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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 살면서 세상대로 살지 말라 (단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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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단 1 : 8 - 16
제 목 : 세상 살면서 세상대로 살지 말라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남자 이야기가 뭐지요?  군대이야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는 뭘까요?  축구이야깁니다. 
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는요?  군대에서 축구 하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제가 군대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전방의 한 내무반에, 믿음 일병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 일병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늘 놀림을 당합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 우리끼리는 호감이 가고, 훌륭해 보이지만, 사실 예수 믿지 않은 불신자들이 바라볼 때는 어떻습니까?  찐 맛 없지요. 별로 어울리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별 이유도 없이, 괴롭히고 못살게 굽니다.

어느 날 한 고참 병장이, 오른 손으로 군화를 들고 이 믿음 일병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무슨 영문이지도 모른 채 뺨을 맞은 믿음 일병은, 아파서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뺨을 친 그 병장은 말하기를, “야, 임마, 기독교에서는 오른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라고 했다는데, 왜 너는 가만히 있어.  임마?”
참 황당하지요?  뭐 이런 놈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믿음 일병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한 마디 대꾸를 합니다.  “병장님이 하신 성경 말씀은 정확히 맞습니다.  그런데 병장님은, 왜 왼쪽 뺨을 먼저 때리십니까?”  그러니까 또 말대꾸했다고 오른 쪽 뺨도, 한 대  더 맞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한 대로 끝날 것을, 괜히 말대꾸하다가 한 대 더 맞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무슨 사건이었을까요? 
총기 난사 사건, 입니까?  이 믿음 일병이 열 받아서 그냥 고참이고 동료고, 다 쏴 죽였습니까?  그 다음날 아침에, 그 고참 병장이, 침상 밑에 있는  자신의 군화가, 아주 반들반들하게 닦여져 있는 걸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처럼 군화를 깨끗하게 닦았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 고참 병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믿음 일병이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인 것입니다. 세상에 당한 대로, 나도 악하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사랑으로 선하게 돌려 줄 수 있는 신앙의 정신, 롬 12 : 21절에서 말씀하지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멘!!!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잘 되는 일입니까?  내 오른 쪽 뺨을 이유도 없이 후려치는데, 어찌 공손하게 왼쪽 뺨도 돌려 대며, 이 쪽도 때려 주시오.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제 정신으로는, 세상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흔히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뭐라고 합니까?  미쳤다고 하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미쳐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미쳤다고 했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그 때 바울이 법정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바울은 진짜 미쳤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미쳤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의 삶을 살아갔던 것이고, 또한  세상을 능가하는, 놀라운 권능을 행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제대로 믿으려면,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동안에, 기분 같으면 남은 평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올 한 해부터, 저도 미치고 여러분도 미치기를 바랍니다. 아멘!!!!  누구에게 미쳐야 합니까?  우리 모두 주 예수께 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께 미쳤다는 것은, 예수께 심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되, 깊숙이 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골 2 : 6 - 7절에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박아 세움을 입은 사람,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깊이 내린 성도들의 삶이, 어찌 남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굳건히 서고,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참 어려운 일이지요?  농부가 농사짓는 사람이지만, 누구 하나 농사가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힘들고, 어렵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겨우내 언 땅을 갈아엎고, 또 그 곳에 씨를 뿌려 땀 흘려 수고하고 가꾸었기에,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나 현재에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신앙적으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미래에도 마찬가지예요.  말세가 가까워져 갈수록 신앙생활은  더 힘들어 지게 됩니다.  왜입니까?  공중 권세 잡은 사단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어떡해서든지 죄를 짓게 만들고, 어떡해서든지 믿음 떨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핑크라고 하는 학자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을 만드셨지만, 사탄은 ‘이 세상’ 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사단은 죄를 끌고 와서 ‘이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러분 “이 세상” 은 창조의 모습에서 벗어난, 변질된 세상입니다.  죄의 누룩이 가득히 퍼진, 오염된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죄로 범벅이 된 “이 세상” 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파리가 똥 위에 앉기란 쉽지만, 벌은 힘듭니다.  그러나 오염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언제나 꽃밭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때로는 오염된 오물단지를 지나가야 하고, 때로는 흙먼지도 맞으며 날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벌의 이야기입니까?  아니지요?  우리 성도들의 인생 이야깁니다. 
우리는 거룩해야 하고, 성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교회에서만 지낼 수가 없는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잖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빛은 세상 가운데서 밝히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성도, 이런 성도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물과 기름을 한 통에  섞어 놔 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기름이 물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함께 섞어 놓은 통을 힘껏 흔들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기름이 물 위로 올라오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분리 된 것은 아니지요.
물과 기름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던, 흔들어 놓았던 언제나 기름이 물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어느 청년이, 한 중소 기업체에 입사를 했어요.  이 청년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아주 신실한 크리스챤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회사 사람들에게, 별로 호감을 사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사원들끼리 회식을 가게 되면, 서로 잔도 주고받고 잘 어울려야 하는데, 술을 못하니까 이 청년이 늘 안주만 먹는 겁니다.  여러분, 술값이 비쌉니까?  안주 값이 비쌉니까?  안주 값이 비싸지요.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안주 값이 술 값보다 훨씬 더 비쌉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눈치도 없이, 자기는 술 못 마신다고, 안주만 계속 먹어 대는 겁니다.

