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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개혁은 회복입니다 (대하 3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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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대하 34 : 1 - 13
제 목 : 개혁은 회복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땅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도 구별된, 아주 특별한 민족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주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신 14 : 2절에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하나님을 택하여 신으로 섬긴 것,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택하여 주시고, 그들을 거룩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성민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 성민이 될만한, 무슨 자격이나 조건이 있었겠습니까?  연약한 민족입니다.  뭐 하나 내 세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 거한 소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습니까?  충분한 이유가 있는 선택이었다는 겁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보잘것없는 나약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주셨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주변의 다른 여러 민족들보다 턱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민족이었기에, 하나님의 권능을 그들 가운데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와 민족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나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권능인 줄, 믿어 의심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난 그 놀라운 역사를,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이스라엘을 택하심으로, 이스라엘  민족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능력의 하나님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또 그들을 입술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복을 받은 민족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다스리시겠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친히 인도해 가시겠다는 의미가, 그 택했다는 말 속에 포함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이 나타날 때에, 과연 누가 그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실제로 수많은 열강들의 공격이 빈번하게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릴 때에는, 결코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그 백성들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 지도자 모세가 이끄는 대로, 또 여호수아가 지도하는 대로, 그들은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모세가 이끄는 그 백성들은, 홍해를 갈랐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는 아무런 무기도 없이, 그저 그들이 농사를 짓던 낫과 보습을 가지고도, 강력한  아말렉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또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러한 사실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될 사실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지도자가 이끄는 민족이나 그 백성들에게서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던 한 개인에게서도, 이러한 역사가 그대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민족을 택하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은혜가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겐 그렇게 큰 은혜로 다가오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렇게 크게 와 닿지를 않는다는 것이지요.  왜입니까?  그 많은 민족의 백성들 가운데, 한 개인의 의미가,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는 거지요.  민족 전체에 내려진 하나님의 은혜가 100이라면, 그 은혜를 나누어, 나 한 사람에게까지 돌아오려면 그 분량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백만 분의 일입니까?  이 백만 분의 일입니까?  이렇게 따지면, 정말 얼마  안 되는 분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가 안 되지요?  그러니 도전 받을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 할지라도, 백만 분의 일이 아니라,  천만 분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겐 능력이 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미쳐있는 딸을 고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갔던 이방 여인, 비록 주님에게  개 취급을 받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고,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은혜를 달라고 끝까지 주님 앞에 있었더니, 그 믿음이 능력이 되어 그 딸을 고치지 않았습니까? 

한 개인에게 나타난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도, 이렇게 사람을 고치는 능력을  행하는데,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큰 믿음을 소유했을 때, 개인이 나타내는  능력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능력을, 행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산을 들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역사를 일으킬 줄 믿습니다.

다윗이 그렇지요?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는 그런 전쟁이었습니다. 
아무도 이스라엘이 이긴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앞 세우고, 믿음으로 나아간 다윗 한 사람에게, 그들은 패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이 외친 유명한 말이 무엇입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한 블레셋 군대였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이스  라엘의 한 소년이 던진 물매 돌 하나에, 그들은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어찌 다윗 자신의 힘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았던 한 개인,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사건, 이 사건은 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 한 개인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한 민족을 거뜬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준,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성민  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계속적으로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이 늘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엇입니까?  사사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계속해서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인간의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왕을,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은 주변의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어김없이  패하였고, 또 그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였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함으로, 그들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이스라엘을 택하여 주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 믿음을 저버리고 범죄 했을 때는, 결코 그 도우심을 베풀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거두어 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위엄과 영광은 다 사라지고, 주변의 온갖 나라와 민족들에 의해서, 다시금 고통을 받게 되는, 초라한 민족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역사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역사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도,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 않았습니까?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아니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또한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는 성민이 되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 인생의 흥망성쇠 또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우리의 인생에 계속해서 나타나게 되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만, 
패역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신앙 중에라도 하나님을 배반하며, 세상의 헛된 우상을 섬기며, 불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때엔, 성도라 할지라도, 어김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받게 되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내 인생에서 끊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세상에 끌려 다니는 피곤한 인생, 힘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한 사람도 없을 줄로 압니다. 
