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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여망이 사라질 때 (행 27: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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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행 27 : 9 - 20
제목 : 구원의 여망이 사라질 때

흔히 들 이런 말을 하지요?  “우리의 인생은, 항해와도 같다.”
광대한 바다 위를, 한낱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은 조그만 배를 이끌고, 항해하는 것과 같다.  항해를 할 때에, 그 배가 잔잔한 바다 위를 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원치 않는 거센 풍랑을 만나서, 고난 속을 헤매며 고통을 받기도 하는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인생의 모습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저 망망대해 위에, 여러분 얼마나 많은 배들이 떠다니겠습니까?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배들이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과는 달리, 폭풍 속을 지나는 저 배들은, 그 풍랑을 맞으면서도  “왜 우리 배만 이런 풍랑을 지나는가?”  이렇게 원망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다 위를 항해하다보면, 의례 그런 풍랑을 여러 번 맞이하게 되는데,  자신의 배가, 바로 그 시점에 있는 것이고,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할 일은,  선원들이 힘을 합하여 그 역경을 뚫고 나가, 또 다시 그들을 비춰주는 태양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배가 풍랑을 만난 이유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선장의 판단력이 흐려질 때도 있을 것이고, 항해사가 실수를 해서, 키를 잘못  조정한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측하지 못한, 수시로 변하는 일기 때문에  뜻밖의 풍랑을 만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그 풍랑을 헤쳐 나간다는 것이지요. 

왜입니까?  그 길만이,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그 방법밖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상황 속에서, 결코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따지며 싸우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저 모두가 힘을 합해, 자신들 앞에 닥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풍랑을 헤쳐 나간 후에는, 모두가 위로하며 함께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그 풍랑을 헤쳐나간 후에는, 그러한 위기를 초래하게 된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하고 잘못된 점을 고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를 더욱 더 철저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항해하는 오늘 우리들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선원들의 모습을, 교훈으로 삼고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참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때가 있질 않습니까?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때로는 실수도 하고, 또 그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환난을 경험하며, 또 그 가운데서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할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그 문제를 대처해 나가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어차피 당한 환난이라고 한다면,  그 환난에 대해 서로가 원망하며 좌절하기보다는, 있는 힘을 다해서, 서로가 힘을 합해 믿음과 신앙으로 뚫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우리를 비춰주시는 은혜의 태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 삶의 고통으로 낙심하고, 좌절하고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 고난으로 자신이나 가정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닥쳐진 고난이 있다면, 이제는 자신만이 아닌, 온 가족이 다 함께, 힘을 다해 헤쳐 나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그 고난이 우리 교회에 닥쳐진 것이라면, 개인적인 노력이 아닌, 이제는 온 성도가 힘을 합해 헤쳐 나가려고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또 온 성도가 다 함께 신앙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분만이,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우리 교회의, 진정한 선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생의 풍랑을 만났거나, 또 만날 수 있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지고, 또 교훈이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오늘 본문만 읽게 되면, 풍랑을 만난 바울의 모습만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후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시고, 결국 모두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신앙과, 여러분의 가정의 형편,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형편들을 돌아보시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능력으로,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타고 있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나, 거의 파선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랑을 만나게 된 원인이 무엇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감동을, 인간의 생각으로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보세요.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이 지금 왜 그 배에 타고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한 죄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인 된 몸이었기에, 배가 떠나는 그 시점이 항해하기에 위험한 시기라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지만, 백부장이 그 말을 듣지를 않아, 이러한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볼 때에, 백부장 율리오가, 항해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이, 분명 옳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경험이 뛰어나다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안목을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장과 선주는, 배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겠지요.  배에 대해서는 전문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바다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바다도 지으신 분이시기에, 바다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불신자인, 백부장 율리오는 어떻습니까?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더라.  했습니다.  하나님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인간적인 경험과 지식이 앞선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석을 보게 되면, 바울은 여러 번 항해의 경험이 있었고, 또 그 가운데서 파선의 위험을, 세 번씩이나 경험한 사람이었기에,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었다. 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해석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감히, 위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간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항해하기 전에, 유대인의 율례를 따라 금식하는 절기에 맞춰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가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감동하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 10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지요.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여러분,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리 경험이 많은 바울이라 할지라도, 죄인 된 신분으로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는 자신의 경험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동해 주셨기 때문에, 미리 그러한 사실을 계시를 통하여 알려 주셨기 때문에, 이런 확신에 찬 말을, 바울이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그 배가 유라굴로 라는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과연 누구의 말을 들으며 항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전만 더 못하게 되는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말은 모두가 다 그럴듯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더 큰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누가 책임져 줍니까?  아무도 그 책임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또한, 여러분 스스로가, 감당해 나가야 할 몫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통해 나타납니까?  개인의 기도생활을 통해 나타  납니까?  아니면 개인적인 말씀의 묵상을 통해 나타납니까? 
물론 이러한 것을 통해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왜 교회에 목회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왜 목회자가 있습니까?  뭔가 필요가 있어 세워주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워주신 주의 종들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인 줄로 믿습니다. 

