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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에서 벗어나는 신앙 (마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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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마 9 : 18 - 26
제 목 : 절망에서 벗어나는 신앙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보시고,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너무 강조하시기  때문에, 어떤 때는 주님이 이 믿음을,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무엇 입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래서 오늘 본문 22절에서도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막 9 : 23절에도 보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또 막 11 : 24절에도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할렐루야!!  마찬가지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이 믿음의 역사를,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막상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 믿음이 그다지 큰 능력을 발휘하질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한번쯤은 해 봤을 줄로 압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정말 오랫동안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거나,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간혹 욕심을 따라 구할 때도 있기는 있지만...
그렇다고 기도할 때마다, 내 욕심을 앞세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이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문제입니까?  성경을 믿는 내 믿음이 문제입니까?  어느 것이 문제이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거짓이 없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결국 문제는, 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경 속의 인물이나 예수님이 약속하신 만큼, 삶 속에서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분명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이 주님 보시기에, 부족한 까닭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지요?  도대체 우리가 얼마만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믿음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는가?  우리는 믿음을, 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판단 하실 때, 큰 믿음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양적으로, 많은 양의 믿음이 필요한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은 양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질인 것입니다.  양보다는 질이라는 것이지요. 
질이 좋은 믿음은, 크기가 작아도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꼭 많아야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비싼 것들을 가만히 보세요.  그것들 중에 큰 것이 있습디까? 
거의 대부분은 크기가 자그마합니다.  그러나 비록 크기는 작지만, 그 내용면 에서는 질이 뛰어나기에, 모두가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계방에 가서, 큰 괘종시계를 사면서, 주인에게 작은 손목시계 하나 끼워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크면 무조건 좋고, 작으면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는 줄 알았던 것이지요. 
우스개 소리 같지만,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믿음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질 좋은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질 좋은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인가?  믿음의 요소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들어가 있는 믿음이, 질 좋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순물이 들어가 있지 않은 믿음, 순수한 믿음, 순전한 믿음,  이런 믿음이 질 좋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질 좋은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멘!!! 
히 11 : 6절에 말씀하지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습니까? 
그 분의 존재와, 그 분의 전지전능하심을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 좋은 믿음의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완전히  무지무능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고, 깨뜨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할 때, 자신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한참 “내려놓음” 이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베스트셀러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서점에 가 보니까, 이정도 내려놓은 것으로는 만족함이 없었는지, “더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 이란 책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내려놓음”  우리가 내려놓는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내려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그것조차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 무능함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이 두 가지 요소를,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첫째는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요, 반대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이 둘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항상 같이 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항상 같이 나타날 때, 비로소 그 믿음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신앙생활 할 때는 어떻습니까? 
이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다 적용하질 않고, 항상 하나만 적용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의 믿음은, 대부분이 반쪽짜리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가 안 일어나는 것이지요.  믿음이 온전치 않으니,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여인이 나오는데,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혈루증이란, 출혈이 멈추지 않는 병입니다.  20절에 보면, 12년 동안 그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무려 12년 동안을 병으로 고생했으니,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있어 더 힘들게 만든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더 큰 고통이 따랐다는 것이지요.  왜입니까? 그 당시 율법에서는, 혈루증을 부정한 것으로 정죄하고, 남과 접촉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위로받지를 못하고, 도움도 받지를  못하는, 불쌍한 처지에 빠진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그 여인은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을 가졌는데,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인의 신앙, 얼마나 대단한 신앙입니까?  이런 여인의 믿음,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지요.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시고,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이 여인과 같이, 부끄러움을  버리고 주님 앞으로 담대해 나아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 맞습니다.  맞고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병 낫기를 소원하지 않는 환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불신자라도, 자기가 죽을병에 걸리게 되면, 전도하지 않아도 교회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성도님들은 거의 없을 줄로 압니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성도들의 믿음이, 이 정도의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은 동전의 한 면만, 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동일한 사건을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26절에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 세상에서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가봤고, 또 효험 있다는 처방은 다 써보았지만, 결국 재산만 다 탕진하고, 병세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제 그 여인에게서는, 해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더 이상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하나의 사건의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이어서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경우는, 사태가 더 심각합니다.  그 딸에게 있어서는, 치유의 길이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딸이 완전히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혹 어떤 비류들은 주장하기를, “완전히 죽지 않고, 가사 상태에 빠진 소녀를 예수님이 다시 깨워준 것뿐이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장례식을 더 엄숙하고 슬픈 분위기에서 치르기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대신 곡해 주는 자를 고용합니다.
본문 23절의, 피리 부는 자와 훤화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야이로가 돈을 주고, 그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심장 박동과 호흡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부를 리가 있겠습니까?  또 그 고용된 사람들은, 사람들의 죽음만 보고 다니는, 소위 말하는 장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래서 24절에, 예수님께서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비웃은 것입니다.