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와 축복의 삶, 내가 마음에 소원을 가진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 은혜와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의 자세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그저 내 마음의 육신적인 소원을 가지고, 막연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가기보다는, 분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적 삶을 살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축복이 내 삶 속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하는 자세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러분의 육신적인 삶이 먼저가 아닙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여러분의 속 사람, 여러분의 영혼의 삶이, 먼저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 영혼이 잘 되어야, 쉽게 말해 내 신앙이 바로 서야, 비로소 내 육신적인  모든 일도 잘 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이러한 신앙적 자세로, 올 2006년도의 남은 기간동안,  아니 여러분의 남은 평생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 마음에 이러한 각오와 결심을 하면서, 새롭게 신앙적 삶을 출발하기를 소원하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귀한 교훈을 주는 말씀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누구입니까?  요시야라고 하는 왕입니다. 
불과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다 왕국의 왕이 된 특이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의 업적을 살펴보게 되면, 역대기에 나타난 그 어떤 왕들보다도, 더 훌륭한 일들을 감당해 나갔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 나갔던 것이 아닙니다. 
온 유다 왕국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나가도록 힘썼던,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훼파된 채 방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고, 모든 우상 숭배자들을 진멸하며, 또한 그 우상을 철저하게 깨뜨렸던, 이른바 종교  개혁을 단행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룬 업적들을 여러분, 곰곰이 따져 보세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습니까?  그가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기까지 치리했던 그 31년 중에, 절반이 넘는 18년이라는 세월을, 이러한 개혁에 쏟아 부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서 마땅한 일이었고,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일이었기에, 그는 힘이 들어도, 그 모든 일들을  묵묵히 감당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이러한 새로운 신앙적 출발이 있기를 소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연초에 다짐하며 서원 하셨던 모든 영적인 일들이, 여러분의 남은 인생동안, 주 안에서 다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이러한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신다면, 요시야와 같은 이러한 개혁의 노력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반드시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몰랐으면 모르겠습니다만,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그냥 덮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결심은 다 사라지고, 구습을 좇는 옛 모습이 나타나,  다시금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압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거룩한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요시야와 같은,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고치려고 하는, 개혁의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자신의 삶에 있어, 요시야와 같은 신앙적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요시야가 살아갔던 그 신앙의 삶을, 오늘 우리들도 동일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요시야의 삶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의 삶 속에, 오늘 우리가 원하는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모범이 될 만한 신앙적 삶을 살아갔을 때,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정녕 그를 떠나지 아니한 것을, 우리가 친히 목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신앙을 본받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들도 요시야에게 임했던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자신의 삶 속에, 늘 머물기를 소원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하면 되는 겁니다.  해답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데도, 정답을 쓰지 못한다고 한다면, 답이 어디 있느냐고, 답이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어리석지 않다면, 그는 분명 변화되기를 싫어하는,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그는 불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요사야는 자신의 신앙을 정립하는데, 분명한 해답을 찾고 그 일을 행했습니다. 그의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에게 나타난 정답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신앙적 개혁의 노력의 모델은, 바로 다윗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2절과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적 해답을 발견하고서는, 다윗의 신앙을 좇아, 자신의 신앙을 정립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롬 12 :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또한, 요삼 1 : 11절에도 보면,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누구를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믿음의 주요, 또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겠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으로서, 정말 주를 닮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모델로 삼고, 그의 신앙을 본받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성장을  이루는 데에는,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요시야를 모델로 삼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본 받고자 하는, 요시야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습니까?  요시야의 신앙은, 한마디로 회복의 신앙이었다.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있던 자신의 삶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룬 종교 개혁의 출발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삶이 변하고, 자신의 나라가 변화  되어지는 개혁이란, 무작정 구호를 내세우며 선동적인 방법으로 앞으로만 끌고 나가고,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며, 지금껏 지나왔던 지난 날들의 발걸음들을 돌아보며, 그 걸음이 하나님과 동행한 걸음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멀어졌던 걸음이었던가?  이것을 확인한 후, 새롭게 하나님과 함께 출발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그의 신앙이 회복되어졌을 때, 그에게 또한 무엇도 회복이 되어졌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도, 동시에 회복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어린 나이였지만, 역대 왕들이 이룰 수 없었던, 그런 엄청난  신앙의 업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인줄로 압니다.  내 신앙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회복되는 수준만큼, 내 속의 하나님의 능력도 그만큼 회복되는 줄 믿습니다.  요시야는 하나님께로 철저하게 자신을 돌이켰기에, 온 백성들을 이끌고 종교  개혁을 이룰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룬 회복의 신앙,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 속에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신앙의 회복, 곧 말씀의 회복이었다는 것입니다. 
