횡포인양 함부로 비판하고 도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사람의 눈에는 도저히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을 것처럼만 보이는 자들까지도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주권적 선택은 하나님 백성이 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라 해도 끝까지 방심하거나 교만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생활 똑바로 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 바로 그것 때문에 원래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게 영생 구원의 길이 열렸으니 그런 고맙기 짝이 없는 주권적 통치를 받아 누리게 된 택자로서는 그저 뜨거운 감사와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신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를 그 의로우신 통치를 받는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공포정치를 행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까지도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사랑을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일에 그 주권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불만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런 하나님께 감히 대어들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오늘도 창조주께서 마땅히 쥐고 계신 절대주권으로써 이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들에게 가장 선한 통치, 최고로 행복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 이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높이 받들고 오직 경외함으로써 섬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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