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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굴곡 (왕하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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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왕하 18 : 1 - 8
제목 : 신앙의 굴곡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는 소망이 있다면, 아마도 꾸준히 변하지 않는  신앙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신앙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런 신앙으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당당히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을, 소망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흠 많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가운데서도, 평생을 의롭게 살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을 들은 다윗도, 평생을 의롭게 살아가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일생을 동행하였다는 노아도, 평생을 의롭게 살아가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이 범죄하며 살아갔습니다. 아니지요, 우리보다 더한 죄를 짓고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어떤 죄를 범했습니까?  십계명 중에 다섯 가지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살인죄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 장군 우리야를, 계획적으로 죽게 만든 살인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어떻습니까?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을 채로, 하체를 자식들에게 드러내며 잠을 잤던 인물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함이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함이 아비의 하체를 바라보고 그대로 방치해둔 죄를, 더 크게 논하고 있지만,  사실 더 큰 죄는, 노아가 지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취하면 그냥 취하지, 왜 옷을 벗고 난립니까?
한마디로 주정을 부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으로 아들이 실수를 범했을 때에, 그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저주를 해버린 무정한 아버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전혀 본받을 것이 없는, 그런 인물이 노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창 6 : 9절에 보니까,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당세에 완전한 자라”  무엇이 완전하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완전” 이라는 뜻을, 우리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신앙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사람의 일생을, 전체를 바라보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일생의 시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평균을 내었을 때에,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하면, 그 사람은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은, 타자들을 평가할 때에 타율로 평가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잘 치는 타자라고 한다면, 타율이 3할은 넘어야 합니다.
4할이 넘으면, 그는 타격의 달인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한 시즌이 아닌, 야구 인생 전체의 타율이 4할이 넘는 사람은 아직  까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3할만 되면, 그는 훌륭한 타자로 인정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3할 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열 번 중에 세 번밖에 못 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만 성공하고 일곱 번을 실패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그를 훌륭한 선수로 인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닌 기계라면, 열 번을 치면, 열 번 다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일곱 번을 실패를 하고, 세 번만 성공을 해도, 잘했다고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완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완전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가장 악한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교만 중에서도 가장 악한 교만입니다.  사람이 완전하다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은혜를 입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평생을 변함없이, 완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까?
할 수 없으니 포기해 버립니까?  그냥 그런대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면 됩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타자들이 그나마 3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끊임없이 노력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하면, 노력하지 않는다면, 3할을, 열 번 중에  세 번도 성공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는 신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굴곡” 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때때로 신앙이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슬럼프라고 하지요?
이런 슬럼프를 겪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경험을 했고, 여러분도 경험을  했을 줄 압니다. 아니, 지금도 슬럼프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모두에게는 신앙의 굴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러한  상황에 놓여져 있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슬럼프에 빠져 있는 자신을 빨리 알아차리고, 말씀의 교훈을 받고,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본받으며, 다시는 그런 슬럼프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히스기야가 나옵니다.
이 히스기야는, 유다의 역대 왕들 중에, 선왕으로서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  입니다. 아마 역대기의 왕들의 이름을 몰라도, 이 히스기야 만큼은 잘 알 정도로 유명한 왕입니다.

그런데 이런 히스기야에게도, 신앙의 굴곡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에 대해서 성경은 18장, 19장, 20장 석장을 할애하며, 그의 인생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에 대해서는 짤막짤막하게 소개를  하고 있는데 반해, 히스기야 만큼은, 자그마치 석 장을 할애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주목할만한 인물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석 장의 성경에, 그의 신앙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올라갈 때는 아주 멋있게 올라가는데, 내려올 때는 아주 비굴할 정도로 곤두박질을 칩니다. 그리고는 그 슬럼프를 벗어나는 모습이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히스기야의 신앙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자신의 모습을 한번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좋을 때의 모습과, 그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축복, 그리고 신앙이 떨어질 때의 모습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 그리고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는 모습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시고, 자신을 바로 세워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히스기야의 신앙이 좋았던 때를 살펴봅시다.

1. 히스기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했습니다.
3절 말씀에 보니까,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라고 했습니다.

다윗과 같이 정직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은 왕은, 유다의 역대 왕들 가운데에,  단 세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히스기야와 아사와 요시야, 단 세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정직한 왕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히스기야를 포함한 단 세 사람만,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라는 단서를 붙였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정직히 행한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정직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직이라고 다 정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정직한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때로는 자신이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하나님 앞에 정직을 지켜나갔다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나이가 25세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입니다. 더군다나 그 아비 아하스는 유다의 악한 왕중에 손꼽히는 왕이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 자라난 히스기야가, 정직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25세면 얼마나 혈기가 방정맞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나이에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권력을 얻었다면, 아마 방탕한 생활을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아버지를 본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일반의 역대 왕들을 본받은 것이 아니라, 그 왕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다윗을 모델로 하여, 그의 삶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선언을 하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정직히 행하는 일이기에, 그 정직을 다윗의 수준으로 삼고, 그것을 지켜 나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서려면,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사람들만 적당히 만족시키며, 정직을 행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정직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며 외친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기본인 줄로 믿습니다. 신 6 : 18 절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복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정직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수준의 정직은 아닌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직의 수준을, 다윗의 수준까지 높여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정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히스기야는 성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4절 말씀에,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분향함으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 우리 인간들을 만나시기를 원하시지, 인간들이 임의로 정한 장소에서 만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임의로 산당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 곳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겠습니까?