또 회식 자리에 가면 의례 노래도 부르게 되는 데, 이 청년은 또 세상 가요도  잘 모릅니다.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찬송가하고 복음송 뿐입니다. 
그러니 맨 날 부르는 것이 십자가 군병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  그러니 분위기 확 깨어지는 거지요.  어디 분위기만 깨지겠습니까?  옆 사람 술도 확 깨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회사 사람들에게 별로 호감을 주지 못했던 청년이, 나중에는 어느 누구보다 더 빨리 승진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항상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들이 변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 청년은, 술 주자 酒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내 인생의 구원자 주님에게는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드러난 자리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출근할 때는, 사무실 직원 중에서 가장 먼저 출근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책상뿐만 아니라, 동료, 상사 책상까지 말끔하게 닦아 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 사원들 책상에는 때로 꽃도 몇 송이 꽂아 놓기도 합니다. 퇴근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제일 늦게 퇴근하면서 모든 자리를 다 정리합니다. 그러니 누군들 그 청년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인정받고 호감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요.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해도, 몇일 지나면 그만 두겠지 하고 바라 본 것이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2년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 승진 시험을 치는데, 시험관이 이런 자기를 제일 못 마땅하게 여겼던, 절에 다니는 상사입니다.  그 양반은 독실한 불교 신자입니다.  그래서 바짝 긴장을 했는데,  왠 일입니까? 
바로 그 상사가, 이 청년의 믿음과 신앙을 인정해서,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회사에 강력 추천해서, 승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룩이 뭐냐?” “거룩은 세상과 다름이다.” “감동이 뭐냐?  세상과 다름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우리 성도들의 삶이 세상과 다를 때,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있고, 우리 성도들의 삶이 세상과 다를 때,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 성도들이 삶이 세상과 다를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신앙의 삶을, 우리 성도들이 올 한 해 동안에도 살아갈 것을, 원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세상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에 끌려가며 살질 않고, 오히려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새롭게 뜻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이 말씀 앞에  엎드리며, 주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아멘으로 순종하면서, 새롭게 뜻을  정하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가운데, 그저 막연한 생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또 다시 우리는 세상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다시 세상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세상에 힘없이 끌려 다니면서, 무능력하게 이 한 해를 마감하게 될 줄로 압니다. 

그래서 뜻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제 1월도 벌써 절반이 넘어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이런 각오가 없다면, 이런 결심이  없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이제라도 마음에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하면서, 새롭게 신앙의 출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 앞에 새롭게 뜻을 정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믿음의 사람, 다니엘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결심했다는 뜻입니까?  마음에 작정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에 자기의 목숨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작심삼일과 같이, 쉽게 번복할 수 있는 가벼운 결심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건 중대한 결단이었다는 겁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아, 영어 썼어요.... 