개인의 기도생활이나, 또 말씀의 묵상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도 있겠지만,  그 뜻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투명합니다.  물론 영적으로 경지에 이른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영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한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부분을 돕기 위해, 교회마다 목회자들을 하나님이  친히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어졌고,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어졌고, 오늘날 현대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날 강단에 세워 준 모든 목회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인 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런 풍랑을 만나는 위험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백부장 율리오가 누구의 말을 더 믿었어야 했겠습니까? 
당연히 바울의 말을 더 신뢰했어야 옳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니냐?  바울은 죄수인데, 죄인을 호송하는  책임자인 백부장이, 어찌 죄인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냐?”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게 되면,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대할 때 전혀 죄인으로 취급하질 않았습니다. 
율리오는, 바울에게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세요.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  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죄인 된 몸입니다. 로마의 규칙에 따르면, 압송하는 죄인이 도망을 하게 되면, 그 죄인이 받아야 될 형벌을, 그 죄인을 후송하는 로마 병사가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에, 그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죄인 된 바울을 호송 중에, 감옥이 아닌  친구의 집에서 지내게 했다는 것은, 대단한 배려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을, 이 율리오가 아끼고 믿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바울의 복음 전하는 일의 타당성과, 그의 사도로서의 신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 율리오는  어떻습니까?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왜입니까? 
바울이 사도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를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보세요. 
성도들 가운데, 이런 율리오와 같은 이러한 마음으로 목회자들을 대하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교회마다 보면, 성도들과 목회자들과의 관계는 참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든지, 또는 심방을 통하여 말씀으로 권면을 하면, 잘 안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목회자를 바라볼 때, 자신들과는 좀 더 구별되어진,  신성한 직업을 가진 사람, 목사로 인식하고 있지, 목회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는 인식하고 있지를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교훈의 말씀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 목사님을 존경하고, 또 섬기기도 하지만, 그 이상 자신의 영역에 대해 간섭하거나, 고치려 드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목회자들이 여러분 가운데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들을 사랑하고 돕는 일이,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이 일을 위해  세움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도들을 사랑하고, 돕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삶 속에서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만들도록 여러분을 돕는 것, 바로 이것이 목회자들이 교회에 세움을 받은 이유요, 존재 목적이고, 또한 그것이 진정 성도들을 사랑하고 돕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권면을 듣지 않는다면, 여러분을 돕고자 하는 그 권면을 듣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다른 세상 사람들의 말과 경험을 더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목회자들은 사역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성도들이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12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우리가 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  지금 자신의 삶이 불편하기 때문에, 자꾸만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을 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타고 있던 배가 처음부터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난 것 아닙니다.  처음에 배가 항구에 대어져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그 항구가, 조금 좁고, 불편하다고만 느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불편함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게끔 한 원인이 되어진 것이고,  그 결과 광풍을 만나게 되고, 결국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바다에 내어버리는, 큰 환난을 겪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을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생활 속에 느끼고 있던 조그만 불편, 그 불편이 자라 원망이 되고,  그 원망이 자라, 오늘에 처한 고난이 되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많은 부분,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 4 : 4 - 7절에 말씀하지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할렐루야!!

그렇다면 왜 바울은, 두 번씩이나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의 불편함으로 인한 불평과 원망이, 결국에는 인생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이라는 말을 쓰며, 주 안에서 오히려 기뻐하라고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불편함이 있거든, 이 모든 일에 오히려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소원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삶에 조그마한 불편함이 있어도 쉽게 짜증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불편함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는 하지 않은 채 자꾸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점점 더 어려운 고난들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 가운데는, 인생에 당하는 고난이 극심해, 19절 말씀처럼,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리는” 지경에 처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 20절 말씀과 같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져 버린” 그런 지경에 처한 분들도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이라 할지라도,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신앙으로 일어서며, 바울의 권면과 같이, 현재 모습에 오히려 감사하며 현재에 당한 고난이 물러가기를 소원하며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현재의 고난을 변화시켜서, 축복으로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에게는요,  불행같이 보이는 일들이, 사실은 더 큰 축복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철 하나는 5달러지만, 그것으로 말편자를 만들면 10달러가 되고, 바늘을 만들면 350달러가 되고,  칼날을 만들면 32,000달러가 되며, 시계 스프링을 만들면 250,000달러가 된다.” 똑같은 재료라 할지라도, 그것을 두드리고 제련을 할수록, 점점 더 탄성과 강도가 좋아지고, 그 가치도 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방법도,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인생을 좀더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할 수 있는 축복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성도들의 인생에    좀 더 많은 제련과 연마를, 거치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고통 중에서라도, 슬픔의 눈물 중에서라도, 오히려 감사함으로 기뻐하며 노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밀알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산 채로 땅에 던져져서 질식할 것 같은  그 땅 밑에 덮여, 겉으로 보기에는 무자비한 것 같은 운명을 지닌 채 매장이 된 그 밀알이, 마침내는 그 최고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밀알에게 있어서, 그 매장과 죽음의 고통은 고난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진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과,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가 있지만, 이것은 도리어 우리를 새 생명으로 탄생케 하고, 우리를 더욱 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이끌어 주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롬 8 : 17절에 보세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여러분, 고난과 축복은 한 세트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나는 축복이 좋으니, 고난은 제거해 주시고 축복만 골라 주세요.” 