이 산당을 히스기야는 과감히 부수고, 성전 중심으로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산당 제사의 철폐는 역대 왕들 중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할 만큼 습성에 젖어 있었는데, 히스기야는 과감히 산당 제사를 폐하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놋뱀도 부숴 버렸습니다.  놋뱀은 출애굽 당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시로 모세가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효력이 끝난 놋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놋 뱀을 과감히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향해 “느후스단”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아닌 “놋 조각” 이라고 비웃어 버렸습니다.

아마 이 사건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모세가 만든 것을 감히 부숴뜨릴 수 있는가?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백성들의 원성에도 과감히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 중심으로 신앙생활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장소입니다. 이 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집니다.
오늘날 설교집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방송설교도 무수히 쏟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전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를 못합니다.
지식적으로는 많이 아는데, 전혀 삶에 적용이 없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하나님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해 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게 듣기 좋은 것이 은혜입니까?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에, 영혼의 만족함이 있습니까?
여러분, 잘못된 신앙입니다.  내가 만족함을 얻으려고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듣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신앙.
이것이 올바른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 따라 이곳저곳 해매지 마십시오.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분의 말씀을 사모한다면, 목사님이 전하시는 모든 말씀이 다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참 성숙하고, 본받을만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자기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교회에서 듣고, 기도를 해도 교회에서 합니다.
외식 자주 하는 사람치고, 냉장고가 가득 찬 집 발견하기 힘듭니다.
외식 자주 하는 사람치고, 건강한 사람 발견하기 힘듭니다.
성전 중심으로 신앙생활 해 나가실 때에, 늘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6절 말씀에,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이렇게 히스기야가 정직히 행하며, 성전중심으로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했을 때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7 - 8절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이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히스기야가 7년 만에 신앙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7년 뒤에는 신앙이 곤두박질칩니다.  7년 만에 견고한 성이,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함락을 당합니다. 그리고 다시 7년 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이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해 함락 당하고 맙니다.

그 동안의 히스기야의 신앙생활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견고한 성읍들이 함락 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능히 알 수가 있습니다.

“견고한 성” 무너질 수도 없고, 또 무너져서도 안 되는 성이 견고한 성입니다.
그런데 무너졌습니다.  왜 무너졌을까요?
그 이유가 1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거스려 듣지도 아니하며, 행치도 아니 하였음이더라.”  앞장선 지도자의 신앙이 희미해져 가니까, 따르는 백성들은,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7절 말씀에는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라고 했는데, 14절 이하의 말씀을 보게되면, 앗수르 왕에게 벌벌기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이 명하는 조공을 다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내어 주고,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모두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이전의 당당한 히스기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곤두박질치니까, 이런 형편없는 사람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인 히스기야라 할지라도, 신앙이 떨어지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으니까, 별수 없이 보통의 사람으로, 아니 그 보다 더 못한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라고 다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떨어지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굴곡으로 인하여, 신앙의 슬럼프에 빠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을 방치해 두다가는,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슬럼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 내가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알아야 고칠 텐데, 모르니까 못 고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신앙이 떨어진 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14년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슬럼프에 빠진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내 주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 된 사람의 신앙이 떨어지면,내 자녀들의 신앙은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형편없이 되어 버립니다.
내 신앙이 떨어지게 되면, 주변의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내 말에 대한 권위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전에 당당히 맞섰던 세상이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두렵게 느껴지고, 세상에 끌려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자신은 그래도 어느 정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패역을 범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더 이상 히스기야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앗수르 왕의  사신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28 - 31절까지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히스기야 역시도 앗수르 왕을 두려워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까지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욥 23 : 10절 말씀을 떠 올렸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믿음으로 정금과 같이 된 믿음을, 내 신앙의 기둥에 입혀 놓았는데, 그래서 그 아름다운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는데, 이제는  스스로 그 정금 같은 믿음을 신앙의 기둥에서 벗겨내어, 세상의 왕에게 바치는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성전에 믿음의 기둥이 온전하게 잘 세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이제는 세상에 다 내어주고, 빈 껍데기의 신앙만을 유지한 채, 황량하고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 분은 지금 신앙의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깨달으시고, 속히 그 슬럼프를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견고한 성”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지켜주셨기에 “견고한 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견고한 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 127 : 1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슬럼프를 벗어나는 히스기야를 보십시다.
19 : 1절에 보니까,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라고 했습니다.
다시금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사실 여호와 전에 무엇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이미 다 주어버렸습니다.
황량한 기둥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실 들어가기 싫었을지도 모릅니다.
은과 금 모두를 다 빼앗겨 버렸는데,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 무슨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히스기야는 깨달았습니다.  그 성전에는 빼앗기지 않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은과 금과는 비교가 되질 아니하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하나님을 찾아 성전에 들어갔고, 그 성전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시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 떨어지고, 은혜가 사라지고, 내가 이제까지 누리던 축복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사실 신앙생활을 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기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히스기야와 같이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일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기 전 히스기야가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전심으로 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회개 없는 새로운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내가 어렵게 된 이유가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질 않습니다. 
모든 책임이, 나의 불신앙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전심으로 회개하시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히스기야가 병이 났습니다.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기도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끊어 버린 채,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는 이런 체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실수를 저지릅니다. 바벨론 사신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모든  물질의 풍성함을 다 보여 줍니다. 그 결과 또 다 빼앗겨 버립니다. 다시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또 다시 그가 일어섰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굴곡이 있는 신앙의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인정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중심이 늘 하나님께로 향해 있고, 실패했을 지라도 다시금 하나님 앞에 회개  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신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들도 이 히스기야의 모습을 보면서, 실패의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신앙의 오뚝이가 되어 속히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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