실로 다니엘이 처한 상황이 그러했다는 겁니다.  자신이 이러한 뜻을 환관장에게 밝혔을 때에, 세상적으로 보면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지금 다니엘이 누구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까?  환관장의 명을 거역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왕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당시 왕명을 거역한 사람은 무조건 사형입니다.  다니엘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내가 이 음식을 먹으면 내 영이 죽을 것이고,  내가 이 음식을 거부하면 내 육신이 죽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내 육신이 죽는 쪽을 택하겠다.  이런 신앙적 각오가, 다니엘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 하겠다는 뜻을 새롭게  정하셨습니까?  물론 다 정하셨는 줄 압니다.  그러나 뜻을 정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뜻을 정했지만, 그 의미는 각기 다 다를 줄로 압니다.  새롭게 결심함으로, 내심 자부심을 느끼겠지만, 다니엘과 같은  이런 의미의 뜻을 정함이 아니라면, 우리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줄 압니다.

뜻을 정했다고 하는 것은, 이제 내가 목숨을 걸고 그 뜻을 행하겠다는 뜻입니다.  쉽게 그만 두고, 중도에라도 포기할 정도의 뜻을 정함이라면, 우리는 아예 뜻을 정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여러분, 다니엘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12절, 13절 말씀을 보세요.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청하오니” 라고 했습니다.  환관장이 말리는 데도, 막무가내로 자신의 뜻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10일 동안 시험해서 마음에 안 들면 죽이라는 겁니다.  환관장이 볼 때 다니엘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미친놈처럼 보였을 줄 압니다. 이런 것 보면, 다니엘도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미쳤습니까? 
하나님께 미친 사람이예요.  여러분 보세요.  구약을 보나, 신약을 보나, 또 현대사를 보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님께 미친 사람들은 다 위대해지고, 그 인생이 복을 받으며, 또 후세에도 크게 이름을 남기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1930년,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서, 대서양 횡단에 최초로 성공한  미국인 린드버그 대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당시, 그 정도의 비행기를 가지고 대서양을 횡단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른 몇 시간동안 비행을 하면서, 결국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세상 사람들의, 영웅이 되어졌습니다.  그가 이런 성공을 거두고 파리를 방문했을 때, 수십만 명의 인파가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스타가 된 것이지요.  이 때 한 담배 회사 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담배 광고 모델로 세웠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린드버그에게 담배 한 개피를 주면서,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잡아주시면, 5만 불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5만 불이면 얼맙니까?  한 5천만원 되나요?  지금도 5만 불이면 상당한 돈입니다.  그런데 80년 전 5만 불이면, 그 가치가 어떠했겠습니까? 
그 당시 담배 회사 사장이 이렇게 엄청난 제안을 했지만, 린드버그는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사장님, 저는 세례 교인입니다.”  “사장님, 저는 세례 교인입니다.” 
여러분, 뭐라고 했습니까?  세례 교인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교인... 
“나는 집삽니다. 장롭니다.”  좀 더 거창한 직분을 내세우며 거절한 것이 아니라, 겨우 세례 교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예수를 주로 고백한 성도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말로 더 분명한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집사기 때문에,  내가 권사기 때문에, 내가 장로기 때문에, 그 직분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주로 고백한 성도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겠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 린드버그의 말이 알려져,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났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당시에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즉시로 성금을 모아서 격려금을 전달했는데, 5만 불의 2배인 10만 불을, 린드버그에게 격려금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의 방법대로 끌려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아직도 우리가 분명한 신앙적 뜻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격언에도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서도, 신앙적 뜻을 아직까지도 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찌 그를 진정한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자신의 신앙철학을 선포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분명한 신앙적 뜻을 정하고, 분명한 신앙철학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뜻을 정하는 신앙으로, 이런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올 한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세상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번째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6절과 7절 말씀을 보세요.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환관장이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바벨론의 문화의 이름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바벨론의 방법대로 바꿔어 버립니다.