2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요시야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모델로 삼았던 다윗의 삶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신앙을 가졌기에,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소유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가 발견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자신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며 살아  갔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아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결코  치우치지 아니하고, 절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아니 복종하며 늘 바른 길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 힐기야를 통해서 발견한 율법 책을, 온 유다 백성들과 함께 준행하기로 다짐을 하면서, 모든 가증한 것들을 다 하나님 앞에서 제해 버리는 신앙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말씀의 회복이 그에게 있었기에, 그 유대한 히스기야 조차도 온전하게 이루지 못했던, 종교 개혁의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시야가 회복한 신앙은 무엇입니까?  기도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상반절의 말씀을 보면,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모습인데, 어찌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서 구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다윗의 기도가, 그에게는 바른 기도의 모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한다고 다 기도이겠습니까?  기도란, 하나님과의  신령한 대화입니다.  하나님이 들어 응답하지 않는 기도라고 한다면, 그 기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왜 다윗의 기도를 모델로 삼았겠습니까?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정말 합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루기를 소원하는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 자신의 나라가 확장되어져 가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먼저 확장되기를  소원하는 기도,  이러한 기도의 회복이, 요시야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기도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망하는 그 기도의 제목들에는, 어떠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의 내용들입니까?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기도의 내용들입니까? 
도대체 어떤 기도의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까? 

여러분 각 자의 기도의 제목들을 돌아보세요?  하나님이 이 한 해 동안 여러분에게, 여러분 각 자에게 소원하시는 바가 분명히 있을 것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소원을 헤아리며, 그 소원을 먼저 이루어 드리기를 소원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 뜻을 이루며, 내 영광을 드러내기를 소원하는 제목들로 가득 차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신앙적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신다면, 요시야와 같은 이러한 기도의 회복이, 여러분 기도에 먼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회복, 여러분에게 분명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요시야가 회복한 것이 무엇입니까?  봉사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게 되면, “요시야가 위에 있은 지 십팔 년에 그 땅과 전을 정결케 하기를 마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려 하여 아살랴의  아들 사반과, 부윤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를 보낸지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자신의 신앙에 말씀과 기도의 회복을 이룬 후, 백성들과 함께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새롭게 수리 한 후, 성전의 업무를 관장하는 봉사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이제까지 우상에게 제단을 쌓으며 경배했던 그들에게 있어, 그러한 일은 생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사람들을 세워 직분을 맡기며, 그 일을 억지로라도 감당토록 했다는 것입니다.  35장에 보면,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35장에서 유념해서 볼 것은, 요시야는 다른 사람들에게만 이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신도 기꺼이 이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5 : 7절에 보게 되면, “요시야가 그 모인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과 수소 삼천을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요시야가 이러한 섬김의 봉사를 담당하였을 때, 그의 신하들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들까지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러한 봉사에  동참하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35 : 7 - 9절 말씀을, 우리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시야가 그 모인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과 수소 삼천을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은 제사장들에게 양 이천육백과 수소 삼백을 유월절 제물로 주었고, 또 레위 사람의 두목들 곧 고나냐와, 그 형제 스마야와 느다넬과 또 하사뱌와 여이엘과 요사밧은, 양 오천과 수소 오백을 레위 사람들에게 유월절 제물로 주었더라.”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항상 대접을 받는 왕의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의  신앙에 이런 봉사의 회복을 먼저 이루었기에, 그의 온 나라의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성전의 수리에 동참하며, 또한 그 성전에서의 봉사의 일을 감당하며, 헌신하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천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 분명 있는 줄로 압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봉사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교회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까? 
바로 직분자로 세움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먼저 교회의 일에 봉사하고 섬길 때에, 다른 평신도들도 봉사의 일에  동참하게 되어지고, 그 봉사가 억지로가 아닌 즐거움으로 참여하는 봉사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개혁은, 이처럼 회복에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의 근본은 망각하고 자꾸만 앞으로만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천 교회는, 진정으로 회복해야 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드러나고, 우리의 죄악이 드러난 때입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일은, 개혁을 외치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갈 계획만 세울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무엇이 부족하였기에 오늘날과 같은 이런 허물과 죄악이 드러나게 되었는가?  이러한 자기 성찰과 반성,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우리 성천 교회뿐만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성도들의 터닝 포인트와 같은 이 시점에서, 요시야가 이룩한 신앙의 회복을 통하여, 진정한 성천 교회의  개혁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가 동참합시다.  이 일에 우리 모두가 하나 됩시다.
이 일에 우리 모두가 쓰임 받읍시다.  새롭게 되어진 우리 성천 교회를 기대하며, 저마다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 섬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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