이 모든 정황들을 살펴볼 때에, 이젠 사람들이 그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조금 있다가 장례 절차만 마치면,  이제 그 딸은 이 땅에서, 그 존재마저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열 두 해를 혈루증을 앓은 여인과, 딸의 죽음을 바라본 회당장 야이로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둘 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수단은,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고치고, 되살릴 노력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나를 고치고 내 딸을 살리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완전히 항복한 상태였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두 가지 믿음의 요소가 동시에 작용했기에, 그들이 공통적으로 주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인간 쪽에 무슨 수단이나 미련이 남아 있으면서 누군가를 따르는 것은, 항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협 내지는, 중재, 조정, 계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터지자, 완전 속수무책이 되어, 무조건 두 손 두 발을 다 든 것과 같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가난하며,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지, 그 모습을 함께 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이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도저히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것을 아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삶 전부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깨달은 성도는, “주여, 오직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는 고백을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된 신앙

그렇다고 여러분, 자신의 전 존재와 생애를 주님께 내어 드린다는 것이,
꼭 선교사로 나가거나, 교회를 위해 어떤 큰일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절대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필연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 어떤 절망적인 일에라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원하신 목적과 뜻이 숨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항상 절망에서부터, 벼랑 끝에서, 인생의 절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개인적 욕구가 완전히 고갈되어,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고 싶은 일, 계획하고 있는 일,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없애고자 하는 소원까지, 무시라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일들을 이룰 수단과 방법이, 내 쪽에는 단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위로를 베푸시고, 은총을 베푸시고, 능력을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런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기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십니까?  인디아나 존스 3편에 보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통과하면, 그토록 갈망하던 성배를(술잔) 찾게 되는데, 갑자기 눈앞에 천길 낭떠러지 절벽이 나타납니다. 
그때 그 주인공인 해리슨 포드가 어떻게 합니까?  예전에 성배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허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성배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기억하고서는, 헤리슨 포드가 아버지가 가르쳐 준대로, 허공에다 한 발자국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발밑으로는, 천길 만길 낭떨어지입니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까마득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절벽에서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내 딛게 되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그때 갑자기 ‘쨘’ 하고 발밑에 다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헤리슨 포드는, 그 다리를 건너 무사히 성배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아주 재미난,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의 영화 이야기지만,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본질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고 듣고, 만져지는 것들은, 누구라도 믿을 수가 있습니다.
훤하게 보이는 것들 안에서는, 어린아이라도 얼마든지 뛰어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훤히 보이는 것들이 끝난 곳,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 그 절망의 순간, 그 때 뛰어 내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잘 모르겠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슬픔이 계속해서 겹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을 오히려 꽉 붙잡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보험 들 듯이 뛰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까, 까짓 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뛰어 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뒤에서 등을 떠밀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허공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 갑자기 다리나 나르는 담요가 나타나서, 나를 기적적으로 받혀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점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시험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 위험과 고통의 순간에, 도무지 헤어날 길이 없을 것 같은 그 절망의 순간에, 그 천길 만길 낭떠러지 밑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생명과 인생을, 이미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완전히 바쳤기 때문인 것입니다.  갈 5 : 24절에 말씀하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기에,  그 절망의 절벽 아래로 담대히 뛰어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의 신앙이요,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런 담대한 신앙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한 것이 잘 해결이 안 되고, 마음에 소원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생각부터 듭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못 들으시는 것이 아닌가?  내 믿음이 약해서 그런가?  왜 이루어 주지 않지?”  대게는 의심, 아니면 불평, 둘 중 하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오로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바울의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결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기꺼이 주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헌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빨리 응답받고 싶어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보챔과 떼씀’ 만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 문제 하나하나에서 자신의 무지무능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어디로 이끄시든지, 저는 항복하고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결단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다고 했습니다.
막 5 : 27절에서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고, 복을 받아 보려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들은 부정하다고 접촉도 하지 않으려는 한 병든 여인이, 거렁뱅이 모습으로, 그 무리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그 여인은, 더러운 먼지 길에 꿇어 엎드려 예수님의 겉옷자락을 살며시 만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과 영혼과 존재 전부를,  오직 주님의 뜻과 처분에 맡깁니다.  저는 세상에서 고립무원 된 자입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했습니다.  만약 주님마저 저를 외면하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정말 세상에는 의지 없어서, 두 손 들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곤, 주님의 자비와 긍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났고, 기적적인 치유가 이뤄졌고, 믿음이  믿음으로서 능력이 발휘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치유와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리, 죄인, 과부, 고아, 소경, 문둥병자, 중풍병자’ 와 같은 자들에게, 치유와 기적을 베푸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단순히 그들이 가난하고,  고난 가운데 있고, 불쌍해서, 도와주고,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야말로 사방팔방으로, 도움의 손길이 완전히  끊어진 자들이었고, 주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무능력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그 절망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능력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절망 가운데 고통받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절망이 너무 깊어,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그 느낌과 생각을 과감히 떨쳐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렘 29 : 11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믿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성도들이 이 땅에서 환난과 상처와 질병 가운데 고통 받는 것을 안타까와 하시고, 통분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구원과 응답이 더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거나, 그분의 손이 짧아서가 절대 아닙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만 바라보지 말고, 먼저 자신의 무지 무능함을 알고, 주님께 완전히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고 만족합니다.  주님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여러분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고백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됨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기 전까지는, 주님은 우리를 관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주님께 항복하는 순간, 주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셔서 우리를 위해 활동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앞면만 있고 뒷면이 없는 동전의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볼품없고 동전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만 믿고,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믿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먼저 주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 인생을 의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먼저 항복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오늘 본문의 두 주인공과 같이,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와 기적으로 가득 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신앙은 오히려 절망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으면서, 오늘 여러분의 삶에 위로를 받으며, 새로운 신앙으로 다시금 힘 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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