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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행 13: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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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행 13:36-43)
   
  저의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경 이야기를 해달하고 졸랐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시작해서 비롯되었는데 나중에는 저의 아이가 저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 달라고, 피곤할 때도 조르고 또 할 말이 없을 때도 조르고. 처음에는 할 말이 많았습니다. 삼손, 다윗, 다니엘,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기둥만 보면 제 아이가 그걸 밀려고 했습니다, 삼손 흉내를 내느라고. 처음에는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이야기 거리가 고갈되기 시작했습니다. 시편 같은 것은 얘기해 주기가 어렵고 바울 서신은 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했던 말을 또 하면 그건 들었으니까 새로운 것을 해 달라, 새로운 이야기를 내가 어디서 찾느냐 해서 늘 뭔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애쓴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그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이렇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같은 말씀을 해달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결국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말씀, 하나님이 주신 말씀, 우리에게 주신 말씀, 믿음과 순종과 사랑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표현하는 방법, 담는 그릇은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그 내용은 늘 똑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이라도 우리는 또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도 밥을 먹었고 그제도 밥을 먹었지만 오늘도 밥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지만 그럼에도 또 듣고 싶어 하는 이유도 단순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을 늘리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하는 일은 단순해요. 먹고 내보내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기들이 성장합니다. 건강한 아이일수록 많이 먹고 식욕이 왕성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은 것을 소화할 능력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영적인 식욕이 왕성해서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영적으로 체질이 약한 사람은 쉬운 말씀만을 소화할 수 있고 자칫하면 체합니다. 말씀을 듣다가 시험에 든다든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최악의 경우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식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스스로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영혼이 그것을 갈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난 사람의 영혼의 양식이요, 기도는 영혼이 숨 쉬는 것입니다. 사람이 숨 쉬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것도 기도가 마치 어떤 귀찮은 일처럼 마지못해 하는 일처럼 되어서는 안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걸어가면서 기도하고 또 일하면서 기도하고 기도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것, 그것이 영혼이 숨 쉬는 사람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인데 교인들의 ‘아멘’ 소리가 언제 가장 큰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이미 많이 듣고 잘 알고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할 때 그때 ‘아멘’ 소리가 제일 큽니다. 반대로 아무리 제가 생각하기에는 좋은 메시지라도 교인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메시지를 전하면 교인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두꺼비처럼 눈만 껌벅껌벅 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들을 때 그것이 감동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배움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을 처음 접하는 것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고 있었으나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그때 배움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교회에서 새로운 것만 추구하려고 하다가 이단에 빠집니다. 성경 말씀에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신약 성경은 이천 년, 구약 성경은 삼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설교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는 그릇,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여전합니다. 이천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오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에요. 반대로 이단은 화끈하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미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할 때 따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말세에 많은 이단이 거짓 이적을 행하고 믿는 사람이라도 미혹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단일수록 안 믿는 사람보다는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미혹하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되는데 그 지혜는 결국 성경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어보면 씨 뿌리는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렸을 때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자마자 새가 날아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새가 뜻하는 것은 마귀에요.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날아와서 그것을 먹어버리려고 합니다. ‘저건 목사의 개인 의견일거야. 저것은 하나의 철학일 뿐이야. 저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내가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게 마귀가 하는 일이에요.

  중세에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 성경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누가 가로막았는지 아십니까? 가톨릭교회가 체계적으로 그것을 금지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라틴어를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성경뿐만 아니라 예배 집전까지 라틴어로 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예배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모든 것을 집전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앙이 자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 중에 그 지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서 화형을 시켰습니다.

틴데일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교회사에는 그런 아주 이상한 과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그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과 맞물려서 불처럼 성경말씀이 퍼져하면서 영적이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례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퍼져갈수록 부흥이 일어나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쇠하면 그것은 영적인 쇠퇴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자라기를 원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법과 묵상하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되고 부모가 먼저 그렇게 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됩니다.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 논술을 가르치고 이것저것을 가르치는 그 열심만큼이나 그들의 영혼과 정신과 가치관과 도덕과 참된 인생의 방향을 심어주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내 도덕 수준으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자신을 PR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예수님, 그 안에 계신 성령의 주시는 감동과 지혜를 전할 때 거기에 힘이 있고 생명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들이 거듭나고 회개하고 또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소위 디지털 시대라고 하는 지금이나 과거나 마찬가지에요. 사람의 믿음을 돕는 방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기도, 말씀을 전하는 것, 성령을 의지하는 것, 이 방법은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방법인데 그것은 이십 일 세기의 우리도 똑같이 사용합니다.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이것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문화, 기술, 과학은 굉장히 발전했지만 사람의 신앙을 돕는 방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사용하셨던 방법을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사용합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입니다마는 그러나 인터넷, TV를 통해서 설교든 예배를 접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입원을 하면 인터넷 설교가 여러분을 심방해 줍니까? 자녀가 결혼할 때 TV 설교자가 주례를 해 줍니까? 아니에요. 성경말씀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에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누가 찾아가느냐? 교회의 장로, 감독, 목회자가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친히 기름을 바르고 주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은 이천년, 삼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방법은 여전히 효험이 있고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평이하게 가르치고 또 전하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방법 외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중세의 교회 개혁자들은 말씀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포함해서 시각적인 것을 다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는 의자와 강대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듣고 믿는다는 취지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이 듣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것은 필요 없고 오히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감각에 어필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운 것이 아니고 파이프 오르간을 비롯한 예배당의 악기를 다 제거해서 찬송 부를 때 악기 없이 불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악기라는 것은 사람의 영혼보다는 감정에 어필하기 때문에 엉뚱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데 음악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화음을 넣는 것조차 금지할 때가 있습니다. 화음을 넣으면 음악이 아름다워지지요. 그런데 교회 개혁자들은 그 아름다움까지도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고 오히려 영혼에 어필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족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만으로 족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에 비교하면 이러한 개신교의 전통을 생각할 때 요즘 우리나라 개신교의 소위 열린 예배니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예배는 너무 극단적으로 반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효과를 아주 극대화하는데 여러분, 유치부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습니다. 유치부 아이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인형극도 하고 그림도 보여주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언어의 훈련이 아직 안 돼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을 데려다가 말씀만으로 그들이 변화 받는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별의별 시각적인 효과를 동원해서 화려하고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예배를 드려야만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고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요청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지만 첫 번에 다 믿은 것이 아니고 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한 번 더 듣고 싶다, 한 번 더 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되풀이 하실 때가 있었지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것은 예수님이 말을 더듬은 것이 아니고 반복한 것입니다. 반복의 필요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도 당장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당장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 놓으세요.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여섯 개의 돌 항아리, 여섯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돌 항아리는 인간을 뜻합니다, 사람은 토기와도 같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섯 개의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 물은 성경 말씀을 상징합니다. 물을 사람 속에 가득 채워 놓으면 예수님이 어느 순간에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포도주가 뜻하는 것은 성령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워 놓으면 적절한 순간에 예수님이 그것을 성령과 은혜로 바꾸셔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하고 거듭나고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시키시는 분은 예수님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그릇에 말씀의 물을 가득 담아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이 그것을 성령으로 바꾸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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