왜 이런 작업을 하는 겁니까?  그들이 가진 신앙인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기 전에, 우상 앞에 놓인 음식을 먹게 하기 전에,  그들의 이름을 바꾸어서, 신앙인의 정체성을 잃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름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  그런데, 이 이름을 벨드사살로 바꿨습니다. 그 뜻은 “바벨론의 우두머리 신인 마루둑이 너를 보호하신다.” 입니다.  하나네는, “여호와는 자비하시다” 라는 뜻인데, 사드락 이라고 바꿨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바벨론의 월신인 아쿠의 명령이다”

또 미사엘은, “주님 같은 이가 누구인가?” 라는 뜻인데, 메삭이라고 바꿨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아쿠같은 이가 누구인가?” 
또 아사랴는 “여호와는 도와주신다.” 라는 뜻인데, 아벳느고로 바꿔버렸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느고의 종이다” 라는 뜻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창시개명까지 하면서, 철저하게 바벨론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버려라.  이제부터 너희를 지켜 주는 것은 마루둑이고, 아쿠고, 느고다.  이것이 이제부터 너희의 주인이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정체성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신앙의 정체성이, 결국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하였고, 또 신앙의 승리를 거두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세상을 닮지 아니하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이런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타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정체성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속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한다면, 이 신앙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Who am I?”  내가 누구냐?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신분을 정확히 밝혀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야”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야”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과 다른 사람이야”
이런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우리가 세상의 방법대로 살지 않게 되고, 세상 속에서도, 주의 이름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길 바랍니다.  크게 아멘 하시길 바랍니다. 
이 곳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교회 밖의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2007년도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에 하나님의 방법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 위해서는, 분명한 신앙적 뜻을 정하고, 분명한 신앙철학을 가지고, 그 철학을 선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나아가, 이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갈 때에 나타나는 능력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상 앞에 놓였던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자, 환관장이 말합니다.  채소만 먹어서 얼굴이 초췌하면 왕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나를 문책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잘 먹으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내기를 겁니다. “당신의 종들과 우리가 열흘 동안 채식을 주어 먹게 하여, 10일 후에 어떻게 되나 시험해 봅시다.”
다니엘이 도전합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봅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할렐루야!
자신에게 나타난 증거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인생에 위대한 일이 벌어진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는 우리에게 세상의 법을 강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924년 피리 올림픽, '올림픽의 꽃'인 100m달리기 결승전 경기가 주일로 잡혔습니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영국의 에릭 리들은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주일은 경기를 하지 않는다.  예배드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 
주일 성수를 위한 에릭 리들의 결단에 영국인들은, 조국을 배반한 자, 옹졸한 신앙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며칠 후 에릭 리들는 400M달리기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400M는 자신의 주종목이 아니었습니다.  에릭 리들은 처음부터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관중들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렇게 달리다가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릭 리들은 예상을 뒤엎고,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기자들이 우승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200M는 내가 뛰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직접  달리셨습니다.” 영국인들은 이 에릭 리들의 용기와 투철한 신앙에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 우리는 이러한 신앙으로 축복의 증인된 삶,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시면, 하나님은 온갖 것을 다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재능 있게 하시고, 실력 있게 하시고,  유명하게 하시고, 부요하게 하시고, 또 권세 있게 해 주십니다.  아멘!!

오늘 다니엘을 보세요.  17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귀한 신앙이지만, 그들의 신앙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축복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다니엘만큼의  축복은 받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 친구들에 비해, 다니엘은 언제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처음에 뜻을 정한 것도 다니엘이었고, 환관장에게 요청한 것도 다니엘이었고, 왕 앞에 먼저 나선 것도 다니엘이었습니다.  이런 담대한 신앙, 적극적인  신앙이 그에게는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세 친구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고, 더 큰 능력을 받았고, 더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라고, 다 똑같은 은혜가 아닙니다.  축복이라고,  다 똑같은 축복이 아닙니다.  능력이라고, 다 똑같은 능력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크기,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신앙을 드러내는 만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만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믿음으로 담대하게 부딪히는 만큼,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까?  어떤 축복, 어떤 능력  받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다니엘과 같은 신앙으로, 남들이 받지 아니한, 풍성한 은혜와 축복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세상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실력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실력으로 그들을 압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방법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다짐하시고, 이왕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신앙생활 하는 것, 다니엘과 같이 정말 목숨을 건 신앙의 뜻을 세우며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정체성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를 받아, 세상에 놀라운 능력  행하며, 영향력을 미치며, 이 땅에 축복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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