무슨 아이스크림 선전에 보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고 했는데, 여러분 신앙은 결코 골라먹는 재미가 없습니다.  내 눈에 보기에 만족함이 없어도, 내 마음에는 그것을 원치 아니한다 할지라도, 그저 주님 뜻대로, 그저 주님이 주시는 대로  순종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 인생은 살맛나는 인생으로, 인생의 재미가 느껴지는 행복한 인생으로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축복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재의 고난에 신앙이 무너지면서,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말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인생에 더 심한 광풍을 만나게 돼, 자기 손으로 남아있는 모든 것들 조차 던져  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특별히 이 수요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은, 현재의 고난에 쓰러지지 않고, 믿음으로 장래의 영광스러운 축복을 바라보며, 더 힘을 내어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남풍이 순하게 불매” 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광풍이 대작했다면, 누가 항해 길에 올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대로 남풍이 순하게 불자, 그들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올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대할 때, 누가 떠오릅니까?  요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생각대로 반대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반대편이 어디입니까?  다시스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에 반해, 다시스라는 목적지까지도 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반대편 다시스를 향해 나가는 요나가, 지금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갔을까요?  모르고 갔을까요?
모르고 갔겠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분명 요나는 자기가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갔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해들은 요나가, 왜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도망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항구인 욥바로 내려갔더니, 정말 자기가 생각한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욘 1 : 3절 말씀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러나”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도망하는 그 길이 순탄치가 못해야 하는데, 의외로 순탄하게 길이 열립니다.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말이, “마침” 이라는 단어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나, 요나서의 말씀을 읽고, 참 귀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닌데도, 내가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하기가 싫어 내 뜻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좀 찝찝하다고 생각  하는데, 의외로 내 생각대로 잘 되어지기 시작한다면,  기뻐할 것이 아니라,
속히 그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그 길을 내가 득의한 줄 알고 계속 가다간, 결국 엄청난 대가를 치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배의 모든 것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율리오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남풍이 불자 득의하여 떠난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배에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봅니다.  14절 - 15절 말씀,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에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오늘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는데도, 그 인생에 남풍이 불어 득의한 줄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얼마 못되어” 대풍도 아닌, 광풍이 대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고, 그 인생에 계속 고집을 피웁니까? 
그 때는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더 심각한 고난 속으로, 환난 가운데로 그저 힘없이 쫓겨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간신히 거룻배를 붙잡습니까?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결국은 더욱 더 큰 환난 가운데 쫓겨 가다가, 배의 기구를 자신의 손으로 내어버리며, 이제는 모든 환경이 암울해 져서, 해와 별조차 보이지 않는, 구원의 여망이 다 사라져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이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남풍이 불자 득의하며 떠났던  그 배는, 처음의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정 반대의 모습으로, 그저 목숨만 부지  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운 공포심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정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솔직히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는,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자기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사람의 생각대로 일을 행할 때가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 그런 분이 계신다면, 그분들도 저처럼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그 구원의 여망이 다 사라진 가운데, 이제까지 그들이  풍랑 가운데 고난을 겪은 이유를, 다시 한번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다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자기의 말을 듣지 않아, 이런 결과가 생기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소망을 줍니다.
22절 말씀에,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25절 말씀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보세요.  누가 누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이 부족한 종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에게 전달하시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나 고난을 겪고 있던 그들이, 이제는 바울의 말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백부장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바울이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의 권세가 그에게 있었기에, 그리고 이제 그들이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따랐기에, 그 배에 있던 276명이 다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뿐입니까?  어느 곳인지 알지도 못하는 섬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야말로 하나도 변한 것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바울의 말을 따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고 온 배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만, 그리고 그 배에 실었던 물건들을 스스로 다 바다에 내어 버렸지만, 그 섬에서  원주민들에게 융성한 대접을 받으며, 그 추운 겨울을 안전하게 보내게 되었고, 또 떠날 때에는, 그들이 타고 갈 튼튼한 배까지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그들이 쓸 물건까지도, 풍성하게 얻어 배에 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이제 바다에서의 힘든 고난과 추운 겨울을 보낸 그들은, 새롭게 배를 띄워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이 정한 시기에 배를 띄웁니다.
전에는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억지로 가다가 남풍을 만났지만, 그래서 득의한 줄 알고 떠나가다가 고난을 겪었지만, 이제는 겸손하게 바울의 말을 순종하여 하나님이 남풍을 불게 해 주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그 이튿날 바로 남풍을 불게 해 주셔서, 그들로 목적지인 로마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여러분들을 지도하는 주의 종들의 권면을 믿고 따르면서, 여러분의 인생에 당한 어려움들을 신앙으로 잘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현재에 구원의 여망이 다 사라졌다고 느껴지실지라도, 주의 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좀 더 인내 하시고, 하나님께서 불어 주시는 남풍으로 인하여, 은혜와 축복의 항해를 계속해 나가며, 결국 소원의 항구에 이르게 되는,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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